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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에서 물 향기가 난 거야, 엉 빠썽

안녕. 원고료로 향수 사며 탕진잼을 누리고 있는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트렌치코트도 못 꺼내고 벌써 가을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
안녕. 원고료로 향수 사며 탕진잼을 누리고 있는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2019. 11. 10

안녕. 원고료로 향수 사며 탕진잼을 누리고 있는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트렌치코트도 못 꺼내고 벌써 가을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

이제 정말 한국에 가을이 사라져가는 걸까…? 내 가디건과 바람막이와 20데니아 스타킹은 어쩌고…?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주제에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반항하듯 새 향수를 하나 골랐다. 프레데릭 말의 엉 빠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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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빠썽은 플로럴 계열의 향으로, 메인 노트는 라일락이다. 봄이 시작될 무렵, 3주에서 한 달 정도만 만나볼 수 있는 바로 그 라일락 말이다. 꽃과 나무에 대해 크게 관심 없었던 나는 조향을 시작하면서 꽃에 푹 빠지게 됐다.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꽃은 한철이 지나면 지고, 그 향기들도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에 새삼 매혹됐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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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인 나는 살아있는 꽃의 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향을 하지만, 사실 할수록 어려운 일이다. 내년 봄 출시할 라일락 향수는 올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조향을 했다. 라일락이 한창일 때,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자꾸만 라일락 향을 마주칠 때,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걷다가 서다가 했다. 고작해야 한 달이면 사라질 향기들이었다. 내 폐에 라일락 향을 가두고 싶었다. 얼마 전 나는 라일락 향수의 조향을 거의 마무리했다. 하지만 날이 추워질수록 확신이 줄어들었다. 내 코가 라일락 향을 맡은 지 너무 오래된 것만 같았다. 라일락이 피어있는 나라로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니 유명한 라일락 향수를 샀다. 내 앞에 라일락을 데려다 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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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당장 닿을 수 없는 향을 재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비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크리스마스에 수박 향을 즐길 수도 있고, 나처럼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라일락 향기에 취할 수도 있다. 모두 향수가 해내는 일이다. 내 손에 들어온 프레데릭 말의 엉빠썽을 처음 뿌린 순간, 희비가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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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 묻은 라일락 향’이다. 내가 원했던 라일락의 보라색 무드와 부드러운 달콤함, 생화의 느낌이 없어서 약간 슬퍼졌다. 하지만 곧바로 화이트 라일락의 향기와 물 냄새를 매칭시킨 조향사의 아이디어에 매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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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빠썽의 조향사는 올리비아 지아코베티(Olivia Giacobetti)다. 프랑스의 조향사인 그녀는 자신의 브랜드도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유명 향수 또한 조향했다. 우리가 알만한 대표작 중 하나는 딥디크의 필로시코스와 에르메스의 이리스. 올리비아 지아코베티의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녀의 향수만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도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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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향을 생화에 가깝도록 만들기보다는 워터리한 노트를 함께 섞어서 캐릭터를 부여하다니! 물 냄새가 섞인 꽃향은 생생한 꽃 느낌보다 훨씬 더 아련하고 환상적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풍경화처럼 청순하네, 싶다가도 촉촉한 질감이 섹시한 느낌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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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비 냄새 혹은 물 냄새를 표현할 때 쓰이는 향료에서는 특유의 물비린내랄까, 쉽게 말하자면 오이 냄새가 느껴질 수 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절대 추천할 수 없는 향수다. 난 좋기만 한데. 킁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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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바짝 마르는 건조한 가을날, 물기 듬뿍 묻은 라일락 향을 뿌리고 나뭇잎 떨어지는 길을 걸으면 어떨 것 같나? 마치 한 손에는 봄, 한 손에는 가을을 쥐고 걷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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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가을은 서로 절대 만날 수 없는, 만나본 적 없는 두 계절이다. 하지만 그 둘의 낯선 조합에 나는 곧 중독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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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