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맥주 한 캔만 먹어도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지는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아직 술은 맛보다 분위기로 먹는 거라 믿는다. 몸은 알코올을 밀어내도 마음만은 그렇지 못하는 이유다. 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밤이면 어쩔 수 없이 시원한 맥주를 떠올리곤 한다. 바깥에 앉아서 노상 맥주를 깐다? 지독한 감성충으로서 이건 못 참지.
나처럼 여름밤의 낭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준비했다. 맥주와 함께 먹기 좋은 서울의 테이크아웃 푸드 4가지. 염치없지만 제이팍에 빙의해 외쳐본다. 피맥, 버맥, 핫맥, 포맥 Let’s Go.
[1]
피자와 맥주
피저스 크러스트
시작은 피맥이다. 피자와 맥주의 시너지를 처음 경험한 건 20대 초반 해방촌 보니스피자에서다. 술을 못한다는 핑계로 콜라만 홀짝이던 초딩 입맛 앞에 나타난 듣도 보도 못한 해외 맥주와 페퍼로니 가득 올라간 하이 퀄리티 피자. 짜고 느끼한 맛이 혀와 목구멍에 가득 차오를 때 얼음같이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면 완벽한 입가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이어져 온 피맥 사랑은 지난 뉴욕 여행에서 또 한 번 불붙게 되는데… 거대한 크기에 얇지만 바삭한 도우, 토마토소스와 치즈를 기반으로 메인 토핑 하나만 두둑하게 올린 짭짤한 뉴욕식 피자야말로 피맥 조합의 정점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기사를 핑계로 서울에서 뉴욕식 피자와 맥주 조합을 다시 시도해 본다. 진짜 뉴욕에 갔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난 2월 종로구 내자동에 오픈한 피저스 크러스트.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유쾌하게 비튼 상호부터 인상적인 이곳은 ‘Authentic NY pizza place’를 표방하는 뉴욕 스타일 피자집이다. 뉴욕의 유서 깊은 피자집 ‘Joe’s Pizza’의 도우 레시피 및 나폴리 홈메이드 레시피를 사용하고, 캘리포니아산 토마토를 활용한 토마토소스를 직접 만든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기 전에 쇼케이스에 진열된 피자 조각만 보고서 기대감이 확 커졌다. 실제로 뉴욕에서 먹었던 것과 흡사한 비주얼이었으니까. 크고, 얇고, 심플한 형태를 조각 단위로도 팔고, 피자를 손으로 든 채 반으로 접어 먹기를 권하는 방식까지. 이 토핑 저 토핑을 정 넘치게 때려 박은 K-피자도 좋지만, 이렇게 투박한 뉴욕 피자 앞에서는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진다. 맥주 한 병 옆에 두고 소파에 파묻혀 킬링타임 무비를 보며 와그작와그작 해치우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나는 NYC 치즈 피자와 페퍼로니 피자를 각각 한 조각씩 주문했다.
스트리트 컬처 소품들로 가득한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매장에서 대기하다 피자 박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걸어서 10분이면 광화문광장에 도착한다. 세종로공원과 문화쉼터라는 이름으로 광장 곳곳에 벤치가 마련돼 있으니 날씨 좋을 때 앉아서 여유를 누려보자. 자리를 잡고 테이크아웃 푸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혼자 피맥을 즐겨도 전혀 민망하지 않다.
치즈피자를 한 조각 크게 베어 먹자 극강의 짭짤한 맛이 빈틈없이 입을 채운다. 보기에는 별것도 없어 보이는 녀석이 뭐가 이렇게 맛있는지. 뒤이어 페퍼로니 피자가 짭짤함을 1.5배로 끌어 올려 주니 맥주를 안 마실 수가 없다. 뉴욕식 피자인 만큼 브루클린 라거를 곁들이고 싶었으나 근처 수입맥주 판매점에 재고가 없어 대신 자메이카 라거 레드 스트라이프를 사 왔다. 치즈와 페퍼로니의 짠맛을 개운하게 씻어주는 청량함이여. 비록 구름 낀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마음만큼은 뉴욕 남부의 코니아일랜드 해변에 있었다.
- NYC 치즈 피자 4,800원
- 페퍼로니 피자 5,400원
- 레드 스트라이프 6,800원(매장 인근 수입맥주, 와인 판매점 ‘포레’에서 구매했다.)
