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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하게 사기로 했다

아직 날은 좀 춥지만, 알 수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걸. 다른 계절로의 전환을 가장 기민하게 포착하는 건 내 쇼핑 세포다. 온몸의...
아직 날은 좀 춥지만, 알 수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걸. 다른 계절로의…

2017. 02. 22

아직 날은 좀 춥지만, 알 수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걸. 다른 계절로의 전환을 가장 기민하게 포착하는 건 내 쇼핑 세포다. 온몸의 세포가 외친다. 옷을 살때야. 그래 사야한다, 목련처럼 청초한 봄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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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감 좋고 탄탄한 기본 티가 필요해.”

나이가 들어서일까. 디테일이 폭발한 것 같은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매일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는 기본템으로 취향이 기운다. 똑 떨어지는 라인의 셔츠. 입었을 때 살에 닿는 느낌이 훌륭하고 직물이 견고해서 많이 빨아도 쉽게 모양이 변형되지 않는 티셔츠 같은 건 아무리 많아도 자꾸만 사고 싶다.

batch_3b784f4a_1c44[내 옷장인 줄. 아니 내꺼였으면.]

‘합리적인 가격에 질 좋은 기본템을 찾았다.’ 아, 완벽하다. 너무 완벽해서 불가능한 유니콘 같아 보일 정도로. 가격이 싸면 질이 쓰레기고, 질이 좋다 싶으면 가격이 무섭다. 내가 그렇게 큰걸 원하는 건가? 내 이십 년 쇼핑경력으로 속단하자면 마음에 쏙 드는 기본템을 찾는 건 운명의 짝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더라. 그러니까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찾으면 그 옷에 구멍이 날 때까지 입고, 혹시 단종될까 깔별로 몇 개씩이나 쟁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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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와 같은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신카를 들고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거라 믿는다. 그래서 에버레인(everlane)을 소개한다. 이곳은 아무 때고 툭 걸쳐입기 좋은 기본템을 파는 곳이다. 번잡스러운 요소는 깔끔하게 배제하고, 실용적인 기본 라인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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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요즘 입으면 무심한 척 센스 있어 보일 수 있는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있다(난 이런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좋더라). 깔끔한 디자인의 이 쫀쫀하고 질 좋아 보이는 티셔츠의 가격은 45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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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 에버레인은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파는 곳이지만, 파는 방식은 꼭 농수산물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이 스트라이프 티셔츠는 베트남에서 만들어졌다. 상세 설명란에는 옷의 소재와 사이즈 뿐만 아니라 옷이 만들어지는 공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링크가 보인다. 궁금하다면 여기를. 연결된 링크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공장직원들의 일상도 확인할 수 있다. 옷이 만들어지는 공장의 위치는 물론 일하는 직원 수와 근속 기간, 근무 환경 등 복지 정보까지 모두 공개한다. 그러니까 가끔 농산물에 확인할 있는 생산자 표시처럼 말이다. ‘이 고추는 이혜민님이 생산했습니다.’ 이런 느낌이랄까.

좀 더 스크롤을 내려보자. 에버레인의 모든 제품엔 그 아이템의 원가(true cost)가 명시되어 있다. 투명한 가격 정책으로 거품을 없애고, 인터넷 판매를 통해 유통 마진을 최소화한다는 정책이다. 이 역시 농산물 직거래 방식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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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의 원가는 18달러, 소비자가격은 45달러다. 다른 곳에서는 90달러 정도에 판매될 거라는 도발적인 문구도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45달러를 아끼게 되는건가? 이런 계산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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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는 원가 외에도 훨씬 더 복잡한 계산이 들어간다. 원가가 1만 원인 제품을 50만 원에 판다고 그것을 사기라고 매도할 순 없다. 누군가는 입고 싶어서, 브랜드의 이미지를 기꺼이 소비하기 위해서 혹은 자기만족 등 우리가 돈을 쓰는 이유에도 제품의 가격을 책정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계산이 들어가니까. 그 돈을 지불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사고, 아니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선택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m-desktopimg[가방도 판다. 미친 미니멀리즘]

하지만 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옷이 만들어지는 뒷단의 이야기까지 모두 챙기는 그런 세심함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사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벌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2010년에 시작한 에버레인은 벌써 기업가치가 2억 5,000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우리나라에는 배송을 하지 않는다는 것. 원한다면 구매대행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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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SPA 브랜드의 옷만 산 적이 있다. 한철 입고 버리는 패스트패션도 좋지만, 지금은 조금 더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고 싶다. 진짜 좋은 것의 가치는 약간의 숙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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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레인 The Cotton Crew
Point – 거두절미하고 추천하는 아이템, 일단 가볍게 티셔츠로 시작!
Price  16달러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