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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닥다리야

에디터M의 한 발, 아니 다섯 발짝 정도 늦은 구닥 리뷰.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파릇했던 스물 셋. 나의 첫 해외여행은...
에디터M의 한 발, 아니 다섯 발짝 정도 늦은 구닥 리뷰. 지금보다 조금…

2017. 08. 16

에디터M의 한 발, 아니 다섯 발짝 정도 늦은 구닥 리뷰.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파릇했던 스물 셋. 나의 첫 해외여행은 태국이었다. 두 달 정도 알바를 해 비용을 마련하고, 몇 권의 책을 사서 떠났던 여행. 당시 불치의 쿨병에 걸렸던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필름 48장만 덜렁 쥐고 태국으로 떠났다.

솔직히 그때 찍었던 사진들이 어디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었던 순간의 공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한정된 필름이라 한 컷 한 컷 수능 답안지를 작성하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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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추억하며 구닥을 썼다. 구닥은 정말이지  구시대적인 카메라 어플이다. 뷰파인더는 저기 보이는 손톱만한 화면이 전부. 셔터를 누르기 전, 저 손톱만큼 작은 화면 속 피사체를 아주 열심히 들여다 봐야만 한다.

게다가 막상 사진을 찍고 나서도 화면을 확인할 길이 없다. 구닥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24컷짜리 한 롤을 찍으면 1시간이 지나야 또 다시 24롤의 새로운 필름이 생긴다. 사진을 찍고 나서도 72시간 꼬박 3일을 기다려야 한다. 뭐든 쉽게 찍고 버리는 이 시대에 이토록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맞아. 옛날에 필름을 맡기면 사진관 아저씨가 말하셨다. “3일 뒤에 찾으러 오세요.”

카메라 앱은 사진으로 말해야하는 법. 사진이 아주아주 많으니까 슥슥 편하게 손가락을 내려주시길.


“덥고 더웠던 나라 홍콩”

무모할 정도로 별 다른 계획 없던 홍콩 출장길. 나의 사명은 오직하나였다. 구닥으로 홍콩을 담으리라. 왕가위 감성을 듬뿍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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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산 내 캐리어. 워낙 흔한 디자인과 컬러라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놨다. 수많은 스티커 중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디에디트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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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건 도로를 누비는 택시다. 뉴욕에 옐로우 캡이 있다면, 홍콩엔 빨간 택시가 있다. 한국도 택시의 색을 통일하면, 회색빛 서울이 조금 더 컬러풀해 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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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스럽지만, 그래서 더 느낌 있는 홍콩의 간판과 벽보 그리고 건물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복잡한 도시일 뿐이지만, 이방인의 눈으로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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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경삼림>처럼 끈적이고 나태한 느낌을 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것 같다.

우리의 덥고 또 더웠던 홍콩 이야기는 조금 뒤에 나올 에디터H의 여행기를 참고하시면 된다.


“또 더운 태국으로”

나의 여름 휴가는 태국이었다. 과년한 여자 여섯 명,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흑역사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십년지기 친구들과의 여행. 음식이 나올 때마다 최소 6대 이상의 아이폰이 끊임 없이 셔터음을 내고, 웃음소리와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 번잡스러운 휴가였다.

신기한 건, 친구들 모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구닥 앱을 쓰고 있었다는 것. 구닥이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난 많이 찍지 않았다. 애들이 찍으니까.

그래서 여기 아직 여독이 덜 풀린 친구들을 달달 볶아 받아낸 구닥 사진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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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시작된다는 설레임 때문일까. 가장 분주히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 공항과 비행기안에서다. 매번 놓치지 않고 찍는 비행기 창문 사진. 다들 하나씩은 찍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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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에 책도 충분히 넣어갔다. 설정샷이 아니다. 나도 이런걸 찍었는지 현상해보고 알았다. 이번 휴가때는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열심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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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었던 호텔의 수영장. 바로 옆으로 한강처럼 도시를 가로지르는 차오프라야강이 흐르고 있었다. 해질녘 노을을 보면서 하는 수영. 아아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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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필름에 빛이 새어 들어 간 것같은 필터가 씌여진다. 실패한 사진같지만, 이런 것도 다 구닥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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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길거리의 점령하고 있는 건, 덥고 귀찮은 얼굴을 한 개들이다.바로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자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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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거리 카오산과 람부뜨리 거리. 수년 전 몸에는 헤나를 머리에는 헤어비즈를 주렁주렁 달고 손에 맥주까지 쥔 채로 이 거리를 방탕하게 쏘다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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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 새벽의 거리에서 풍겨져 나오는 환락의 향기. 길거리의 소음과 쓰레기까지. 삼 년만에 찾은 이 곳은 변한듯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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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왔다면 길거리 팟타이를 먹어줘야지. 단돈40바트(한화 약 1,000원)으로 사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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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선 물대신 싱하와 창 맥주를 마셨다. 우리나라의 카스와 하이트 처럼 태국을 대표하는 술이다. 맛의 차이는 아주 미묘한데, 난 개인적으로 더 쨍한 맛의 싱하에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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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도 갔다. 태국의 젊은이들이 떼창을 하던 곳. 태국은 흥이 많은 나라다. 여느 음식점, 펍마다 썩 실력이 좋지 않은 가수들이 열창을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싼 맛에 마시는 태국의 위스키 쌩쏨. 바카스 병처럼 생긴 모양인지 효과도 강력한 태국 레드불에 타서 마시면, 밤새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이날 쌤쏭에 잭 다니엘 보틀까지 야무지게 비우고 휘청휘청술에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취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많이 찍혔는데, 낯 뜨거워 차마 여기엔 공개할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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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태국 여행내내 택시와의 사투를 벌였다. 택시를 잡을 때마다 아저씨들과 흥정 전쟁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도 사진은 찍어야지. 이것도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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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이번에는 뚝뚝은 타지 못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기묘한 이종교배. 이걸 타고 코가 까매질 정도로 방콕의 매연을 맡아야 비로소 태국에 온 기분이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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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은 여행을 갔을 때 빛을 발한다. 기본적인 사진도 찍지만, 특별하다고느끼는 순간엔 구닥앱을 열고 사진을 남겨보자.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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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흘을 기다려야하지만 괜찮다. 3일의 기다림. 약간의 기다림이야 말로 여행의 순간을 더욱 더 아름답게 미화시켜줄 가장 효과적인 도구니까. 오히려 여행이 다 끝난 이 시점에 선물처럼 문득 날아든 그때의 장면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처럼 느껴진다.어제 입국해서 몸과 마음이 미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나의 구닥리뷰는 여기까지. 내일도 구닥의 추억이 나에게 현상되어 날아오는 중이니까, 나는 아직 행복하다.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