피저스 크러스트
-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10길 9 피저스 크러스트
- 영업시간 월-토 11:30-21:00 (일 휴무)
- @pizzuscrust_seoul
[2]
버거와 맥주
버거스낵
수제버거의 세계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몰랐다. 햄버거가 맥주와 훌륭한 궁합을 자랑하는 음식이라는 걸.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푸드점 버거는 콜라와 함께 먹는 게 짱이다. 일단 매장에서 맥주를 안 팔아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뭐랄까 빅맥이나 불고기버거를 맥주와 먹는 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느낌? 하지만 비싼 만큼 퀄리티도 높은 수제버거에 크래프트 비어를 먹은 다음 알게 됐다. 좋은 고기와 치즈가 만들어 내는 눅진한 풍미가 사정없이 밀려 들어올 때, 그 느끼함의 파도 앞에서 나는 애타게 맥주를 찾게 되는구나. 오직 강력한 버거만이 맥주를 부른다. 육향 치즈향 가득한 수제버거의 풍미에 비하면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들은 어딘가 심심했던 것이다.
[출처 : 유튜브 ‘성시경 SUNG SI KYUNG’]
더 더 맛있는 버맥을 즐기고 싶은 나는 이태원 경리단길의 버거스낵을 찾았다. 가수라 쓰고 먹방 유튜버라 읽는 성시경의 ‘먹을텐데’에 나오고 유명해졌다는 버거집이다. 나도 그 영상을 통해 알게 됐고, 바로 지도 앱에 저장하며 다짐했다. 필히 더블치즈버거를 포장해서 맥주와 함께 먹으리.
두꺼운 패티 두 장과 치즈 두 장, 그리고 캐러멜라이징한 양파. 심플한 구성이다. 오로지 고기・치즈・양파가 빚어내는 헤비한 맛으로 승부한다. 촉촉함을 넘어서 쫀쫀한 식감을 구현한 패티와 치즈의 조합에 달짝지근한 양파까지 더해져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그야말로 ‘꽉 차는’ 맛을 선사한다. 성시경은 이를 동맥경화 스타일이라고 표현하더라. 다 먹고 나면 혈관 건강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먹는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그 행복이 결코 소소하지 않다는 게 중요하지. 일전에 에디터B가 소개한 적 있는 홍대 더리얼치즈버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버거스낵 역시 높은 확률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다양한 맥주를 판매하는 ‘우리슈퍼’에서 빅웨이브 골든 에일을 사려 했지만 문을 안 열어서 실패. 하는 수 없이 바로 옆 편의점에 들어가 코로나 엑스트라를 골랐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맥주인 코로나는 여름에 참 잘 어울리는 가벼운 스타일이다. 쓴맛이 적고, 그렇다고 과하게 과일 향만 도드라지지도 않는 적절한 포지션의 맥주. 라임이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느끼한 버거의 풍미를 보완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원래는 매장 인근의 창의어린이공원에서 먹을 계획이었으나 막상 가보니 음주가 불가한 공원이었다(어린이공원이니 당연한 규제일지도…). 다행히 매장에 취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작게 마련돼 있어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술 없이 버거만 드실 분들은 선선한 저녁에 창의어린이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아 봐도 좋겠다.
- 더블치즈버거 1만 2,000원
- 코로나 엑스트라 3,100원(매장 인근 편의점에서 구매했다.)
버거스낵
• 주소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46길 13
• 영업시간 월, 화, 목, 일 11:00-22:00 수 18:00-22:00
[3]
핫도그와 맥주
퀸즈도그
학교 매점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아니면 명랑핫도그 같은 프랜차이즈로 대표되는 K-핫도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먹는 핫도그는 또 다른 세계다. 사실 둘은 이름만 같지 완전히 다른 음식. 막대에 끼운 소시지에 반죽을 입힌 한국의 핫도그 스타일을 미국에서는 콘도그(corn dog)라고 부른다. 핫도그는 우리가 미국영화에서 숱하게 본, 후랑크나 비엔나라고 부르는 기다란 소시지를 구워 빵 사이에 끼워 먹는 음식이다. 핫도그든 콘도그든 나는 둘 다 없어서 못 먹는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치맥・피맥・버맥 다음으로는 핫맥이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소시지와 맥주가 잘 어울리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핫도그와 맥주의 절묘한 궁합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일 테다.
그 절묘한 궁합이 궁금한 분들은 머나먼 미국 대신 신촌으로 가시면 된다. ‘꿈과 희망의 핫도그월드’이자 ‘아메리칸 힙도그샵’을 지향하는 퀸즈도그로.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영문 간판에 유리 위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사진과 손글씨까지, 외관에서부터 미국맛을 폴폴 풍긴다.
내부 벽면을 장식한 각종 포스터와 소품들도 재밌지만 특히 TV로 틀어 놓은 핫도그 빨리 먹기 대회 영상이 압권. 대체 왜 저렇게까지 죽기 살기로 핫도그를 흡입하나 싶지만, 덕분에 미국인들이 이 핫도그라는 음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대강 느껴볼 수 있다.
