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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엔 매혹을, 딥디크 도손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디에디트의 객원 필자 전아론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요즈음 같은 날들엔 공기가 변하는 게...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디에디트의 객원 필자 전아론이다. 여름에서…

2019. 09. 24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디에디트의 객원 필자 전아론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요즈음 같은 날들엔 공기가 변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집 밖으로 문을 열고 나서다가 혹은 퇴근길에 회사에서 후다닥 뛰쳐나오다가 걸음을 탁 멈춰 서게 될 때가 있지 않나. 문득 온몸에 훅 끼쳐오는 서늘한 바람을 마주하고 “아, 가을 냄새”하고 읊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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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변하면 체취도 변한다. 날씨가 변하면 복장도 변한다. 이 수많은 변화의 기로에서 나를 감싸는 향 또한 바꿔주는 것이 인지상정.

여름에는 다들 시트러스 계열이나 아쿠아 계열의 향수를 쓰는 것처럼 가을에도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향이 있다. 따뜻한 우디 계열 향이나 짙은 머스크 계열처럼 온도감이 느껴지는 향.

하지만 나는 플로럴 계열의 향수를 쓴다. 봄도 아니고 가을인데 웬 꽃향기냐고? 이건 그냥 플로럴이 아니라 화이트 플로럴 계열의 향수, ‘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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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니치 향수이자 딥디크 향수인 도손. 조향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5년 전, 그 무렵 처음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백화점을 둘러보다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딥디크 직원이 나눠주는 시향지를 손에 받아들었다. 코끝에 시향지를 가져다 대는 순간 걸음이 멈춰졌다. 오바하는 것 같지만 진짜 그랬다. “어… 음, 이 향 이름이 뭐예요?” 곧장 찾아간 매장에서 도손을 찾았고, 착향(손목이나 몸에 향을 뿌려 시향해보는 것)을 하자마자 바로 홀린 듯이 결제했다. 마치 내가 한 떨기의 흰 꽃이 된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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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손은 튜베로즈를 메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튜베로즈의 한국 이름(?)은 월하향. 달빛 아래의 향기라니, 이름만 들어도 뭔가 농밀하고 유혹적인 꽃향기가 상상되지 않나. 튜베로즈는 대표적인 화이트 플로럴이다. 플로럴이면 플로럴이지 화이트 플로럴은 또 뭐냐고?

여러 플로럴 향 가운데서도 화이트 플로럴은 따로 분류될 만한 특징을 지닌다. 그윽하고 달콤하며 진한 흰 꽃향이 나고, 들이키면 약간 어질어질 취할 것 같은 느낌(이것을 narcotic하다고 표현한다)이 들기도 한다. 꽃향기치고는 무겁고, 따뜻한 느낌이 나는 것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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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꽃이면 무조건 화이트 플로럴 타입의 향으로 분류되는 것도 아니다. 하얀색 꽃 중에 은방울꽃(뮤게, 릴리 오브 더 밸리라고도 한다)은 그린 플로럴로 분류된다. 향긋하지만 맑고 가볍고 다소 청량한 느낌이 들거든. 그에 반해 미모사처럼 실제 꽃 색깔은 노랗지만 화이트 플로럴 타입으로 구분되는 향도 있다.

안물안궁인데 화이트 플로럴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나 싶지만 알아두면 시향하거나 향수 구매할 때 요긴하게 쓰일 거다. ‘달콤하고 진한 꽃냄새’라고 하는 것보다 ‘화이트 플로럴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게 좀 더 있어 보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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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도손은 튜베로즈를 메인으로 구성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 오렌지 블로썸과 재스민까지 더했다. 이 두 가지 향 또한 대표적인 화이트 플로럴로 분류된다. 사람 홀리는 달콤한 화이트 플로럴을 다양하게 모아뒀으니, 내가 혹해서 단번에 10만 원이 훌쩍 넘는 제품을 사버린 것도 이해가 된다. 완전 취한 거지, 도손의 향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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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만 했지만, 사실 화이트 플로럴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향 타입이다. 특유의 달콤한 향을 어떤 사람은 ‘꼬릿한 냄새’라고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은 ‘무겁고 기품있다’고 표현하는 무게감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갑갑하다’고 말한다. 화이트 프로럴 향만 맡으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도손을 (1)나만 아는, (2)독특한 취향의, (3)비밀스러운 향이라고 믿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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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좋은 향은 숨길 수 없다 했던가. 점점 도손 향을 풍기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이 늘어났다. 미팅 자리에서, 독서 모임에서, 술자리에서… 도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자꾸 만났다. “좋은 향이 나네요.” “아, 네. 향수를 뿌려서요.” “도손이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조향을 하느라 단련된 내 후각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다.

얘기를 나눠보면 다들 도손을 사게 된 이유가 제각각이었다. 가게 손님으로 오신 분께 향이 너무 좋아서 향수 이름을 물어봤다는 사람부터 전 여친이 두고 간 향수인데 좋아서 못 버리고 자기가 쓰고 있다는 남자까지. 다들 뭐에 홀린 것처럼 도손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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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손이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튜베로즈의 무게감과 달콤함을 부드럽게 잘 풀어내면서 흰 꽃 특유의 여성스러움을 배제하고 중성적인 향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아하고 부드럽지만 시크한 느낌이 든다. 무겁고 짙은 향이지만 묘하게 은은하다는 인상을 준다. 상충되는 이미지들이 향수 한 병에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이래서 향은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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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향이지만 이미 유명해져 버렸으니, 차라리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향이 얼~마나 매력적인 향이게요! 같은 향수 뿌린 사람 마주치기 싫어서 망설이다가도,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부는 날씨엔 여지없이 손이 가는 향. 뭐 어때. 좋은 건 나누는 거잖아? 같은 향이 나는 사람에 마음이 끌릴 법도 한, 이른 가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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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