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2월이었던 것 같다. 주말의 나는(언제나 그렇듯)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만큼 한국어 콘텐츠가 다양하지 않았으며,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홈런율 역시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프리미엄 멤버십을 결제해온 나는 “뭐라도 건져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빈약한 리스트를 집요하게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3%> 라는 낯선 제목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워낙 이것저것 집적대며 드라마를 보는 편이라 도입부가 조금이라도 재미없으면 꺼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3%>는 언어의 장벽까지 있었다. 자막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권 드라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귀 기울여 들어봐도 어느나라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스페인어 같기도 하고, 포르투갈어 같기도 했다. 알 게 뭐람. 재밌으면 장땡 아니던가!
짧게 설명하자면 <3%>는 헝거 게임과 비슷한 설정의 드라마다. 등장인물들은 20세가 되면 무시무시한(?) 테스트를 거쳐 3%의 사람들만 살 수 있는 풍요의 땅에 가게 된다. 이 과정을 매우 속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다, 이국적인 언어와 배우들에 빠져 이틀 밤 안에 한 시즌을 끝내버렸다. 마지막까지 어느 나라 드라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2년이 지나 넷플릭스 미국 본사에서 열린 <Netflix Labs day>에 참가하고 나서야, 그때의 경험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3%는 브라질 드라마였다. 본사 직원의 발표를 듣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됐다. 사실 어느 나라 드라마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평생 브라질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브라질의 드라마를 접할 일이 없었던 사람이 넷플릭스를 통해 경험을 확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3%는 전 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시청자들 대부분이 브라질 콘텐츠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 하나인 <다크>역시 재미있는 숫자를 가지고 있다. 독일어로 만들어진 독일 드라마지만 시청자의 90% 이상이 독일 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헐리우드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독일 드라마와 브라질 드라마를 보게 된다. 한 콘텐츠에 대해서 기존보다 훨씬 더 큰 시청자 층을 찾아내고, 더 큰 시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생각해보면 이건 분명 넷플릭스의 의도(혹은 실험이라고 해두자)가 깔려있는 결과다. 내가 즐겨보는 콘텐츠를 토대로 새로운 영상에 대한 추천이 이루어지는데, 이 리스트에 비슷한 장르의 제3세계 드라마가 조금씩 섞여 있다면? 자연스럽게 보는 세계가 넓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넷플릭스의 빅픽쳐였던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와 넷플릭스라는 회사에 대해 복습하고 넘어가자. 다들 아는 것처럼 전세계에 1억 1,800만 명의 가입자를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다. 재밌는 건 브랜드의 네이밍이다. 넷플릭스의 시작은 스트리밍이 아니었다. 1997년에 비디오와 DVD를 배달해주는 서비스로 시작됐고, 스트리밍 사업을 시작한 건 한참 후인 2007년이다. 그런데도 창업자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인터넷과 영화라는 단어를 합성한(NET+flicks) 기업명을 준비해둔 것이다. 언젠가는 물리적으로 비디오를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웹상에서 콘텐츠를 유통하겠다는 사업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리밍을 꿈꾸기엔 네트워크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던 1997년부터! 아, 여기서 우리는 ‘될놈될’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어쨌든 넷플릭스는 재크의 콩나무처럼 승승장구 무럭무럭 자라나, 2015년부터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다. 처음엔 60개국으로 시작한 글로벌 서비스가 190개 국으로 늘어나는 데는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재도 무섭게 사세를 넓혀가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전 세계에 어디서 넷플릭스를 보든 사용자 경험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경험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게 들릴 것 같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이건 내 추측이지만 초창기의 넷플리스는 “헐리우드의 콘텐츠를 전 세계에 전달하자”라는 컨셉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세계의 수많은 스토리텔링을 가져와 전 세계에 다시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국가의 다양성이 주는 엄청난 가능성을 맛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입자의 절반 이상이 미국 외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각각의 스토리를 각각의 시청자의 입맛에 맞게 다듬는 ‘현지화’의 과정이 중요하겠다.
