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H다이어리] 나의 스물여섯에게

스물 여섯의 나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있을 당신에게
스물 여섯의 나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있을 당신에게

2019. 02. 11

20대를 생각하면 스물여섯 살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그때 석촌호수 인근의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회사 일은 지루했다. 무가지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인터넷에 있는 기사를 짜깁기하거나, 아저씨들이 쓴 글을 문법에 맞게 고치곤 했다. 토요일까지 출근해야 했고, 퇴근은 늦었다. 퇴근길에는 항상 석촌호수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다 문득 바라보면 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 놀이기구가 뒤집힐 때마다 사람들의 신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그때의 참담한 기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매일 신나는 모험이 가득한 롯데월드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시시하게 살겠구나. 반짝거리는 것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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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0대가 온통 쭈글거렸던 것은 아니다. 신나게 놀았다. 대학 친구들과 매일 술을 마시고, 술값이 모자라 소주 한 병에 벌벌 떠는 것도 낭만이라 믿었다. 열심히 사랑하고, 미워하고, 글을 썼다. 언젠가는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글을 쓰는 것 외에는 무엇하나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않는 내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두려움은 빠르게 현실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떠밀리듯 급하게 취업했다. 몇 번의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떨어졌다. 모든 게 곤두박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짝반짝 빛나는 20대의 노른자위에 있었는데, 오늘의 나는 시시하고 나이 든 여자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서글픈 일이다. 남의 시선에 치이고, 미신 같은 말을 믿으며 겨우 스물여섯에 나의 모든 가능성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니.

작년 말에 에디터 기은과 둘이 와인을 마시며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나는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건 20대가 꼭 나빠서는 아니고,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두려움만 가득했던 20대가 슬프기 때문이라고. 서른 넘어서 스스로를 잘 알게 되면 훨씬 더 멋지고 재밌는 일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고. 나이 드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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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찬란한 30대의 중간을 앓고 있는 지금도 상상만큼 모든 게 우아하진 않다. 눈썹도 그리지 않은 창백한 민낯으로 키보드를 치며 마른 입술을 뜯어내고 있지. 하지만 해가 잘 들어오는 내 사무실 블라인드 사이로 줄무늬 햇빛이 내려오고, 요즘 매일 마시는 차는 향이 좋다. 겁이 많은 나는 두려움이 줄었다. 여전히 바퀴벌레가 무섭지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러니까 숫자가 쌓이는 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다. 조금씩 의연해지고, 조금 더 우아해지는 중인걸.

오늘 H다이어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영상으로 담아봤다. 여전히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지만, 엄청 쑥스러워하며 촬영한 이야기를 잠시 귀 기울여 들어주시길. 혹시 스물 여섯의 나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있을 당신에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