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사랑스러운 디에디트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있는 객원필자 기즈모다. 이번에는 여러분들에게 제주도의 한 숙소를 소개할까 한다. 한적한 제주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 숙소인 ‘인디언 썸머’다. 바닷가에 위치하지만 바다 바로 옆은 아니다. 숙소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원이 보이는 숙소다. 일반적인 정원이 아니라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원이다. 이 곳에서 특별한 휴가를 보냈다. 그 하루의 기록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제주도 가이드북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에 내가 숨겨진 여행지로 추천했던 곳이 애월 산책로와 월정리다. 10년만에 이 두 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촌이 됐다. 내 책 때문이 아니라 소셜미디어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만 제대로 올라가도 다음주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정말 환상적이고 끝내 주는 곳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네요?”라는 코멘트 하나면 줄을 서기 시작한다. 이런 시대에 숨겨진 곳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검색을 배제하기로 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새로운 곳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버리기로 했다.
제주도 남쪽에 ‘공천포’라는 곳이 있다. 서귀포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일주도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렌터카 없이도 시외버스를 타면 쉽게 찾아올 수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별로 없다. 바다빛깔도 에메랄드빛이 아니라 그냥 물색이다. 관광객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동네다. 평일이긴 하지만 3일을 머무는 동안 관광객을 10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 한적한 마을에 ‘인디언 썸머’가 위치하고 있다. 5년 전 같은 동네에 있는 ‘창고’라는 스테이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 숙소를 발견했다. 당시에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이름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름만으로 가슴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여운이 있었다.
참고로 인디언 썸머의 숨은 뜻은 ‘잠깐의 행운’을 뜻하는 관용구다. 이 숙소에 머물면 잠시동안 행운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로 결정했다. 솔직히 이름만으로 숙소를 정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러나 어떤 카페, 식당, 숙소는 이름만으로 그 커피 맛, 음식 맛, 느낌이 예상되기도 한다. 인디언 썸머라는 이름은 비록 PC방이더라도 전자파 대신에 피톤치드가 나올 것 같은 이름이다.
나의 도박은 성공했다. 인디언 썸머에 첫 발을 디디며 탄성이 나왔다. 오후 5시의 느긋한 정원이 나를 반겼다. 인디언 썸머에 들어서면 숙소 중앙에 300평의 정원이 있는데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원이다. 육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귤나무, 올리브 나무, 금목서, 은목서, 로즈마리, 수국 등으로 가득하다. 이국적이면서 나무의 키가 높지 않아 편안하다. 그 무성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한적한 동네의 고요함과 온갖 나무가 내는 향기로 정원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무심하게 탁자와 벤치, 햇살이 툭툭 놓여져 있다.
부부가 7년간 정성스레 가꾼 정원이 지친 마음을 한없이 위로해 준다. 체크인을 하기 전에 한참을 정원을 거닐었다. 이것으로 이 여행은 다 이룬 것 같았다.
그래도 디에디트 독자들을 위해 내부 사진도 몇 장을 찍었다. 2명이 묵기 좋은 아담한 객실이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냉장고조차도 소음이 없다. 정말 조용하고 소박한 객실이다.
TV가 있다는 것과 와이파이가 된다는 것에 놀랐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하고 빛도 눈부시지 않다. 고요 그 자체다. 옆방과 붙어 있지만 옆방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옷장도 없고 옷걸이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내 배낭에 든 물건보다 적은 물건이지만 불편한 것이 없다. 다만 치약과 칫솔, 면도기, 로션은 없다.
모든 객실은 정원으로 바로 나갈 수 있게 큰 창이 있다. 저 의자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면 된다.
객실 앞으로는 향긋한 향기를 내뿜는 키 작은 금목서가 터널처럼 감싸고 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셨다. 커피가 필요하면 캔커피를 마시면 된다. 차로 10분만 가면 <테라로사 서귀포>, <카페 신효>, <그리울땐 제주>, <베케> 등등의 유명한 카페가 즐비하지만 굳이 왜 가야 하는가?
그 정원의 주인은 사실 내가 아니라 고양이들이다. 고양이 여러 마리가 마음껏 정원을 즐기고 있었다.
뭔가를 득템한 에디터H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훔쳐보는 에디터B, 그리고 달관한 무념무상 에디터M.
5분만 걸어가면 바닷가다. 저녁에는 공천포 바닷가를 거닐었다. 제주에 오면 오후에 노을을 보기 위해 서쪽으로 서둘러 차를 돌리곤 했는데. 어라? 남쪽인데 노을이 있네? 그동안 왜 바쁘게 서쪽으로 갔던 걸까? 고개만 돌리면 되는데.
제주도에 오면 한라산은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라? 한라산이 보이네?
노을이 지는 공천포 동네를 목적없이 거닐며 제주의 고요한 밤을 느긋하게 즐겼다.
이미 대낮에 술을 먹어 버려서 운전을 할 수도 없다. 동네 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걸어갈 수 있는 밥집이 다섯 군데도 되지 않으니 고르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다. 물론 여기서 10분만 차를 타고 가면 맛집이 즐비하다. ‘처가집’ ‘네거리 식당’ ‘아서원’같은 유명 식당도 있고 ‘하효소머리 국밥’ ‘만두쟁이’ ‘바굥식당’ 같이 요즘 뜨는 맛집도 즐비하다.
그런데, 어라? 이 동네에도 물회로 유명한 ‘공천포 식당’이 있네? 여기서 바다를 보며 물회를 먹으니 그렇게 편하고 시원할 수가 없다.
