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한정판, 특별판, 그리고 콜라보레이션 전자 제품 리뷰를 빌미로 옛날 제품 이야기를 하는 ‘컬렉터’ 코너의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도 어렵사리 새로운 컬렉션을 구해왔다. 브리온베가(Brionvega)라는 회사의 라디오 큐보 50주년 기념모델이다. 정확한 모델명은 ‘TS522D+S 라디오 큐보 50’.
라디오 큐보를 만든 회사는 이탈리아의 브리온베가라는 전자회사다. 일단 사진을 보자. 색상부터 곱다. 나도 꽤 많은 오디오를 리뷰해왔지만 저렇게 비비드한 노란색이 잘 어울리는 오디오는 처음 본다. 이런 컬러풀한 색상으로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어색하지 않게 디자인할 수 있는 인류는 이탈리아인들이 유일하다. 뱅앤올룹슨도 이런 감각은 없다.
컬러풀한 색상과 유광 광택 재질, 여기저기 번쩍이는 크롬 라인, 레트로한 감각. 이런 디자인을 ‘미드 센추리 모던’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최근 유행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1960년대에 첫 제품이 나온 이후로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해서 신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흔치 않은 오디오, 라디오 큐보에 대한 리뷰다. 참고로 국내 정식 수입품이며 판매 가격은 89만 원. 모든 기념판과 한정판이 그렇듯 비싼 편이다.
라디오 큐보는 두 개의 네모난 큐브가 합쳐진 형태다. 언뜻 사진상으로는 크기가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크다. 220 x 130 x 130mm에 무게도 1.7kg으로 묵직하다. 요즘 기준으로는 작은 편이 아니지만 라디오 큐보의 첫 번째 버전이 나온 것은 1964년. 당시 기준이면 이건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초소형 라디오였다. 예전에 라디오는 요즘 냉장고만 했다. 예전 냉장고는? 요즘 자동차 크기였다. 예전 자동차는? 버스 크기였다. 예전 버스는… 그만 두자.
어쨌든 마이크로 오디오에 가까워 어디든 들고 다니라고 손잡이까지 달려 있다. 위쪽에 크롬 라인을 위로 쭉 빼면 손잡이로 변신한다. 손잡이 오른쪽에는 안테나도 달려 있다. 텔레스코프 안테나를 빼면 라디오 주파수를 잡는데 도움이 된다.
가운데를 기준으로 큐브를 반으로 가르면 검정색 패널이 나타나며 길쭉한 오디오로 변신한다. 외부로 이동시에는 두 개의 큐브가 합쳐져 있어 내부 패널이나 조작장치 등을 보호할 수 있고, 음악을 들을 때는 펼쳐서 즐길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메뉴팩처링 노하우가 떨어지는 과거 기준으로 폴더블 형태는 혁신이었다. 특히 두 개의 큐브가 케이블로 연결되야 하고 힌지가 견고하게 설계되지 않으면 고장이 나거나 케이블이 끊어지기 쉬운데, 이런 문제점을 잘 극복했다. 요즘 사람들이야 노트북이나 갤럭시 폴드, Z플립 등으로 인해 폴더블 제품이 익숙하지만 1960년대에 접히는 것은 부서진 제품밖에 없었다.
왼쪽 큐브에는 스피커 유닛이 있다. 4인치 유닛 사이즈와 9W의 출력이다. 하나의 유닛으로 모든 소리를 내는 풀레인지 형태고 출력도 높은 편이 아니다. 즉 넓은 공간용 스피커는 아니다. 밀폐형 설계라서 통울림이 적고 깔끔하게 음을 재생한다. 원래 라디오용으로 디자인한 스피커들은 대부분 하나의 스피커 유닛을 사용한다. 스테레오 유닛으로 구성하면 라디오 주파수 잡음이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초고역과 초저역도 잘라 버린다. 주파수 대역이 너무 넓으면 잡음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중음역대가 강조되고 목소리가 잘 들리도록 튜닝한다. 라디오큐보 역시 전형적인 라디오 튜닝으로 중음역대가 강조된 깔끔하고 두툼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사람 목소리나 보컬 음악을 따뜻하게 재생한다. 초고역이나 초저역은 나오지 않지만 FM라디오나 가요, 팝 등을 재생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대부분의 음악이 레트로하게 들린다. 뉴진스의 뮤직비디오를 귀로 듣는 느낌이다.
