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컬렉터] 라디오 장인, 산진 45주년 기념판

레트로 마니아 기즈모의 한정판 리뷰 시리즈
레트로 마니아 기즈모의 한정판 리뷰 시리즈

2023. 02. 21

안녕. 나는 한정판, 특별판, 그리고 콜라보레이션 전자 제품 리뷰를 빌미로 옛날 제품 이야기를 하는 ‘컬렉터’ 코너의 객원 필자 기즈모다.

1400_retouched_-1

나는 오디오, 스피커 리뷰를 많이 하기 때문에 각종 오디오 기기가 정말 많다. 내 삶의 지향점은 미니멀리즘이지만 내 방은 각종 오디오로 인해 에디터B의 집만큼이나 흉흉하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모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정말 미니멀리즘을 실현할 기회가 생기고 단 하나의 오디오 기기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오디오를 선택할까?

아마 나는 최후의 오디오로 라디오를 선택할 것이다. 일단 라디오는 무료다. 비싼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바이닐이나 CD를 살 필요도 없다. 소스가 필요 없다는 것도 미니멀리즘에 도움이 된다. 음악을 고를 필요도 없다. 음악을 고른다는 것은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가. 넷플릭스를 켜고 볼 영상을 고르지 못해 한 시간째 썸네일만 노려보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라디오는 마치 룸서비스처럼 알아서 음악을 선곡하고 알아서 틀어준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음악 대신에 들었던 음악만 계속 듣게 되는데 라디오를 틀어 두면 내가 평소 듣지 않던 음악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브랜드의 라디오를 골라야 할까? 아마 나는 ‘산진’을 고를 것이다. 오늘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산진 라디오 WR-16SE 45주년 기념판’ 리뷰다. 참고로 현재 국내 정식 수입되고 있지 않으며 해외 사이트를 통해 20만 원 이하에 구입 가능하다. 한정판은 아니고 기념판만의 특별한 색상 조합과 각인이 새겨진 제품으로 일반 WR-16과는 색상과 재질이 살짝 다르다.

1400_retouched_-3

디자인부터 보자. 전면은 샴페인 골드 색상의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왼쪽은 스피커, 오른쪽에는 현재 주파수를 표시하는 창이 있다. 아래에 있는 커다란 주파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 현재 주파수 대역에 맞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다.

볼륨 다이얼, 선택 다이얼까지 모두 아날로그식이다. 알루미늄 패널과 진득한 나무 하우징이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주파수 표시창에 불이 들어왔다면 더 완벽했을텐데 이 부분은 좀 아쉽다. 일반판에 비해서 좀 더 레트로하고 색상이 진득한 특징이 있다.

1400_retouched_-2

상판에는 산진의 45년 기념을 알리는 각인이 새겨져 있다. 산진은 대만의 ‘양찬성’에 의해 1974년 설립된 이후로 줄곧 라디오를 만들어 온 회사다. 이 회사의 특징은 라디오 기능이 반드시 탑재돼 있다. 일반적인 음향 회사라면 스피커, 앰프, 헤드폰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하는데 산진은 줄곧 라디오 위주의 제품만 만들어 왔다. 오늘 리뷰 제품처럼 블루투스 기능이 탑재된 제품도 있지만 주요 기능은 라디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FM라디오 겸 블루투스 스피커에 가깝다. 세상에 많은 브랜드가 있지만 1,000명 이상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견 기업 중에 라디오만 만드는 브랜드는 산진 외에는 없다.

1400_retouched_-6

WR-16SE의 기능은 FM 라디오, AM 라디오, 블루투스, 그리고 AUX 연결도 지원한다. 장점은 라디오의 높은 수신율이다. 1974년부터 라디오만 만들며 여러가지 표준을 만들어 온 회사답게 수신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한국의 아파트처럼 전파 교란이 일어나기 쉬운 공동 주거공간에서도 다른 라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주파수를 잡아 낸다.

산진의 고향인 대만은 산악 지형이 많고 아파트와 공동 건물이 많아 라디오에게는 최악의 환경이다. 이런 터프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산진 라디오는 다양한 기술을 개발했고 그래서 산진 라디오의 수신율은 최상 수준이다. 물론 아날로그 특성상 약간의 잡음은 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이닐의 매력도 잡음이듯 라디오의 매력도 약간의 잡음이 아닐까.

1400_retouched_-4

다만 이 제품은 국내 정식 수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외판을 구입하면 약간의 수고로움이 있다. 우선 해외판은 110V의 전압만 지원하기 때문에 별도의 DC용 어댑터를 구입해야 한다. DC 12V 1A이상의 어댑터를 구입하면 된다. 또 기본 안테나가 포함돼 있지만 텔레스코프 안테나는 들어 있지 않으므로 필요에 따라 텔레스코프 안테나도 구입하면 더 깨끗하게 전파를 잡을 수 있다.

기타 기능으로는 뒤쪽에 헤드폰 아웃이 있어 헤드폰으로 청취도 가능하고 AUX IN을 통해 포노앰프 내장형 턴테이블이나 CD플레이어 등을 연결해 청취도 가능하다. 물론 블루투스 기능도 제공하므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과 페어링해 스트리밍 음악을 즐길 수도 있다. 아쉽지만 배터리는 내장돼 있지 않다.

1400_retouched_-5

음질을 알아보자. 스피커 유닛은 모노 형태이고 풀레인지 유닛이다. 즉 하나의 유닛으로 모든 대역의 소리를 낸다. 따라서 음이 풍부하고 해상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적당하게 고역을 잘라 버리고, 낮은 저역대도 포기한다. 대신 두툼한 중저역대를 강조해 사람의 목소리를 잘 강조해 준다. 라디오들은 대부분 이런 튜닝을 하는데 산진의 음질은 특히나 듣기 좋다. 옛날 진공관 라디오처럼 풍성하면서도 통울림이 느껴지는 소리다. 오래 들어도 귀에 피로하지 않고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다만 빠른 음악이나 록음악 등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안 들리는 대역대가 많기 때문이다.

1400_retouched_-8

아날로그 라디오의 매력은 직접 다이얼을 돌려 제대로 주파수가 맞춰질 때 갑자기 음악이 나오는 순간이다. 지직거리는 소음만 내던 제품에서 갑자기 말소리와 음악이 나오면 그것처럼 신기하고 반가울 때가 또 없다. 이 모델은 블루투스도 제공하지만 아무래도 FM라디오를 주로 듣게 된다. FM라디오만 틀면 공짜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큐레이션도 직접 해주며 중간중간 해설까지 해주기 때문에 나 같은 게으름쟁이에게는 딱이다.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짜거나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기웃거리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 얼마나 편한가. 언젠가는 라디오에서 공짜로 틀어주는 노래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교활하게 매달 돈을 가져가는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모두 해지할 생각이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1400_retouched_-7

라디오는 최근 들어 더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미국에는 1만 5,000개가 넘는 상업 라디오 방송국이 있으며 이는 라디오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의 두 배 이상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도 라디오의 매력은 여전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DJ들은 청취자와 소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혜성이 떨어지거나 좀비가 출몰하는 비상사태에도 라디오는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 라디오 하나쯤은 꼭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라디오 구입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45년 넘게 라디오만을 만들어 온 산진 라디오를 기억하기 바란다. 지금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가격대비 최고의 음질과 최상의 수신율을 가진 라디오 브랜드니까 말이다.

About Author
기즈모

유튜브 '기즈모' 운영자. 오디오 애호가이자 테크 리뷰어. 15년간 리뷰를 하다보니 리뷰를 싫어하는 성격이 됐다. 빛, 물을 싫어하고 12시 이후에 음식을 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