나도 여행책을 썼던 사람이기에 제주도의 맛집, 카페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제주 맛집들을 가보면 사실 그 맛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만큼 상향평준화 됐다는 얘기다. 제주도는 온갖 검색과 인스타그램, 소셜 미디어의 정보 속에서 최고의 한 끼와 최상의 한 잔을 마시겠다는 사람들의 절박한 동선 짜기에서 살아남은 가게들의 각축장이다. 이 곳에서 간판을 걸고 5년 이상 장사를 하고 있다면 어떤 비결이 있다는 거다. 어느 집을 택해도 기본 이상은 하거나, 제주도의 정취가 담겨있다. 관광버스가 들어가는 대형 식당만 아니라면 굳이 동선을 짜지 말고 대충 끌리는 곳에 가도 기본 이상은 한다. 밥 한끼 먹기 위해 50km를 달려가서 1시간 웨이팅을 기다려 먹는 식당을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뭐.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다음날이 밝았다. 눈부신 햇살이 얇은 커튼을 비춘다. 이렇게 환상적인 날씨에 다른 제주도의 화려한 관광지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 해도 좋다. 그래서 상상만 하기로 했다. 오늘도 아무 곳에 안 가기로 결심했다.
어라? 조식도 주네? 어라? 맛있네?
중년의 남자 혼자서 이런 감성적인 정원을 거닐고 있으니 뭔가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정작 젊은 커플들은 아침만 먹고 서둘러 관광지로 떠나 버렸다. 그 분들의 희생 덕에 나는 온전히 정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제주도 가이드북에 300개 넘는 관광지나 여행지를 썼었지만 이런 정원을 독점하며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관광지는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금년 들어 가장 게으른 오전을 보냈다. 고양이가 유일한 벗이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고양이도 지루해지고 나도 지루해졌다. 다시 동네 투어를 시작했다. 고양이는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고양이로 태어나야지.
공천포 반대쪽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다른 포구가 나왔다. 망장포구다. 이 근처도 관광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스킨스쿠버 체험 공간까지 있다. 초여름 바닷속은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울까? 어차피 안 들어갈테지만.
공천포와 인디언 썸머는 올레 5코스와도 맞닿아 있다. 올레 5코스는 바닷가의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고 저런 숲터널이 계속되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걷기 좋은 코스다. 어차피 안 걸을 테지만.
제주도 특유의 현무암 바위들이 신비롭게 솟아 있다. 굳이 다른 곳을 가지 않아도 진짜 제주를 느낄 수 있다.
만장포구도 명물이다. 제주도에 유일하게 남은 고려말 시대의 원형이 남은 포구다. 오래된 나무와 오래전에 쌓은 돌들. 신비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원시적인 포구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관광객은 역시 아무도 없다.
좀 걸었더니 지친다. 다시 공천포로 돌아가 동네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베이커리 카페 <카페지니>로 들어갔다. 시그니처 메뉴인 공천포에이드와 한라팡도르를 시켜봤다. 맛있다. 제주도를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즐길 수 있다. 월정리 카페촌의 유명한 시그니처 메뉴인 ‘월정리 에이드’나 ‘볼스카페’ ‘채점석 베이커리’에서 먹던 한라팡도르와 맛이 거의 비슷하다.
공천포도 과거에는 잠시 유명한 적이 있었다. ‘카페 숑’ ‘요네주방’ ‘공천포 물회’ ‘하례 정원’ 같은 작은 가게들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처럼 유행이 빠른 곳이 또 있을까? 이제는 줄을 서지 않아도 저 멋진 맛집들을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길에서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마스크를 쓸 일도 거의 없었다. 밥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혼자 먹을 때도 많았다. 나는 이번 여행을 ‘비대면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코로나 시대에 잘 맞는 여행이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도 오랜만에 자유를 찾은 느낌이다.
다시 밤이 깊었다. 2박 3일간의 여행이 마무리돼 간다. 여행자들은 모두 특별한 여행을 꿈꾼다. 그래서 5천만 명이 사용하는 검색엔진을 통해 검색을 하거나 15억 명이 쓰는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특별한 여행지를 찾는다. 결국은 10만 명이 다녀가는 맛집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고, 100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물론 나는 그런 여행을 비웃지는 않는다. 어렵게 돈을 모으고 시간을 쪼개 간 여행에서 평소 다른 사람의 사진에서 보던 풍경과 맛집을 모두 섭렵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합리와 효율성 측면에서 나쁜 여행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여행의 단점이 있다. 여행이 퀘스트처럼 진행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가야 할 곳을 빼먹은 것 같고, 내가 간 곳보다 남이 간 곳이 더 좋아 보이면 화가 나기도 한다. 점심을 먹으며 저녁 맛집을 검색하느라 맛을 못 즐기고. 힘들여 간 곳이 휴일이라 시간을 낭비하고. 웨이팅을 하느라 또 허무한 시간이 흐르고…. 여행을 스펙 쌓기처럼 할 필요는 없다. 남이 감탄할 만한 곳을 많이 인증하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다. 인스타에 올릴 사진은 적겠지만 인스타가 인생의 성적표나 채점표도 아니니까 안심해도 된다.
이번 여행은 <인디언 썸머>를 중심으로 공천포를 소개했다. 또 다음에도 제주도나 다른 한적한 마을을 소개할까 한다. 다음 여행을 기다려 주길 바란다.
참고로 <인디언 썸머>는 20대 이상만 이용 가능하며 1인실과 2인실이 있다. 가격은 7-8월 주말기준 조식 포함 13만 원(1인실은 9만 원). 특이하게 문자메시지로 예약을 받는다. 전화번호는 블로그에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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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모
유튜브 '기즈모' 운영자. 오디오 애호가이자 테크 리뷰어. 15년간 리뷰를 하다보니 리뷰를 싫어하는 성격이 됐다. 빛, 물을 싫어하고 12시 이후에 음식을 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