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꽃을 샀다. 노오란 튤립이었다. 꽃이라니, 그것도 셀프 선물이라니 픽하고 웃음이 났다. 얄팍한 종이에 쌓인 탐스러운 다섯 송이의 튤립을 품에 안고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좀 쌀쌀했지만 몸도 마음도 완연한 봄이다.
그래 향수를 사자. 가로수길 길바닥에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지만, 봄이 오면 향을 바꾸는 건 나의 오랜 의식이다. 사실 마음에 둔 브랜드도 있었다. 두 명의 프랑스 인이 뉴욕에서 시작한 요즘 가장 핫한 니치 향수 브랜드, 르 라보(LE LABO)다.
향수 실험실을 컨셉으로 하는 르 라보는 2006년에 시작했다 이제 10년이 조금 넘은 셈이다. 몇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남아온 향수들 사이에서 르 라보는 언제 이렇게 대단해졌을까.
향수 실험실이란 컨셉이 정확히 들어맞는 매장으로 들어선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무 테이블 위로 늘어선 향수들을 살펴본다. 본래 나는 우디한 향을 좋아한다. 평소 선호도라면 상탈33이나 떼누아29를 골랐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의 향이 궁금해졌다.
향수를 고르는 방법은 시향지나 옷 말고 내 살에 직접 뿌려보는 거다. 그리고 내 체취와 충분히 섞일 여유를 두어야 한다. 한 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사람마다 체취와 피부의 온도가 다르니 같은 향도 전혀 다르게 발향이 될 수 있다. 첫향이 다 날아간 뒤에 남는 잔향을 맡았을 때, 거북하지 않고 계속 코를 가져다대게 만들면 그게 바로 내 향이다.
양 손목에 다른 향을 입고 가로수길을 돌아본다. 먹구름 가득했던 하늘이 개고, 선명하게 해가 떴다.
결국 골랐다. 일랑49.
르 라보의 향수 이름은 심플하다. 두 음절 길어봤자 세 음절을 넘지 않는다. 베르가못, 아이리스처럼 향료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도 많다. 다만 향수 이름 뒤에는 숫자가 붙는데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향수에 들어간 향료의 개수를 말한다.
일랑49는 마흔아홉 가지 향료가 들어갔다. 9부터 49까지 다양한 숫자가 붙긴 하지만 20번대 숫자가 대부분이다. 일랑은 르 라보 중에서도 가장 많은 향료가 들어간 향수다. 의미인즉슨, 향의 층위가 굉장히 복합적이란 뜻이다. 첫 향의 느낌과 마지막 향의 느낌이 굉장히 다르다. 그리고 향도 굉장히 강하다. 욕심부리지 말고 정말 조금만 뿌려야 한다.
향수를 고르면 그 자리에서 직접 향료를 섞어준다. 정말 실험실처럼 보이는 투명한 방에서 저울과 스포이드로 내 향이 만들어지는 걸 지켜보며 기다린다. 르 라보의 철학은 와비사비(Wabi-Sabi わび・さび)다. 일본에서 온 개념으로, 완벽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향의 재료가 되는 원료 자체에 집중하고, 완전히 만들어진 상태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이 섞고, 향을 구입하는 사람의 체취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그 과정과 경험을 즐기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런지 향수 병도 꼭 시약병같다. 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향을 만들고 라벨을 인쇄해 붙여주는데 이때 라벨에 원하는 문구를 넣을 수도 있다. 나는 Editor M을 새겼다. 이제야 정말 내 것 같다.
라벨에는 구매한 날짜와 장소도 새겨진다. 50ml에 23만 원이라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기분 좋은 소비였다.
향수는 완전한 사치품이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좋은 향수를 뿌린다고 가슴팍에 멋진 로고가 새겨지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아침에 뿌린 향은 금세 익숙해져버려 정작 나는 잘 느끼지 못한다. 아마 이 향을 가장 많이 즐기는 사람은 에디터H가 될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그녀는 향수는 머리가 아프다며 뿌리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향에 대한 기호는 전적으로 취향의 영역이라 어떤 좋은 향수에 대해 순위를 매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단지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는 ‘향기나는 물’ 따위를 사람들은 100ml에 10만 원도 훌쩍 넘는 돈을 지불한다.
일랑49는 우아한 향이다. 성숙한 여인에게 느껴질 것 같은 향기. 첫 향은 달고 독한 꽃향기가 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우디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하얀꽃 천 송이 정도가 내 눈앞에서 춤추듯 흩날리다 잘 말린 나무테이블 위에 사뿐히 내려 앉는 것 같다. 순간엔 달고 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디한 향이 살 내음과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워낙 많은 향로가 들어가서 향이 굉장히 독하니까 욕심을 버리고 정말 조금씩 뿌려야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르 라보의 향은 지속력이 굉장히 긴 편이다. 지난 번 전시회에서 뿌려진 상탈의 향기가 정말 하루 종일 옷과 살에 옮겨붙어 다음 날까지도 그 향의 존재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적이 있을 정도다.
좋은 술처럼 이 향에도 2주간의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방금 섞은 분자들이 서로 엉키고 자리를 잡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딱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이제 진짜 봄이 올 것이다. 우아한 향을 입고 함께 더 우아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의 M의 취향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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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