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최근 향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시향도 쉽지 않고, 마스크를 넘어 타인에게 내 향을 전하기도 더 어려워졌는데 말이지. 사실 나는 ‘향이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인데, 요즘 같은 상황을 보면 그 믿음이 더더욱 확고해진다.
그래서 많은 향수 브랜드들도 신제품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향수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이솝이 아닐까. 테싯, 휠 등의 향수들이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데다, ‘아더토피아 컬렉션’으로 무려 3가지 향수를 동시에 새로이 선보였으니…. 이솝의 향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지갑부터 열고 매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물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라, 출시된 첫 주말에 이솝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시향을 제대로 할 수 없더라…. 각각의 제품을 몸에 착향하고 집에 돌아온 후, 이솝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멋진 스토리와 시적인 표현들은 나의 심금을 울렸지만, 과연 사람들이 이걸 보고 향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래서 큰 결심을 했지. 다 사버린 거다! 여러분에게 나의 언어로 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대 다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에 별표 다섯 개) 이솝은 고유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브랜드다. 이번 아더토피아 컬렉션의 향기들을 차례로 만나보니 알 수 있었다.
# 미라세티
이솝에서 제시하는 아더토피아 컬렉션의 세계관(?)에서는, 마치 하나의 연극처럼 각각의 향수가 하나의 막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미라세티. ‘전설적인 선원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유향의 송가’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이 향수는 아더토피아 컬렉션 중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짙은 유향의 존재감이 돋보이고, 갖가지 스파이시 노트들이 펼쳐진다. 여기서 잠깐! 유향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 유향은 유향 나무에 상처를 내서 나온 진액으로 만든 향료다. 나무에서 나왔기 때문에 당연히 나무 내음이 느껴지지만, 진액의 끈적함과 달콤함이 그것을 감싸고 있는 향이랄까.
사실 유향은 한약에서 약재로도 많이 쓰이는 재료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미세라티의 향을 맡으니 왠지 한약방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 나쁜 뜻은 아니다. 한의원에 들어서면, 온갖 약재가 뒤섞인 부드러운 향이 숨 쉴 때마다 은은하게 스며들지 않는가. 그 향을 맡기만 해도 이미 다 나은 기분이 들곤 하는데, 미세라티의 향에도 그런 묘한 안정감과 평온함이 있다.
미들 노트에서도 유향의 느낌을 이어가는 라다넘, 암브레트, 스타이어랙스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다넘은 꽃인데 독특하게도 나무 진액과 비슷한 향을 가지고 있다. 암브레트는 스윗한 뉘앙스의 머스크를 특징으로 하는 씨앗에서 나온 향료다.
스타이어랙스 또한 발사믹 노트의 우디 향이라, 앞선 향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발사믹 향이라니, 혹시 발사믹 식초 같은 시큼 쿰쿰한 냄새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발사믹 노트는 유향처럼 나무 진액, 수지 등의 달달하고 끈적한 향을 뜻한다. 우리가 아는 가장 쉽고 친근한 발사믹 향료는 바로 바닐라! 그러니 나무 진액이나 수지는 거기서 달콤함을 좀 빼고 나무 냄새를 더한… 그런 향을 상상해보면 되겠지?
그리고 베이스 노트로 넘어갈 때쯤, 뭔가 스파이시한 위스키 향이 느껴진다. 이솝에서는 미라세티 향을 이야기할 때 ‘거친 바다’, ‘휘몰아치는 파도’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던데… 바다까진 아니라도 확실히 무거운 물의 느낌이 더해지는 것이 나에게는 위스키를 연상시켰다.
끝까지 파워풀한 느낌을 놓지 않고 끌고 나가는 잔향 또한 미라세티의 매력. 어쩐지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찾게 될 것만 같은 향이다. 한약방에서 위스키로 이어지는 향의 흐름이라니, 몸과 마음이 모두 완치될 것만 같잖아!?
# 카르스트
그렇다면 제2막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카르스트다. ‘해안의 들숨과 날숨을 증류해 담았’다는 표현에, 내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한 향이기도 하다. 아로마틱 노트, 우디 노트를 중심으로 향을 전개하던 이솝에서 처음으로 물과 바다를 내세워 향을 만들다니! 궁금증과 기대감이 폭발했다.
