안녕! 6년째 성수동에 살고 있는 에디터 유정이다. 사는 동네를 말하면 백이면 백 “핫플에 살아서 좋겠다!”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럼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아낀다. 왜냐고? 성수동은 교통의 요충지요, 팝업의 성지요, 브랜드가 모여드는 마케팅의 격전지. 덕분에 흥미롭고 재미난 동네지만 바로 이 장점들 때문에 가끔은 벗어나고 싶어진다. 성수동은 정말이지… 붐벼도 너무 붐빈다.
오늘 소개할 송정동은 성수동 끝자락에 있는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네다. 걸어서는 20분 남짓, 버스를 타면 10분 만에 도착하는 가까운 동네지만 활기찬 성수동과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정감 가는 분위기다. 오래된 미장원과 세탁소가, 가게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택이 빼곡한 골목을 누비는 마을버스가 있다. 가끔은 시끌벅적한 동네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송정동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하루 코스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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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곳
1유로프로젝트 코끼리빌라
1유로프로젝트는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도시재생 캠페인으로, 도심에 방치된 낡은 주거 공간을 1유로(약 1,400원)에 대여해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는 프로젝트다. 올해 2월 서울 성동구 송정동 ‘코끼리빌라’에서도 1유로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 사업을 주도한 민간 건축그룹 ‘로칼 퓨처스’ 최성욱 대표가 공간을 나눠줄 브랜드를 선택할 때 고려한 기준은 단 하나.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브랜드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함으로써 좋은 사람과 좋은 도시, 더 나아가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다.
코끼리빌라는 지하 1층부터 4층 루프탑까지 건물을 통째로 사용한다. 보마켓, 베러댄서프, 서울가드닝클럽 등 십여 개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어 전부 둘러보자면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내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 물건을 구매하는 것까지 한 건물에서 모두 가능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코끼리빌라의 첫인상은 마치 하나의 마을 같았다. 아주 작고 평화로운 마을.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브랜드가 모여 상생하는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 이 빌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 무척 친근해 보였다. 마치 같은 빌라에 사는 주민처럼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더라.
평일 오전 11시에 문을 열자마자 찾아가니 손님은 나뿐이었다. 어쩐지 낯선 곳에 여행 온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평생 살아온 서울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분주하게 뭔가를 나르던 직원은 이곳저곳 어색하게 기웃대는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지하도 구경하러 오세요.”라는 말에 이끌려 퀘스트를 부여받은 게임 캐릭터처럼 곧장 지하로 향했다.
앤티크 하우스 서울
코끼리빌라 지하에 위치한 ‘앤티크 하우스 서울’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10년 넘게 거주했던 부부가 운영하는 편집샵이다. 스페인 브랜드 ‘판크라시오’의 수제 초콜릿, 이탈리아 가족이 4세대에 걸쳐 전통을 이어온 ‘치프리아니’의 파스타 면 등 국내에선 찾기 힘든 제품을 독점으로 수입해 선보이고 있다. 덕분에 이곳에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다 보면 잠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온 것 같기도 하다.
10월 한 달 동안은 금요일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소규모 와인 파티가 열린다. 사장님 말씀에 따르면 혼자 놀러 온 사람도 모두 친구가 되어 나간다고. 호기심이 생겼다면 1유로프로젝트 인스타그램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자. 그 외에도 각 브랜드가 매달 새롭게 개최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 정보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코끼리빌라에는 앤티크 하우스 서울 외에도 재미난 이야기를 가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여럿 입점해 있다. 분기별로 새로운 테마로 꾸며지는 큐레이션 서점 ‘1유로 책방’, 더 나은 지구를 위한 친환경 생활용품을 제안하는 ‘베러얼스’, 도심 속 정원 라이프를 지향하는 ‘서울 가드닝 클럽’ 등. 전부 소개할 순 없지만 꼭 방문해 찬찬히 둘러보길 권한다.
1유로 책방
[‘건축가의 방’ 테마로 꾸며진 1유로 책방]
베러얼스
서울 가드닝 클럽
1유로프로젝트
- 주소 | 서울 성동구 송정18길 1-1
- 영업시간 | 11:00~20:00 (화요일 휴무)
[2]
일본식 카레를 파는 국수집
송정국수
사실 송정국수는 원래 계획에 없던 코스였다. 취재를 빌미로 직장인의 사치라는 평일 브런치를 즐겨보려 했건만, 미리 정해둔 식당이 사라지는 바람에 급히 찾은 식당이다. 노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송정국수는 회색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이 주를 이루는 송정동 골목에서 알록달록한 간판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겉모습보다 더욱 인상적인 인테리어가 기다리고 있다. 식당 안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내뿜는 자개 가구들은 사장님의 취향이다. 동네에 버려진 자개장과 서랍장을 직접 들고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오래된 물건에 무심하게 붙어 있는 힙한 스티커와 벽에 발린 청록색 페인트는 사장님 아들의 취향이다. 부자의 합작으로 언밸란스하지만 어딘가 힙한 인테리어가 완성됐다. 테이블마다 하나씩 놓인 주전자에는 보리와 강냉이, 결명자를 넣고 직접 끓인 물이 담겨있다.
