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국 시카고에서 에디터H입니다. Windy City라더니, 여긴 정말 바람이 많이 부네요.
[바람부는 시카고]
태어나 처음 방문한 이 도시에서 저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준비를 마치고 학교에 다녀왔어요. 학교라니. 저랑 잘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죠. 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등교(?)를 하려니 낯간지럽네요. 심지어 제 이름이 적힌 시간표까지 받았습니다.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정말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미드에서 보던 미국 하이스쿨!!]
저를 낯선 장소로 초대한 건 다름 아닌 애플입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애플의 3월 이벤트가 시카고의 레인 테크 하이스쿨에서 열렸거든요. 네, 이쯤 되면 다들 눈치챘겠지만 이번 이벤트의 주제는 ‘교육’입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아이폰SE의 후속 모델이나 신형 맥북 에어에 대한 발표는 없었습니다. 하드웨어에 대한 기대가 컸던 분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기기에 목마른 저에게 “껍데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거라…”하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구요.
교육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저는 이 카테고리에 관심이 깊은 사람은 아닙니다. 배움에 목마른 나이도 아니고, 가르쳐야 할 누군가도 없죠. 기술의 진화가 제 다음 세대의 교육에 주는 혜택을 보면 오히려 강한 시샘이 듭니다. 강력한 꼰대 마인드가 되죠. “얘들아, 나 때는 이런 거 없었거든? 어엉?”
속 좁은 질투가 몰려들 정도로 애플이 풀어놓는 ‘교육’의 이야기는 매혹적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대에 대한 부러움을 숨길 수 없을 만큼요.
신제품에 대한 발표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중심이 되는 기기는 당연히 ‘아이패드’였습니다. 새로운 아이패드가 등장했죠.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애플펜슬 지원과 저렴한 가격. 보통 애플의 신제품 가격을 들으면 “헐?!”하고 놀라게 되는데, 이번엔 “헐!?”하고 놀랐습니다. 물음표보다 느낌표가 먼저죠. 의문보다 감탄이 먼저 나올 만큼 가격이 착했다는 얘기입니다.
아이패드는 학교에서 쓰기에 정말 좋은 도구입니다. 가볍고, 성능이 뛰어나지만, 단순하죠. 근데 태블릿의 특성상 입력장치의 한계도 분명합니다. 여기에 애플펜슬이 붙으면 생산성이 배가 됩니다. 물론 문제가 있었죠. 애플펜슬을 붙일 수 있는 아이패드 프로는 너무 비싸다는 거.
그런데 이제 허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애플펜슬을 사용할 수 있는 9.7인치 아이패드가 329달러 부터 출시됩니다. 교육 할인을 받는다면 299달러가 됩니다. 300달러가 넘지 않는 아이패드라니. 학생들은 참 좋겠죠. 교육이라는 고급스러운 테마를 등에 업고 저가 아이패드를 내놓은 애플의 전략은 꽤 훌륭해 보입니다. 태블릿 시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플의 가격 인하 정책은 분명 의식할 만한 결과를 낼 것이 분명하구요. 혹시 아이패드를 고민하고 있었던 분들은 지금입니다!
기존에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되던 5세대 아이패드의 업그레이드 판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멀티태스킹 능력이나 그래픽 성능이 향상된 A10 퓨전 칩이 들어갔고, 애플펜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입니다. 아이패드가 저렴해봤자 애플펜슬이 비싸서 마찬가지라구요? 정말 정확한 지적입니다. 애플이 아이패드와 함께 소개한 서드파티 제품 중에 로지텍의 ‘크레용’이라는 펜이 있었는데 49달러라고 합니다. 크레용을 기대해봅시다. 일반 판매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애플의 모든 프로그램은 아이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할 때 효율적으로 돌아갑니다. 여러 학생이 하나의 아이패드를 공유할 수도 있죠. 내 계정으로 로그인하면 모든 작업들을 그대로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근데 문제는 아이클라우드 기본 용량이 5GB밖에 안된다는 사실 아니겠어요? 학생들에게 아이클라우드 유료 결제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갑자기 혜자가 된 애플은 교사나 학생에게 200GB의 아이클라우드 저장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놀랍죠? 저는 2TB 용량을 결제해서 쓰고 있는 사람이지만, 제가 결제한 돈이 자라나는 새싹 여러분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애플세금’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참겠습니다.
이번 이벤트에서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는, 실제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패드와 iOS를 활용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었거든요.
학생들이 아이패드를 이용해 팀플(협업)을 해나가는 과정은 상상 이상입니다. 같은 주제를 두고 리포트를 만들어 가면서, 누군가는 지리학적인 특징을 조사하고, 누군가는 농부들을 조사하고, 다른 쪽에서 그 지역에서 나는 농작물을 조사하고, 식료품의 운송 방법을 알아본다는 거죠. 그냥 일방적으로 해당 정보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래를 나눠 자기 길을 가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 세대이기 때문에, 학습의 방향이 무한정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습니다.
또, 어떤 선생님의 이야기에서는 수줍고 영어에 서툴러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했던 학생의 변화에 대한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스위프트 플레이그라운드’를 통한 코딩 교육이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의 배경이 다양하고, 언어에 대한 능력도 다르지만 코딩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배워갈 때는 이런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결국 그 학생은 코딩 교육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학생회 활동까지 한다는 훈훈한 결론이었습니다.
