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디에디트 객원필자 김은아다. 그림을 샀다. 이 얘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보통 이렇다.
“요새 제일 유행이라며?”(트렌드에 민감한 경우) 아니면 “그거 돈 된다며?”(경제적 자유 실현을 꿈꾸는 경우) “역시 MZ세대답구나!”(<90년대생이 온다>를 감명 깊게 읽으신 어르신들의 경우)…
아쉽게도 내 답은 이 세 집단 모두를 공평하게 실망시킨다. “그냥… 산 건데…” 이 글은 정말로, MZ세대의 새로운 취미, 아트테크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아주 개인적인 그림 구입기다.
작년에 이사를 했다. 사방의 벽이 온통 하얀 집이다. 연두색으로 번쩍거리는 ‘하이그로시’ 옵션 가구로 가득한 집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서 안다. 그 여백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그간 모은 엽서나 포스터로는 그 흰 바람벽의 쓸쓸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티스 프린팅(a.k.a 국민 자취템)을 사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이미 오늘의집과 이케아에 잠식당한 집에 뭔가 하나는 ‘진짜’를 가지고 싶었다. 상품평을 남긴 1,327명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나만 있는 것, 기계가 아니라 영혼이 만든 것. 그래서 결심했다. 작품을 사야겠다.
[그림 경매 전부터 ‘프리뷰 전시’를 통해 출품되는 작품을 미리 공개한다. 3월 스프링 세일에 출품된 이우환 작가의 ‘점’ ‘바람’ 시리즈.]
하지만 어디서 사지?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진짜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짜를 사는 법밖에는 몰랐다. 내가 아는 그림을 만나는 통로라고는 전시회밖에 없었는데, 그건 너무 좁은 선택지 같았다. 어딘가 내 영혼의 단짝 같은 그림이 있을 텐데, 전시회에 소개되는 작가는 한정적이니까.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영혼의 단짝을 만난대도 그것 또한 큰일이다. 그것은 원룸 보증금을 들고 한강뷰와 서울숲뷰를 혼자 다 가진 트리마제에 입주하겠다는 꿈을 꾸는 것과 같으니까… 이렇게 그림을 어디서 사는지에 대한 고민만 흐릿하게 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경매에 출품되는 작품의 정보와 예상가 등이 정리된 브로슈어. 표지는 이우환 화백의 ‘바람’ 시리즈. 최근 그림 경매마다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이우환 작가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준다.]
그림을 구매하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다. 먼저 전시회.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미술관처럼 큰 기관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찾아보면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많다. ‘원리스트’, ‘뮤움’, ‘아트바바’ 등의 사이트를 이용하면 다양한 전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전시회를 관람하다가 소장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갤러리에 문의하면 된다. 평소에 전시를 많이 관람해두면 자신의 취향을 만드는 데에도, 언젠가 ‘운명의 그림’을 알아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것. 화랑미술제, 아트부산 등의 아트페어는 그림을 판매하기 위한 행사이기 때문에 쇼핑하듯이 둘러보고 구매하면 된다. 한 자리에서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마지막은 내가 작품을 구매한 방법인 옥션이다.
[그림 경매가 열리는 서울옥션 강남센터]
첫 컬렉션은 인연이 닿아야 한다던데, 내 작품과의 만남도 그랬다. 어느 날 회사 일로 미팅을 잡았는데 약속 장소가 서울옥션 빌딩이었다. 마침 스프링세일(봄 정기 경매) 기간이어서 로비에는 여러 작품이 걸려있었다. 하필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무지 느렸고, 발열체크 줄은 길고… 하릴없이 로비를 서성이는데, 한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화사한 초록빛, 함께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색채, 말랑한 도형과 곡선, 알 것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심오함(?)…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찾았다 내 사랑’ 노래가 귀에 울려 퍼졌다. 너구나, 이 빌딩 예쁜이가… 가만 들여다보니 크기나 분위기도 우리 집에 딱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가격이 붙어 있었다는 거다. 횟집에서 ‘싯가’만 봐도 가슴이 떨리는데, ‘문의’라고만 적혀 있었으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다행히 평소에 생각했던 예산과도 맞아떨어졌다. 홀린 듯이 프론트로 향했다. “저… 그림 구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프리뷰 전시가 일반 전시와 다른 점은 작품 옆에 예상 가격이 써있다는 것. 예술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그림을 만나는 것 또한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작품은 김창열 화백의 ‘회귀’ 연작.]
서울옥션에서 담당자분이 나와 경매와 그림의 ‘ㄱ’도 모르는 뉴비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옥션이 열리기 전에는 출품되는 작품을 미리 볼 수 있는 ‘프리뷰 전시’가 열리는데, 로비도 그 전시장의 일부였던 것.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경매에 참여해 낙찰을 받으면 된다. 그 자리에서 참가자 등록을 했다. 전화나 온라인 중계로도 경매에 참여할 수 있지만, 경매 분위기가 궁금해 현장에 와서 참석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생각하며 설레발을 떨었다. 마음만은 벌써 컬렉터였다.
[고유 숫자가 적힌 패들. 경매 진행 중 낙찰 의사가 있을 때 번쩍 들면 된다.]
