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원고료로 향수 사며 탕진잼을 누리고 있는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트렌치코트도 못 꺼내고 벌써 가을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
이제 정말 한국에 가을이 사라져가는 걸까…? 내 가디건과 바람막이와 20데니아 스타킹은 어쩌고…?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주제에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반항하듯 새 향수를 하나 골랐다. 프레데릭 말의 엉 빠썽.
엉 빠썽은 플로럴 계열의 향으로, 메인 노트는 라일락이다. 봄이 시작될 무렵, 3주에서 한 달 정도만 만나볼 수 있는 바로 그 라일락 말이다. 꽃과 나무에 대해 크게 관심 없었던 나는 조향을 시작하면서 꽃에 푹 빠지게 됐다.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꽃은 한철이 지나면 지고, 그 향기들도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에 새삼 매혹됐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졌다.
인간인 나는 살아있는 꽃의 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향을 하지만, 사실 할수록 어려운 일이다. 내년 봄 출시할 라일락 향수는 올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조향을 했다. 라일락이 한창일 때,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자꾸만 라일락 향을 마주칠 때,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걷다가 서다가 했다. 고작해야 한 달이면 사라질 향기들이었다. 내 폐에 라일락 향을 가두고 싶었다. 얼마 전 나는 라일락 향수의 조향을 거의 마무리했다. 하지만 날이 추워질수록 확신이 줄어들었다. 내 코가 라일락 향을 맡은 지 너무 오래된 것만 같았다. 라일락이 피어있는 나라로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니 유명한 라일락 향수를 샀다. 내 앞에 라일락을 데려다 놓으려고.
향수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당장 닿을 수 없는 향을 재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비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크리스마스에 수박 향을 즐길 수도 있고, 나처럼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라일락 향기에 취할 수도 있다. 모두 향수가 해내는 일이다. 내 손에 들어온 프레데릭 말의 엉빠썽을 처음 뿌린 순간, 희비가 교차했다.
이 향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 묻은 라일락 향’이다. 내가 원했던 라일락의 보라색 무드와 부드러운 달콤함, 생화의 느낌이 없어서 약간 슬퍼졌다. 하지만 곧바로 화이트 라일락의 향기와 물 냄새를 매칭시킨 조향사의 아이디어에 매혹됐다.
엉빠썽의 조향사는 올리비아 지아코베티(Olivia Giacobetti)다. 프랑스의 조향사인 그녀는 자신의 브랜드도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유명 향수 또한 조향했다. 우리가 알만한 대표작 중 하나는 딥디크의 필로시코스와 에르메스의 이리스. 올리비아 지아코베티의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녀의 향수만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도 꽤 있다.
라일락 향을 생화에 가깝도록 만들기보다는 워터리한 노트를 함께 섞어서 캐릭터를 부여하다니! 물 냄새가 섞인 꽃향은 생생한 꽃 느낌보다 훨씬 더 아련하고 환상적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풍경화처럼 청순하네, 싶다가도 촉촉한 질감이 섹시한 느낌을 낸다.
다만 비 냄새 혹은 물 냄새를 표현할 때 쓰이는 향료에서는 특유의 물비린내랄까, 쉽게 말하자면 오이 냄새가 느껴질 수 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절대 추천할 수 없는 향수다. 난 좋기만 한데. 킁킁.
입술이 바짝 마르는 건조한 가을날, 물기 듬뿍 묻은 라일락 향을 뿌리고 나뭇잎 떨어지는 길을 걸으면 어떨 것 같나? 마치 한 손에는 봄, 한 손에는 가을을 쥐고 걷는 기분이 든다.
봄과 가을은 서로 절대 만날 수 없는, 만나본 적 없는 두 계절이다. 하지만 그 둘의 낯선 조합에 나는 곧 중독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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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