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알루미늄 키보드의 미덕은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다. 스마트폰이 무거우면 감점이지만, 키보드가 무거운 건 오히려 좋다. 앱코 AR61D는 풀알루미늄 키보드의 장점을 고스란히 지키면서, 노란색 옷을 입어 귀여움이 넘치는 키보드. 오늘은 앱코 AR61D 리뷰를 해보려고 한다. 제품은 앱코를 통해 대여했다.
무거운 게 왜 미덕이냐고? 풀알루미늄 키보드를 잠깐이라도 써본 사람은 안다. 그 안정감이란 플라스틱 하우징 키보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타이핑을 아무리 강하게 해도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플라스틱 하우징 키보드도 타이핑에 불편할 정도의 흔들림은 없다. 단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디테일이 다를 뿐이다. AR61D의 키를 눌러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 손끝으로 견고함이 전해진달까. 마치 대리석 바닥에 타이핑을 하는 것처럼 굳건하다. 가볍고 폭신폭신한 타건감을 좋아한다면 단점이겠지만 플라스틱 하우징이 주지 못하는 독특한 매력이 풀알루미늄 키보드에 있다.
통 알루미늄을 깎아서 만든 키보드이기 때문에 딱 봐도 퀄리티가 좋아 보인다. 상판과 하판을 따로 만들어서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무게는 약 1.7kg. 게이밍 노트북 정도의 무게 정도이지만 생김새가 귀여워서 실제로 들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잃어버린 프루스트를 찾아서>처럼 두꺼운 책을 두고 ‘호신용’이라는 농담을 하곤 하는데,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 호신용 무기로 사용 가능해 보인다.
이제 디자인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실 AR61D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디자인이다. 메인 컬러는 옐로우, 키캡 컬러는 옐로우, 레드, 아이보리 세 가지를 섞었다. 계란프라이가 연상되는 컬러 조합이다. 아니나 다를까 앱코에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에서 영감을 받은 컬러”라고 설명하더라. 노란색은 계란 노른자, 하얀색은 흰자, 빨간색은 케첩을 의미한다. 유쾌하고 앙증맞은 컬러 조합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왠지 DHL을 떠올렸다.
노란색을 과감하게 쓰는 키보드는 쉽게 볼 수 있다. 어디 노란색뿐인가. 파란색, 분홍색, 초록색 등 빨주노초파남보의 컬러를 자유롭게 쓴다. 그럼에도 AR610D는 차가운 알루미늄에 색을 덧입혔기 때문에 좀 더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더 선명해 보인다. 소재와 컬러의 조합을 칭찬하고 싶다. 다만 색상 조합이 다양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다. 풀알루미늄 키보드라는 게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이다 보니 결국 매니아를 타겟으로 해야 하는데, 선택지가 노란색 하나뿐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긴 하다. 민트 컬러가 있었어도 되게 예뻤을 것 같다.
상판 윗부분을 보면 독특한 디자인이 있다. 41개의 홈이 길이가 다르게 파여 있는데, 키보드계의 전설템 돌치(Dolch) 키보드 스타일을 오마주한 거다. 하늘의 별따기 수준으로 구하기 힘든 돌치 키보드를 이렇게라도 보니 기분은 좋다.
그다음은 가장 중요한 타건감이다. 카일박스 옐로우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옐로우축은 AR61D를 위해 새롭게 커스텀했다고 한다. 카일박스 옐로우축을 사용해 본 적은 없어서 비교는 어렵지만 최대한 설명을 해보자면, 체리 적축과 체리 흑축 사이에서 적축에 살짝 더 가까운 타건감이다. 키압은 45g, 리듬감 있게 가볍게 타이핑할 수 있고 살짝 반발력이 있어서 마냥 심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스페이스바의 스테빌라이저는 좋지 않았다. 소리가 클리어하지 않고 살짝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세 페이지를 보면 AR61D에 대해 ‘조용한 기계식 스위치’라고 소개한다. 이 말을 고지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리니어 계열이기 때문에 기계식 스위치 중에는 조용한 편에 속한다(청축보다야 당연히 더 조용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음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무접점 키보드의 타건음이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라면 영화관에서 커플이 주고받는 귓속말 같달까. 소리 자체가 크진 않은데, 사람에 따라서는 거슬릴 수 있고, 사무실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리얼포스 무접점을 쓰다가 잠깐 키보드를 교체해서 1분 정도 타건했는데, 옆자리 에디터H가 바로 알아차렸다. “석준아, 혹시 키보드 바꿨니?”