[실제로 보는 것처럼 징그러웠어요…]
이런 얘기들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지실까봐 직접 학생 체험(?)도 해봤습니다. 여러분 혹시 개구리 해부해보셨나요? 저는 해봤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과학실에서 황소 개구리의 턱을 자르고 배를 갈라 해부 실험을 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 조의 개구리는 생명력이 실로 엄청났죠. 가죽을 핀으로 고정해놨는데, 그걸 뽑아내고 책상 밑으로 점프했거든요. 사춘기 여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오열했습니다. 그 황소 개구리가 팔짝 팔짝 뛰어다닐 때마다 가죽과 장기들이 덜렁 덜렁 흔들리던 그 모습이란….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네요.
이제 학생들이 개구리의 내장을 살펴보기 위해 살생 트라우마를 얻어야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패드에서 Froggipedia 앱으로 직접 개구리 뱃속을 해부해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메스로 살갗을 가르고 배를 까뒤집어 장기를 하나 하나 꺼내보는 과정이 실제 개구리 해부만큼이나 리얼합니다. 저도 모르게 화면 속의 개구리가 튀어나올까봐 얼굴을 찌푸렸을 만큼요. 이런 경험은 비단 개구리에만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는 많은 수고와 갈등(?)을 수반하는 경험들을 화면 속에서 유려하게 구현했다는 것은 교육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애플은 ‘배우는 입장’만큼이나 ‘가르치는 입장’을 조명했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스쿨워크’ 앱은 굉장히 체계적인 맞춤형 교육을 가능하게 합니다. 요즘은 학생이 많이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한 번에 여러 학생을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스쿨워크는 굉장히 명료하게 각 학생의 현 상황을 분석해줍니다. 과제를 얼마나 했는지, 수업 진도를 어디까지 따라왔는지, 소요된 시간은 얼마인지를 수치로 표시해줍니다. 애플이 보여준 샘플 화면을 보면, 공부 안하는 학생의 실태가 너무나 쉽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평소엔 공부와 담을 쌓고 있다가 시험기간에만 벼락치기로 임했던 저 같은 학생에겐 얄짤 없겠어요. 갑자기 무섭네요. 진도를 15% 밖에 따라가지 못했는데 선생님이 그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니….
[네가 뭐하는지 다 보고 있다…]
교실앱의 맥 버전이 공개된 것 역시 멋진 소식입니다. 개인적으로 교실앱이 정말 엄청난 도구라고 평가합니다. 우리가 학생이고, 수업시간에 아이패드를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제아무리 유익한 수업이라도 딴짓을 하고 싶어지죠. 괜히 유튜브도 들어가보고, 게임도 하고 싶어질 겁니다. 학창 시절에 몇 없는 컴퓨터 수업을 들을 때면 항상 몰래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곤 했어요. 딴짓은 아무리 선량한 학생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이니까요. 교실 앱은 이런 유혹을 원천 봉쇄할 수 있습니다. 교사가 모든 학생들의 아이패드를 교실 앱에서 관리할 수 있거든요. 저도 오늘 교실에서 몇 가지 앱을 테스트하며 수업을 들어봤는데, 중간 중간 다른 앱을 실행하려고 해도 홈버튼이 먹히질 않더라구요. 선생님이 허락한 앱만 구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앱 잠금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앱을 구동중인지 선생님이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썸네일에 표시가 되기도 하구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겠죠. 저 역시 꼼짝없이 시키는 것만 해야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저는 이 나이에도 선생님의 마음보다는 학생의 마음에 가깝다니, 덜 늙었네요. 후후.
오늘 여러 가지 체험을 해봤습니다. 간단한 코딩을 통해 드론을 날리고, 로봇을 춤추게 하고, 애플펜슬로 내 손가락뼈 모양을 그려보고, 짧은 영상도 만들어봤습니다. 어떤 것들은 인터페이스가 유아적일 만큼 쉬워서 하면서 헛웃음이 나왔어요. 개발자가 아니라도 코딩을 할 수 있고,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사람도 드로잉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모두 자기 수준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세련된 결과물을 보여줄 필요도 없고, 그러지 못했다고 창피해야 할 이유도 없죠. 다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표현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기술은 결과가 아니라 도구니까요.
키노트 마지막 즈음 발표된 ‘Everyone Can Create’라는 프로그램도 같은 맥락입니다. 선생님들이 기존 수업에 드로잉이나 음악 제작, 사진, 영상 등을 접목할 수 있도록 무료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거죠. 이름 그대로입니다. 누구나 창작을 할 수 있다. 터치 몇 번으로 음악을 만들고, 완결성이 있는 비디오를 만들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할 수 있는 것. 얼마나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창의적인 경험 자체가 학생들의 이해를 높이고 표현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죠.
끝없이 쏟아지는 교육계의 ‘애플 간증’을 들으며 제가 받았던 교육을 반추해봤습니다. 저는 특별히 공부를 잘한 적도 없고, 못한 적도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솔직히 학교 공부가 즐거웠던 적은 없습니다. 이해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수업 내용을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외우는 것만은 곧잘 했기 때문에, 그냥 통째로 외워버리곤 했습니다. 시험 성적만 얼추 맞추면 내가 얼마나 진도를 파격적으로 놓치고 있는지 알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노트에 낙서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즐거웠는데, 늘 숨어서 몰래 했죠. 음지에서 이루어지던 에디터H의 창작 활동을 긍정적인 표현력으로 연결해줄 수 있는 교육이 있었다면 지금 저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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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