카르스트는 탑노트부터 알싸한 느낌의 허브 향들이 코끝을 덮친다. 상쾌하면서도 복잡다단한 향이다. 주니퍼의 강렬한 신선함과 페퍼리한 스파이시 노트도 느껴진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물의 뉘앙스가 깔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에메랄드나 사파이어 빛의 바다가 아니라, 거친 파도가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가 연상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포인트가 느껴진다. 중심에 자리 잡는 아주 이국적인 향취 덕분이다. 주인공은 바로 큐민. 뭔가 낯익은 이름이라고? 맞다. 양꼬치 소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씨앗(?)이다. 중국어로는 ‘쯔란’이라고 하지.
큐민은 향수에서 향료로 종종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감이 강한 향수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네가 여기서 왜 나와…?’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점점 큐민이 만들어내는 묘한 이미지를 느꼈다. 거친 바다 바람을 맞고 있을 때 온몸을 덮치는 듯한 짠내음이 그려진달까.
그리고 뒤로 가면서 큐민의 존재감을 빼앗으며 도드라지는 또 다른 향이 발견된다. 달큰하면서도 맵싸한 ‘진저’다. 향료로 쓰이는 진저 노트는 먹는 생강의 향과는 약간 다르다. 스파클링한 이미지, 혹은 거품의 질감을 표현하는 용도로 종종 쓰이거든. 그래서인지 앞선 허브 향들과 진저가 섞이며 바다의 포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카르스트는 아더토피아 컬렉션의 세 향수 중 향의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하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바다를 닮았다. 잔향 또한 드라이한 우디 향이 났다가, 톤 다운된 베티버 향이 났다가, 메탈릭한 물내음이 났다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재미가 있다. 안정감 있게 향을 누리고 싶은 사람과는 맞지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조향사인 나에게는 이 또한 큰 즐거움이기에, 최근 가장 애용하는 향수가 되었다.
# 에레미아
이제, 아더토피아 컬렉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에레미아의 몫이다. ‘자연의 지적인 힘’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 향수는 아더토피아 컬렉션의 향수 중 가장 부드러운 편이다.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도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몽환적이라고 느껴졌는데… 이유는 지금부터 차차 이야기해보겠다.
에레미아의 첫 향은 시트러스와 허브로 시작한다. 상큼발랄하다기보다는 자연적인 그린 시트러스 느낌이 더 강한 편. 허브 또한 스파이시한 게 아니라 싱그럽고 쌉쌀한 향에 가깝다. 재미있는 건, 탑노트가 조금씩 걷히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느낌이 향에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가만히 맡아보면 비누 냄새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무게감과 기름기(?)가 느껴지는 그런 향이랄까. 전문적인 표현으로는 이런 향을 ‘왁시하다’고 말하는데, 이솝에서는 이 향을 ‘밀랍’이라고 표현했더라. 그 표현이 몹시 탁월해서 놀랐다. 뒤이어 밀려오는 옅은 꽃향기와 우디 노트들이 앞선 왁시한 향에 맞닥뜨렸을 때, 정말로 밀랍에 갇힌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이스 노트에 갈수록 슬금슬금 나무와 흙냄새가 올라온다. 나무 종류로 치자면 촉촉한 샌달 우드가 아니라 드라이한 시더우드 향인데, 강렬하다기보다는 연기처럼 희뿌옇게 느껴진다. 나는 이 향을 ‘인센스 뉘앙스’라고 느꼈다. 절에서 피우는 향냄새가 아니라, 좀 더 파우더리하고 부드러운 인센스 냄새 말이다. 차츰 옅어지면서 원래 내 향기인 듯 남는 에레미아의 잔향은 누구에게나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 같다.
에레미아의 조향사는 바나베 피용인데(앞선 미라세티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 향수를 통해 ‘도시’의 느낌을 전하려 했단다. 향을 맡을수록 회색빛의 건물들과 거리, 희뿌연 연기 속에 쌓인 도시의 단면이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토록 조향사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향이라니. 대단한걸.
향으로 어떤 공간이나 장면을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 이솝의 아더토피아 컬렉션. 이솝만의 독특한 방향성은 지키면서, 과감한 시도를 거듭하는 걸 보면 호기심과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이 재미를 계속 따라가려면 내 지갑도 함께 대담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내 향수를 열심히 팔아서 돈을 모아야겠다…. 코로 벌어 코에 쓰는(?) 나의 인생이여!
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