일단 자막이다. 자막은 현지화의 기본이다. 언어적으로 정확해야 함은 물론, 시청 국가에 따라 문화적인 요소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한국 진출 초창기에 자막 품질에 대한 논란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최근의 자막은 꽤 훌륭하다. 지속적인 자아성찰(?)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넷플릭스 측에서 자막 번역 작업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예를 든 장면이 바로 <기묘한 이야기>였다. 알파벳 스펠링을 통해 아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인데, 전달받는 언어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번역가들이 이 뉘앙스를 잘 표현해야 한다는 것.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의외로 자막보다 더빙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한국은 아동물이 아니고서야 더빙보다는 자막을 선호하는 추세다. 미국은 더더욱 더빙에 익숙하지 않다. 영어 콘텐츠가 압도적으로 많다보니 굳이 더빙 콘텐츠에 대한 니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넷플릭스는 ‘양질의 더빙은 먹힐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더빙을 파기 시작했다. 성우 선정과 오디오 품질에 심혈을 기울여서 지속적으로 더빙 작업을 해왔다. 그 결과 예상보다 많은 시청자가 더빙 콘텐츠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재밌는 건, 자막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빙으로 보는 사람이 똑같은 드라마를 끝까지 보는 비율이 더 높았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같은 콘텐츠에 대해 더빙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더빙에도 종류가 다양하더라. 시작장애인을 위해 배우들의 행동, 외모, 의상까지 나레이션으로 설명해주는 더빙도 있고, 배우마다 성우를 달리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로 번역을 해주는 ‘렉토링’이라는 더빙도 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더빙을 사용하는 이유 역시 문화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통해 계속해서 실험하고, 결과를 찾아가며 똑같은 콘텐츠를 가장 집중도 있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번엔 각 사용자의 콘텐츠 경험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바로 네트워크 환경이다. 솔직히 나는 해외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갈 때마다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 처참한 인터넷 속도로 유튜브를 쓰고, 넷플릭스를 보지?’ ‘어떻게 HD 화질의 스트리밍이 되지??’ 한국에선 5분이면 끝나던 업로드가 1시간이 걸리는 걸 보면서(이 역시 양호한 편이다) 오지랖 넓은 남 걱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모토가 스트리밍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보고 싶을 때마다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래서야….
[새로운 인코딩 기술을 적용한 버전이 화질도 좋다]
넷플릭스가 네트워크 품질이 떨어지는 상황을 위해 찾은 해답은 생각보다 훨씬 실질적인 것이었다. 최적화된 인코딩 기술을 통해 최고의 화질을 최저의 용량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인터넷 속도가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도 스트리밍 영상의 화질을 높이고, 데이터 사용량의 부담을 덜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지난 2년간 장면 별로 영상을 조각내 인코딩하는 기술을 개발해 테스트를 진행해왔다고 한다.
[누가 봐도 다른 제시카 존스(상)와 빅마우스(하)]
영상마다 어떤 장면은 움직임이 적고, 어떤 장면은 복잡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각각의 샷마다 복잡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분석해 비트레이트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 이번에 2시즌을 공개한 마블의 <제시카 존스>와 애니메이션 <빅 마우스>는 샷의 복잡성이 판이하다. 단순한 화면 구성의 빅마우스는 빠른 속도로 액션이 진행되는 제시카 존스에 비해 같은 품질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비트의 양이 훨씬 적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이런 인코딩 시스템을 ‘다이나믹 옵티마이저’라고 부른다. 이전의 인코딩 방식과 비교했을 때 정말 다이나믹한 차이를 보인다. 영상 품질이나 디테일 표현은 더 좋아졌지만, 훨씬 더 ‘가볍게’ 스트리밍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것이 넷플릭스에서 2일 동안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나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기존엔 4GB의 데이터 사용량을 가진 사람이 넷플릭스 스트리밍을 10시간 정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새로운 인코딩 방식에서는 같은 데이터로 26시간까지 스트리밍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와우.
