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부터 열까지 대부분의 취향이 맞지 않는 에디터H와 나에게 유일하게 겹치는 건 바로 여행에 대한 취향이다. 우리 둘 다 게으른 여행을 좋아한다. 느긋하게 일어나 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다시 호텔로 들어오는 하루. 꼭 가야 하는 것도 없이 먼지처럼 부유하는 여행.
그럼 여행은 왜 가? 그냥 집에서 쉬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 않은 천장에서 느껴지는 당혹감. “내가 어디더라? 아 맞다!” 그 짧은 순간에 느끼는 짜릿한 쾌감. 해야 할 일은 없고 대신 무엇을 해도 되는 해방감.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부지런히 참 많이도 다닌다.
하지만 여기엔 도시라는 어떤 전제조건이 붙는다. 솔직히 자연엔 크게 매력을 못 느낀다. 나는 시간이야말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가장 엄중한 잣대라고 믿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자연이 만든 우연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욕망들이 부대껴 만들어진 산물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 주인의 취향을 훔쳐볼 수 있는 멋진 편집샵, 커피 맛이 준수하고 사람들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는 카페, 특색있는 레스토랑 같은 것들.
[네, 뉴질랜드도 덥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이번엔 뜬금없이 뉴질랜드 남섬으로 떠났다. 따뜻했던 시칠리아에서 추운 서울로 멱살 잡히듯. 끌려왔더니 더 그랬다. 어깨 위를 짓누르는 코트도 거대한 패딩도 모두 넌덜머리가 났다. 나의 빼앗긴 여름을 돌려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나폴거리며 다닐 수 있는 곳을 원했다. 하지만 이게 내가 뉴질랜드를 선택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였을 거다. 단순히 따스함을 원했다면 쉽고 값싼 동남아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도시가 지겨워졌을 수도 있다. 어느 순간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욕망이 징그러웠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운전도 못 하는 주제에 왜 그렇게 내달리고 싶었는지.
결국 휴가를 딱 일주일 앞두고 뉴질랜드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뉴질랜드의 12월은 여름, 게다가 성수기 중 극성수기. 남들보다 비행기 삯도, 숙소도, 렌터카도 모두 비싸게 예약한 나는 국제적 호구.
[일주일 동안 1,000km를 훌쩍 넘게 달려준 우리의 파랭이]
핑클처럼 캠핑카를 빌려 훌훌 다니고 싶었지만, 그건 10일 이상만 빌릴 수 있대서 포기. 대신 적당한 크기의 파란 SUV를 빌렸다. 뉴질랜드 공항에서 차를 받자마자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니었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다. 시계는 9시 반을 가리키는데 저 멀리 지평선 너머의 해는 아직 들어갈 기미가 없다. 산이 들이 하늘이 쏜살같이 내 뒤로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었다. 느낌이 좋았다. 인류가 멸망하고 나와 친구가 마지막 2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성공적이었다.
[뉴질랜드는 소와 양의 천국, 사람보다 행복해 보이기냐]
가다가 지겨워지면 아무 데나 차를 세웠다. 여기서 포인트는 길가에 차가 2대 이상 서있다면 우리도 따라 차를 멈추는 거다. 어떨 때는 계곡이 어떨 때는 호수가 들판이, 산이,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디에디트를 하면서 현실보다 영상과 사진으로 남겨질 것들에 더 신경을 쓰고 살았다. 어느 순간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현실보다 영상과 사진으로 남겨질 것들에 더 신경을 쓰고 살았으니까. 가끔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나의 삶은 어떤 의미인지 자문한 적도 있다. 디에디트를 하고 촬영이 일상이 되면서 네모난 프레임 밖의 세상보다 그 안을 더 의식하고 살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도 처음엔 열심히 노력했다. 좋은 것이 보일 때마다 아이폰을 꺼냈다. 나중에 꺼내 보고 싶어서, 사람들에도 이 멋진 걸 보여주고 싶어서, 나중에 영상으로 만들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보고 있는 장관의 반도 담기지 않았다. 초조하고 속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급하게 카메라를 드는 걸 포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여행 이틀차 테카포 호수를 처음 봤을 때였던 것 같다. 결국 너무 좋아서 비합리적인 동선을 감수하고 두 번이나 갔다. 길옆으로 펼쳐진 티파니 블루 색의 호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숨이 막혔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빙하가 녹은 물이 모여든 이 호수는 너무 차서 물고기 한 마리도 살 수 없단다. 역시 정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은 안에 독을 감추고 있나 보다. 친구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호수만 바라봤다.
아무리 카메라가 좋아지고, 그걸 보여주는 디스플레이가 좋아진다고 해도 진짜를 담을 수는 없구나. 지금 내 마음에 가득 차오른 이 광경을 담는 건 불가능이란 걸 알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별로 좋은 사진이랄 게 없다. 대신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돌려 말할 줄도 몰라서 그냥 이렇게 뉴질랜드는 정말 멋진 곳이었다고. 쉽고 빤한 문장으로.
[잘못들어간 것 아님, 아이폰11 pro 인물사진 모드로도 못 살려낸 뉴질랜드의 칠흑 같은 밤]
뉴질랜드의 밤길은 우리에게 대모험이었다. 서울의 밤도 이렇게 까맣고 수많은 별을 품고 있었던 걸까.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칠흑같은 밤이 눈앞으로 돌격했다. 길옆엔 토끼들이 쌍으로 머리를 들고 호시탐탐 길을 건너려고 해서 그걸 피하느라 몇 번이나 차가 휘청대고 운전을 하는 친구는 방어 운전을 하느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운전을 해야 했다.
[처량한 차박 컷, 궁상과 낭만사이 ]
첫날과 마지막 날의 숙소만 예약한 탓에 말 그대로 잘 곳이 없어 차에서 잠을 청했다. 어두울수록 별은 더 많았다. 코앞까지 쏟아지는 별과 은하수를 창문 밖으로 보며 침낭 안에서 동물처럼 몸을 구긴 채로. 하루는 차에서 또 하루는 1박에 30만원이 넘는 호텔을 잡아 사치스럽게 보냈다. 차에서 자고 화장실에서 대충 씻은 우리가 고급 리조트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서 있는 몰골이 너무 이질적이라 서로를 보면서 어찌나 웃었는지.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근사했던 호텔의 뷰]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모두 비행기 안에서 보냈다. 덕분에 그사이에 낀 뉴질랜드 여행은 진공 유리병 안에 든 것처럼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 뚝 떨어져 있다. 아주 멋지고 근사한 경험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유리병을 열어 가끔 꺼내 보고 싶을 만큼.
나이가 든다는 건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나는 이걸 좋아하고 저건 싫어해. 쉽게 말할 수도 있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아 보려고. 그동안 내가 싫다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해보지 않았던 거라는 걸. 그리고 사람은 변한다는 걸. 일 년 전에는 별로였던 것이 지금은 좋아하게 되는 일도 있다는 걸. 2020년의 나는 또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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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