평일 점심시간에 방문하니 작은 매장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송정동 사람들이 여기 다 모인 줄 알았다. 혼자 방문한 나는 난생처음으로 합석을 하게 됐는데, 듣자 하니 이 근방에서 제일 괜찮은 식당이라 주변 직장인이 많이 찾아온단다. 피크타임이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친절한 사장님 내외의 응대가 인상적이었다.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앞치마를 손에 쥐여 주고, 불편한 건 없는지 거듭 물어봤다.
메뉴 구성은 단출하다. 뜨끈한 국수 하나, 시원한 국수 둘, 한식 카테고리에 어울리는 낙지볶음. 나는 그 사이에서 혼자 튀는 치킨치즈카레를 주문했다.
사장님 아들이 일본 유학 시절 배워온 레시피로 만든 일본식 카레다. 진한 감칠맛과 적당한 매콤함이 치즈를 얹은 밥과 잘 어울렸다.
송정국수에서는 어떤 음식을 주문해도 바지락 칼국수 국물과 직접 담근 김치를 함께 내어준다. ‘칼국숫집 김치는 무조건 맛있다’는 사회적 약속에 걸맞게 맛있는 김치는 시원하고 칼칼한 겉절이 스타일. 당연히 카레와도 찰떡궁합이다. 안 어울릴 것 같은 일본식 카레와 개운한 칼국수 국물도 예상외로 괜찮은 조합이었다.
계절 메뉴인 콩국수는 가장 좋은 품질의 서리태콩만 써서 공들여 만든다고 한다. 콩국물만 구매해 가는 손님이 많을 정도로 인기 있는 메뉴라고 하니, 다음 여름에 방문해서 꼭 먹어 봐야겠다.
송정국수
- 주소 | 서울 성동구 광나루로11길 32
- 영업시간 | 11:30~16:00 (일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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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옆 풍경 맛집
송정커피
송정커피는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다. 처음 방문한 건 2021년 2월. 친한 대학 후배가 좋아하는 카페라며 데려갔다. 나무가 앙상한 추운 계절에 처음 방문했는데, 봄이 되고 다시 가보니 그제야 이 카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가 파릇파릇 살아나는 계절이 되면 창문 밖으로 액자처럼 펼쳐지는 산책로 풍경이 장관이다.
1층과 2층, 루프탑까지 갖춘 이 카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2층. 좌석 간 거리가 널찍하고 탁 트인 공간과 넓은 유리창으로 훤히 보이는 산책로 뷰까지. 가만히 앉아 멍때리기만 해도 좋은 공간이다. 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는 한적한 동네라,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가져가 작업하기에도 좋다. 대부분의 좌석에 콘센트도 준비되어 있다.
송정커피는 30개가 넘는 종류의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데, 그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메뉴는 송정크림라떼다. 6년 전 방문한 익선동 어느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처음 마시고 쫀쫀한 크림에 홀딱 반했었다. 카페는 사라졌고, 나는 그 맛을 찾아 헤맸지만 뭘 먹어도 그 맛이 아니더라. 그런데 송정크림라떼에 올라가는 크림이 딱 그 맛이다. 마냥 달지 않고 고소한 풍미에, 휘핑크림처럼 너무 묽지도 않으면서 커피랑 따로 놀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은 질감이라 라떼와의 조화가 완벽하다. 참고로 여름에는 옛날 스타일의 컵팥빙수도 추천한다.
송정커피
- 주소 | 서울 성동구 송정길 82-3
- 영업시간 | 10:0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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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비밀의 숲
송정제방길
이곳이 바로 오늘 코스의 하이라이트. 송정제방길은 송정동부터 성수동까지 쭉 이어진 산책로다. 나무가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고 산책로 옆으로는 중랑천이 흐른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종종 보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자전거 통행이 금지된 곳이라 산책하는 강아지도 많이 마주칠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해가 지기 전에 성수동에서 송정동 방향으로 산책을 즐긴 후, 송정커피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다시 송정동에서 성수동 방향으로 걸으면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산책로는 누굴 데려가도 실패한 적이 없다. 참고로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가을에는 단풍길이 펼쳐져 더욱 아름답다.
오늘 소개한 송정동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네다. 오래된 가게와 건물이 가진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자주 가더라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익숙해진다. 시끌벅적한 성수동과 군자동 사이,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잠시 떠나온 듯한 쉼을 안겨주는 송정동.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때면 송정동을 떠올리고 찾아가 보길,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찾은 안정을 얻을 수 있길!
About Author
손유정
98년생 막내 에디터. 디에디트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