‘핫도그월드’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핫도그다. 두툼한 후랑크 소시지에 양파와 다진 피클을 넣고 케첩과 머스타드를 뿌린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터지는 육즙과 쫄깃한 식감. 거기에 아삭한 양파와 다진 피클이 맛의 경쾌함을 더해준다. 맥주와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 구성이다. 매장에서 유일하게 파는 미국 라거 버드와이저와 함께 먹으면 막힘없이 꿀꺽꿀꺽 넘어간다(나에게 버드와이저와 칭따오는 어떤 안주에 곁들여도 무난하게 먹기 좋은 가장 만만한 해외맥주다).
기본도 좋지만 좀 더 자극적인 핫도그를 원한다면 칠리덕과 치즈덕을 주문해 보자. 칠리덕은 고기와 양파, 여러 야채와 양념을 넣어 만든 수제 칠리소스에 소시지・적양파・치즈・할라피뇨를 추가해 한층 더 헤비한 풍미를 즐길 수 있고, 소시지와 치즈에 그릴드 어니언과 베이컨을 넣은 치즈덕은 느끼한 걸 찾는 이들에게 제격인 메뉴다. 참고로 매장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탁 트인 경치가 아름다운 창천근린공원이 있다. 신촌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공원에서 즐기는 핫도그는 또 얼마나 맛있겠어. 아쉽지만 이 공원 역시 음주는 불가하니 탄산음료라도 사서 올라가자.
- 핫도그월드 3,900원
- 칠리덕 6,900원
- 버드와이저 5,000원
퀸즈도그
-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4길 61 1층 101호
- 영업시간 화-일 12:00-21:00 (월 휴무)
- @queens_dog.af
[4]
오븐 포테이토와 맥주
하이포테이토
이 기사를 구상하며 ‘포맥’이란 단어를 처음 써봤다. 주변에서도 ‘포맥하러 갈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감맥 역시 치맥이나 피맥처럼 많이 쓰는 표현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감자를 맥주랑 먹는 건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일단 감자튀김만 해도 그렇지. 대단한 감튀장인까지 찾아갈 것도 없이 국내 스몰비어의 원조 봉구비어의 시그니처 안주가 감자튀김인 걸 보면 이 마성의 조합을 납득할 수 있다. 포카칩이나 프링글스를 비롯한 감자칩에 맥주를 곁들이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이맘때면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을 수놓은 감자칩과 캔맥주를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감자튀김과 감자칩, 이거 말고도 맥주랑 잘 어울리는 감자 음식은 또 뭐가 있을까?
마포구 신수동에 자리한 하이 포테이토에 가면 오븐 포테이토를 먹을 수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스테디셀러 알감자 버터구이와는 아예 다른 요리다. 오븐에 구운 감자를 치즈랑 으깨서 홈메이드 토핑과 소스를 올리는데, 앞에서 소개한 세 음식에 비해 훨씬 건강한 느낌이 든다(어차피 맥주랑 같이 먹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다). 오이와 그릭허브요거트가 들어간 ‘시그니처’부터 과카몰리가 들어간 ‘아보카도’, 베이컨과 어니언 사워크림을 넣은 ‘베이컨’ 등 취향에 맞는 메뉴를 골라 보자. 나는 사장님께 맥주와 함께 먹을 거라며 추천을 부탁했더니 ‘비프스테이크’를 드셔보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거 참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스매시드 포테이토를 비롯한 기본 재료에 큼직한 비프스테이크와 버섯・적양배추올리브・할라피뇨・고르곤졸라 소스가 들어간다. 이것저것 많이도 투입했는데 다 따로 놀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게 인상적이다. 육즙 터지는 스테이크를 치즈와 버무린 감자에 듬뿍 찍어 버섯과 콘을 올려 먹고, 곧바로 할라피뇨를 집어넣는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쥬시한 식감 이후에 찾아오는 매콤한 맛.
그리고 나서 시원한 구스 아일랜드 312 얼반 위트 에일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켜면 하루의 피로까지 가시는 기분이 든다. 이 맥주는 처음 먹어봤는데 캔에 적힌 ‘Bright, Lemony’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역시나 상쾌하게 맴도는 과일 향이 가볍고 산뜻한 맛을 즐기는 요즘의 내 입맛에 잘 맞았다. 참고로 하이포테이토 매장 앞에는 아름다운 경의선숲길이 펼쳐져 있다. 열대야만 아니라면 공원 한복판에 벤치를 잡고 앉아 낭만 가득한 여름밤 노상 포맥을 즐겨보기를 추천한다.
- 비프스테이크 3,900원
- 구스아일랜드 312 얼반 위트 에일 4,600원(매장 인근 편의점에서 구매했다.)
하이포테이토
- 주소 서울 마포구 광성로6길 22
-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 @hipotato_si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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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라이프스타일 잡지부터 토크 프로그램까지, 분야 안 가리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 멋있는 사람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