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했다(1년 전쯤에). 거처를 옮길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하나. 근처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곳을 찾는 거다. 운 좋게도 발견했다. 그것도 보광동의 사랑방인 헬카페가. 꼭 자주 가지 않아도 이런 근사한 곳이 있다는 건, 만기일이 가까운 적금처럼 든든한 법이다.
늦잠을 자지 않은 주말엔 헬카페를 찾는다. 단 한 시 이후는 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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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커플들이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위해 카페를 찾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이곳은 이름처럼 커플 지옥이 되니까.
사실 이 카페는 커플들이 꽁냥대기엔 적합치 않은 곳이다. 음악 소리가 하도 커서 대화도 힘들다. 선곡은 언제나 주인장 마음대로.
사람 키와 맞먹는 두 개의 스피커에서는 클래식, 재즈, 언니네 이발관, 신해철까지 대중 없이 좋은 음악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작게 웅성이는 사람들의 수다소리와 규칙적으로 들리는 커피 머신 소리가 양념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언제나 노트북을 챙겨가지만, 커피향과 맛에 취해 커피만 홀짝이다 돌아오곤 한다.
헬카페의 커피는 깔끔하다. 맛이 깊고 쓰지만 지저분하게 남는 잡맛이 없이 뚝 떨어진다.진득하게 따라붙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과 향이 혀안에서 맴돌다가도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어느 주말 느적느적 옷을 끼워입고 헬카페를 갈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 것은 아닐테니. 헬카페를 갈 수 없다면, 그곳을 내곁으로 데려오자.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헬카페가 드립백을 선보였다. 가격은 7개에 1만 2,000원. 아, 심지어 네스프레소와 호환가능한 캡슐도 있다. 그건 11개에 1만 1,000원.
오묘한 색이다.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자주빛 핑크 혹은 심홍색.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처럼 보이는 어수선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양의 악마부터 한국의 도깨비까지 세상의 연옥이 여기에 있더라.
커피를 내려보자. 쪼로록 내려가는 물줄기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르는 커피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진다. 아, 막내가 매일 이런 기분으로 커피를 내렸구나. 나쁘지 않은데?
아아 진하다 진해. 드립백 원두는 더 강배전을 했다더니. 과연 그렇다. 원래 이런 드립백 형태의 커피는 맥없이 흐물거리는 맛 때문에 즐기지 않는 편인데, 과연 지옥에서 온 커피답게 꽤 진한 맛을 자랑한다. 물론 헬카페에서 마셨던 커피보다는 향은 덜한 편이지만, 무겁게 떨어지면서도 잡맛이 없다. 검은 커피가 혀와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게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힘이 좋은 맛이다. 한 잔을 들이키니 심장이 쿵쾅쿵쾅 나쁜짓을 한 것 처럼 빠르게 뛴다.
내리는 동작은 가볍고 맛은 무거운 커피였다. 사무실엔 바리스타가 상주하고 있고, 집엔 헬카페 드립백이 있다. 내 카페인 수혈을 위한 플랜은 완벽하다. 올 겨울은 이 자줏빛 박스를 열고 헬카페를 맞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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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