[아름다운 막장 드라마 그랜드 호텔…]
여기 좋은 예가 있다. 얼마 전부터 제공된 ‘저장하기’ 기능은 말 그대로 원하는 콘텐츠를 내 디바이스의 하드에 저장해두는 것이다. 때문에 네트워크 연결이 되지 않는 비행기에서도 미리 다운로드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이번 비행엔 <그랜드 호텔>이라는 스페인판 막장 드라마를 챙겨갔다. 무려 15편이나 다운로드 했는데, 놀랍게도 용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15편 다 합해서 2GB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질은 아이패드 프로에서 보기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깃털처럼 가벼운 용량이 아닌가. (사족이지만 겁나 재밌는 막장 드라마다. 숨막히는 사랑과 죽음, 배신과 죽음, 이별과 죽음이 반복된다.) 넷플릭스 측에 물어보니 이 역시 넷플릭스가 지속적으로 개발해온 인코딩 방식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장 용량이 더 작아질 것이라는 자신에 찬 대답까지 들었다.
넷플릭스 랩스 데이는 흥미롭지만 정말 거친 스케줄이었다.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LA 오피스와 로스 가토스 본사 건물을 하루 종일 이동하며 하루에 6개의 세션(강의에 가깝다)을 들었다. 수많은 이야기의 맥락은 하나였다. 스토리 텔링은 다양하게, 사용자 경험은 동일하게. 전세계의 수많은 사용자들이 가진 수많은 취향을 만족하면서도, 모두가 똑같은 편리함을 맛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정론적인 이야기겠지만 젊은 기업 특유의 화기애애함과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정신 교육(?)에 세뇌되어 넷플릭스에 더더욱 빠지게 된 것 같다.
서비스의 안정성을 이야기하며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다. 1억 명이 넘는 가입자들은 뒤에서 벌어지는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우리 모두는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필요 없는 고객이니까. 하지만 때로는 주방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게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넷플릭스에 대한 오랜 불만을 하나 언급해보자. TV, PC, 모바일 등 디바이스에 따라 최적화된 UI를 설계하며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첫 화면에 표시되는 콘텐츠 외에는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 검색 기능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얘기다. 게다가 별점이나 후기 등 해당 콘텐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너무 적다. 세네 줄로 표시되는 스토리 설명도 마땅찮고 말이다. 덕분에 나는 수십 개의 드라마의 1편을 보며 지루한 “내 드라마 찾기” 여정을 떠나야했다. 이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방법은 아니겠지만, 모바일에서의 ‘초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미리보기 기능은 아주 반갑다. 마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듯 세로 화면에 꽉 찬 30초 정도의 예고편을 엄지손으로 쓱쓱 넘기며 감상하면 된다. 직관적이고 쉽다. 마음에 들면 나중에 보기 위해 ‘찜’해 두거나 바로 플레이할 수 있다. 콘텐츠를 감상하는 목적보다는 쉽게 넘겨보며 고르는 목적이 더 강하다. 오로지 모바일 환경을 염두에 두고 소셜 미디어의 편리함을 따온 것이라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 생각한다.
“넷플릭스는 이제 당분간 지긋지긋해!”라고 외치고도 집에 돌아와 <제시카 존스 시즌2>를 보다 잠이 들었다. 마블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볼 것 같진 않다.
분명히 말하지만 넷플릭스는 완벽한 서비스는 아니다. 그들의 핵심인 ‘개별화’ 콘텐츠 추천 시스템은 까다로운 내겐 아직 조금 아쉽고, 모든 오리지널 콘텐츠가 재밌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공들여 만들어가고 있는 사용자 경험에 완벽히 동의한다. 어디서 어디서든, 내가 보고 싶을때, 어떤 기기에서든, 항상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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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