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아론이다. 본격적인 더위가 계속되는 요즘, 여름에 약한 나는 아직도 이 계절이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는 사실이 울적하다. 여름이 되면 사방의 공기가 바뀐다. 온도가 치솟고, 습기가 가득 찬다. 냄새는 더 빠르게 퍼지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계절에 맡으면 기분 좋았던 향들도, 여름이면 갑자기 싫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무거운 머스크, 딥한 우디, 끈적한 발삼, 부드럽고 크리미한 구르망 계열의 향들…. 모두 더위, 습기와 뒤섞이면 향기가 아니라 숨이 턱 막히는 냄새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 향수’를 찾는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상큼하고 상쾌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는 향들. 불쾌지수를 조금이나마 내려주는 그런 향으로 말이다. 단순히 소비자로서 향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시절에는 몰랐다. 다른 계절 동안은 존재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여름만 되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향기들이 있다는걸.
그동안 주로 크리미하고 우디한 향을 선보였던 논픽션에서도 그걸 느꼈는지, 올해는 여름을 겨냥한 시트러스 향을 무려 3종이나 내놓았다. 한 번에 3종 출시라니… 직접 조향하는 나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속도라, 부러운 마음을 품고 향을 만나보았다.
NEROLI DREAM
네롤리 드림
첫 번째 향은 네롤리 드림. 첫 향부터 아주 가볍고 화사한 네롤리 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네롤리는 비터 오렌지 나무의 꽃으로 만든 향료인데, 시트러스 특유의 상큼하고 쌉쌀한 느낌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달콤한 화이트 플로럴 느낌이 잘 살아나기 때문에 여름 향수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평소에 꽃향기를 좋아하는데 여름 향수를 찾고 싶은 사람이나, 너무 톡 쏘는 시트러스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추천하면 딱 좋을 향이랄까. 네롤리 특유의 향을 상큼한 비누나 꽃바구니에 시트러스를 뿌린(?)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지만, 가끔은 크레파스 향이나 색종이 냄새라고 느끼는 사람도 많으니 본인의 호불호를 잘 체크해두는 게 중요하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높은 온도를 자랑(!)하는 한여름에는 조금만 무거운 향을 써도 호흡이 곤란해지기 십상인데, 네롤리 드림은 꿈처럼 하늘하늘한 무게감이 매력적이다. 강도 높은 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투명한 뮤게(은방울 꽃) 향기가 네롤리의 달콤 쌉쌀한 향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준다. 잔향으로 갈수록 살 내음과 가까운 머스크가 슬쩍 등장하면서 점점 비누에 가까운 향으로 변한다. 동남아 고급 호텔에 비치되어 있을 것 같은 그런 휴양지 무드의 비누 잔향을 떠올리면 맞겠다.
꽃향기가 지배적이지만 중성적인 느낌인 네롤리 덕분에 성별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듯. ‘나 오늘 향수 뿌렸어’ 하는 과한 향보다는, 남들은 알듯 말듯 하지만 나는 충분히 기분 좋을 수 있는 향에 가까운 편이니 여름 향수로는 더더욱 합격!
OPEN ARMS
오픈 암즈
두 번째 향은 바로, 오픈 암즈. 직역하자면 ‘두 팔을 벌려’ 혹은 ‘팔을 벌린 채’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낯선 단어라 찾아보니 동명의 노래가 있었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음악을 틀어놓고 향을 맡아봤다. (굉장히 익숙한 노래였다. 누구나 들으면 ‘아, 이 노래!’할 법한.)
첫 향부터 시원한 나무 향과 약간의 시트러스 향이 뒤섞여 탁 트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오렌지 나무가 떠올랐다. 앞서 소개한 네롤리 드림이 비터 오렌지 나무의 꽃에 집중했다면, 오픈 암즈는 비터 오렌지 나무와 열매 그리고 꽃까지 한 번에 보여주는 향이다.
특히 비터 오렌지 나무의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만든 향료인 페티 그레인과 서늘한 전나무의 조화가 흥미롭다. 시트러스 느낌을 살리면서도 덥지 않은 우디의 질감을 이렇게 잘 표현하다니! 나무 내음 사이사이로 오렌지 껍질을 짓이긴 듯한 쌉쌀함이 등장하는 포인트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다만 다소 샤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우디 노트들이라, 사람의 살성에 따라 피부에 뿌렸을 때 어딘지 모르게 시큼한 냄새가 올라올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때로는 이런 ‘싸한 시트러스 향’을 모기약 냄새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어쩌면 향수에게 간택을 받아야 이 향을 근사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SIMPLE GARDEN
심플 가든
마지막 향의 이름은 심플 가든. 최근 몇 년 간 꽃집이나 꽃 시장 향이라던가, 정원의 이미지를 내세운 향들이 워낙 많아서 이름만 듣고 선입견을 가졌던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린 노트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로서, 심플 가든은 막무가내로 취향저격 당할 수 밖에 없는 향이었다.
첫 향에는 오렌지와 베르가못의 살짝 달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시트러스 뉘앙스가 가득하다. 그러고는 바로 뒤이어 청량하고 푸르른 풀잎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그리너리한 향으로 변신한다. 쌉쌀하면서도 초록 초록한 이 향기가 무거워지지 않고 기분 좋게 계속 이어지는 편.
의외로 첫 향의 시트러스가 자취를 감추고 나서도 달콤한 뉘앙스가 쭉 남아있기 때문에, 뾰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린 노트를 효과적으로 보완하며 잔향으로 넘어간다. 복잡한 흐름의 향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이하고 가벼운 우디와 은근한 꽃향기가 등장하며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풀만 무성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무와 꽃이 숨겨져있던 비밀 정원이었군! 간혹 그린 노트가 피부에서 맵게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신의 살성만 잘 파악하고 그 점만 조심한다면 실패 없을 향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울하거나 기분이 안 좋을수록 향에 더 매달린다. 가장 손쉽게, 빠르게, 셀프로 기분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니까. 게다가 나는 매년 여름,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다. (여름 좋아하는 사람들 부럽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여름에는 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셈.
멋진 조향사들이 만들어 둔 쿨하고 근사한 여름 향수들은, 여름 내내 나의 은신처이자 도피처가 되어준다. 더 많은 여름 향수를 준비해 둘수록, 내 마음이 쉴 곳 또한 더 많이 늘어난다. (내 지갑의 생각은 좀 다르겠지만.) 올여름엔 여기서 소개한 논픽션의 향들도 나의 도망칠 곳이 되어줄 예정. 게다가 내년의 나를 위해, 여름 향수를 열심히 조향하고 있으니… 향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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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