조곤조곤 말 잘하는 친구처럼 정갈한 느낌도 있다. 나는 이 소리가 마음에 든다. 통울림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밖으로 퍼지지 않고 안에서 온전히 흡수하는 느낌. 스피드 타건을 했을 때 특히 느낌이 좋았고, 듣기에도 편안했다. 무접점 키보드를 오랫동안 쓰다가 오랜만에 리니어 계열을 써보는데 ‘역시 리니어는 이런 맛이지’ 싶다.
내가 아직 가격을 말하지 않았던가? AR61D의 가격은 21만 5,000원. 이것보다 더 저렴한 알루미늄 키보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20만 원이 넘어가는 키보드는 부담스러운 가격인 건 맞다. 그래도 가격대가 높은 만큼 기계식 키보드에 기대할 수 있는 기능은 웬만하면 다 들어가 있다. 핫스왑 키보드이기 때문에 스위치 교체도 쉽고, 최대 3대의 블루투스 연결을 지원하고, 리시버가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다. 윈도우와 Mac OS 두 가지 운영체제에서도 안정적으로 연결된다.
지금부터는 단점을 말해야겠다. 지금 말하는 단점은 결국 내가 이 키보드를 선택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다. AR61D의 레이아웃은 61키. 넘버패드, 방향키, 펑션키가 모두 있는 풀배열 대비 60% 키를 줄인 미니 배열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풀알루미늄 키보드이기 때문에 휴대성은 좋지 않은데, 60키로 줄였고, 방향키 넘버패드가 없기 때문에 사용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풀알루미늄 키보드를 만들거면 방향키 정도는 넣어줬어야 하지 않나 싶다.
예전에 해피해킹을 잠깐 써보면서 알았다. 나는 해피해킹을 영원히 해피해킹에 적응하지 못할 사람이구나. 키감 하나는 쫀득쫀득 만족스럽지만 방향키가 없어서 의외로 방향키를 많이 쓰는 글 쓰는 직군에는 추천하기 어려웠다. AR61D 역시 마찬가지다. 방향키를 조작하는 방법은 Fn키를 누른 채 방향키를 겸하는 키를 누르면 된다. ALT가 왼쪽, 문서키 아래쪽, CTRL이 오른쪽쪽, 물음표키가 위쪽이다.
키 두 개만 누르면 방향키를 쓸 수 있으니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은데, SHIFT까지 눌러 범위 지정을 할 때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세 가지 키를 동시에 눌러야 한다. 아무리 타건감이 마음에 들고 귀여워도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싶어진다. 물론 내가 끝내 적응하지 못한 해피해킹은 수많은 매니아를 보유한 독보적인 브랜드다. 내가 이렇게 ‘별로’라고 말해도 결국 나의 취향일 뿐이다. AR60D 역시 마찬가지다. 방향키 조작 방식이 불편하지 않다면, 노란색을 좋아한다면, 풀알루미늄 키보드를 갖고 싶다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타건감, 디자인 같은 요소는 단점일 수가 없다. 바닐라라떼가 달고, 김치찌개가 맵다는 게 단점이 아니듯이. 병아리처럼 샛노란 풀알루미늄 키보드 하나 입양하고 싶다면, 타건샵에서 타이핑을 한 번 해보는 걸 추천한다. 취침 전에 아른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디자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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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