오른쪽 큐브에는 조작 노브가 몰려 있다. 고전적인 형태의 모노 LED상태 표시창이 있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노브와 볼륨 스위치가 자리잡고 있다. 조작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1960년대 디자인한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아래쪽에는 웃는 입처럼 보이는 볼륨 게이지가 있다. 전원을 켜면 빨간 LED가 현재 볼륨을 나타낸다. 요즘 웃을 일이 없고, 나에게 웃어 줄 사람도 곁에 없다면 라디오 큐보의 미소에서 위안을 얻어보자.
기능은 블루투스, FM라디오, DAB라디오, 그리고 AUX다. DAB는 국내에서 서비스하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블루투스와 FM라디오 정도의 기능을 갖춘 제품이다. 추가적으로 외부 기기를 연결할 수 있는 AUX IN, 그리고 헤드폰 단자도 있다. FM라디오의 감도는 좋은 편이며 잡음도 적은 편이다. 배터리가 내장돼 있어 전원 연결없이 6시간 정도 재생이 가능하다. 과거 오디오의 복각판이라는 것을 지우고 봐도 세련된 블루투스, FM라디오 겸용 제품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음악감상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음질 가치만 따지면 80만원은 좀 과하다. 하지만 라디오 큐보는 브리온베가라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이고 유럽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브리온베가는 1945년, 이탈리아에서 설립된 전자 회사다. 라디오나 TV 등을 만들었지만 경쟁업체인 독일이나 일본 전자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독일 업체에겐 기술력이 밀렸고, 일본과는 가격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브리온베가는 -이탈리아답게- 정면승부 대신에 비겁하게 디자인으로 승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TV와 라디오를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마르코 자누소, 리차드 사퍼, 로돌포 보네토, 프랑코 알비니, 마리오 벨리니, 아킬레 카스티글리오니 등 이탈리아와 유럽을 휘어잡던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거쳐가게 된다. 사실 이 중에서 절반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름부터 뭔가 멋진 디자이너의 포스가 풍긴다. 실제 이 사람들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거의 어벤져스급 디자이너들이다.
그 중에서 마르코 자누소와 리차드 사퍼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스타 디자이너였다. 마르코 자누소는 브라운의 ‘디터람스’에 있다면 브리온베가에는 ‘마르코 자누소’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리차드 사퍼는 훗날 IBM의 씽크패드 시리즈를 디자인했고 스티브잡스가 애플에 복귀하면서 가장 먼저 탐냈던 인재이기도 하다. (참고로 리차드 사퍼는 애플이 작은 전자회사에 불과한데다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게 싫어서 스티브 잡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꿩대신 닭으로 ‘조너선 아이브’를 선택한다.)
<초창기 라디오 큐보 모델>
브리온베가는 이 전설적인 디자이너 두 명에게 일본과 독일 제품을 이길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오늘 소개하는 라디오 큐보다. 라디오 큐보는 두 명의 천재 디자이너의 첫 번째 협업의 산물이다. 이 두 디자이너는 전자제품 디자인이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아이콘이 되길 바랬다. 그래서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던 기존 오디오 디자인을 무시하고 유광코팅 케이스와 스테인리스 스틸, 아연 합금 재질(패널 부분) 등을 활용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두 디자이너의 소원대로 이 모델은 각종 디자인상을 휩쓸었고 MoMA를 비롯해 전세계 디자인 관련 박물관에 전시됐다. 특히 록스타 ‘데이빗 보위’의 소장품으로도 유명했다.
브리온베가는 경영악화로 인해 2004년 파산했고 이탈리아의 SIM2 그룹이 관리중이다. 하지만 브리온베가의 제품들은 시대를 초월하며 살아 남았다.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아이콘이 되길 원했던 디자이너들의 바람은 현실로 이뤄졌다. 회사는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복각판이 나오며 6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재발매되고 있다. 화려했던 1960년대의 기억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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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모
유튜브 '기즈모' 운영자. 오디오 애호가이자 테크 리뷰어. 15년간 리뷰를 하다보니 리뷰를 싫어하는 성격이 됐다. 빛, 물을 싫어하고 12시 이후에 음식을 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