드디어 경매날. 번호표 패들을 받아 들고 옥션장으로 들어섰다. 첫인상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 벽에는 이날 출품되는 작품이 빼곡히 걸려있는데, 이우환, 박서보, 데미안 허스트, 쿠사마 야요이, 후안 미로, 줄리안 오피 등 ‘미술알못’이라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작가들의 것이다. 프리뷰 전시를 관람하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예상가 10억이 훌쩍 넘는 작품들이다. 가격을 의식해서인지 경매장에 북적이는 사람들도 뭔가 남달라 보였다. 부내가 넘치거나 전문가 포스가 풍기는 사람들… 이 중에 자가주택 아닌 곳에 사는 서민은 나밖에 없겠지… 엇, 왜 이런 생각을…
[벽에 가득 걸린 아파트…아니 훌륭한 작품들…]
이날 옥션에 나온 작품은 총 149점. 작품에 매겨진 번호대로 1번부터 경매를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초반에는 주목도가 높고, 가격도 높은 작품들이 나온다. 첫 작품은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 프로페셔널한 옥셔니스트의 진행에 따라 물 흐르듯 경매가 시작됐다. 미술품 경매는 차분하고 조용히 진행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올림픽 결승전을 보는 것처럼 다이내믹하고 스릴이 넘쳤다. 참가자들 사이의 치열한 눈치싸움과 이를 조율하는 옥셔니스트의 능수능란한 밀당 덕분이었다. 구입 희망자가 많으면 100만 원 단위로 올리던 호가를 300만 원, 500만 원 단위로 올리기도 하고, 낙찰 직전에 높은 가격을 던져서 낙찰자가 바뀌는 일도 생겼다. 쫓고 쫓기는 드라마틱한 과정 끝에 마침내 낙찰되는 순간에는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유명 작품이 나올 때는 억과 억이 거듭해서 오르기도 했는데, 아파트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 앗, 나 또 이렇게 서민적인 생각을…
[옥셔니스트의 손 끝에 집중하는 사람들.]
이렇게 치열한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예상가를 훌쩍 넘어서 낙찰되는 작품도 있었다. 박서보 화백의 또 다른 작품은 예상가 5,000만 원을 훌쩍 넘어선 6,500만 원에 낙찰되었다.
[0이 몇 개야…그림 경매의 단점이라면 작품보다 가격에 눈이 먼저 간다는 것… 작품은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찍어놓은 작품도 저러면 어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경쟁이 치열해지면? 가격이 막 올라간다면? 앞서서 나온 작품들과 다르게 예상가가 작고 귀여운 것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비싼 작품을 사러 온 큰 손이 충동구매라도 하면? 슈퍼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다가 갑자기 300원짜리 껌을 담는 것처럼, ‘어디 요것도 한 점?’하고 담아버리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면서 조바심을 내면서 응찰 금액의 상한선을 정해두었다.
세 시간 정도가 빠르게 흘러간 뒤 마침내 내 그림이 나올 차례가 들었다. 다행인 건 굵직한 작품의 경매가 끝나 현장에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응찰하시겠습니까?” 옥셔니스트의 말이 떨어지자 얼른 패들을 들었다. 그런데 전화로 누군가 ‘받고, n만 원 더’라는 의사표시를 전해왔다. 그렇게 참가자 두 명이 위협력 0의 아옹다옹 공방을 벌이며 세 번의 호가를 거쳐 마침내 낙찰자가 결정됐다. 바로 나! 낙찰 가격도 예상가 그대로여서 더욱 행복한 엔딩. 낙찰확인서에 사인을 하면 정말 구매 확정이다. “첫 컬렉션 장만 축하드려요.” 프리뷰 전시 때 안내해준 담당자분이 지켜보고 있었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와, 나 이제 그림 있다!
일주일 뒤, 그림이 도착했다. 짜잔. 내가 구입한 그림은 초현실주의의 거장인 앙드레 마송의 작품(석판화 에디션)이다. 집에 아티스트의 작품을 소장한 다음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분명히 예전에 느꼈던 쓸쓸함은 사라졌다. 조명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화사함이 생겼고, 볼 때마다 다른 부분에서 새로운 예쁨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다.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건 한 사람의 우주가 오는 것이라던데, 첫 컬렉션을 들인 내 마음이 그랬다. 그림과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우리 집에 도착했으니까. 작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 그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작품들, 연관된 이름들… 그러니까 결국 미술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이전과는 다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나의 그림을 더 알고, 잘 좋아하기 위해서 기꺼이 노력하게 되었다. 책장에 미술책이 늘어났고, 더 많은 전시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세계가 한 뼘 넓어졌다.
‘그림을 샀다’는 얘기를 하면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이거다. “그 가격 주고 살 만한 것 같아? 돈 안 아까워?” 똑같이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답한다면, 작품 덕분에 넓어진 한 뼘의 세계가 내가 지불한 가격보다는 훨씬 비싸다고 기꺼이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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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일로 여행하고, 취미로 술을 씁니다. 여행 매거진 SRT매거진 기자, 술 전문 뉴스레터 뉴술레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