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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 Paris] 얼굴 모양의 화병을 아세요?

안녕. 파리 사는 어떤 사람, HAE다. 한국에서 멀쩡히 에디터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훌쩍 파리로 건너와 8개월째 살고 있다. 그래서 디에디트엔...
안녕. 파리 사는 어떤 사람, HAE다. 한국에서 멀쩡히 에디터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2023. 05. 23

안녕. 파리 사는 어떤 사람, HAE다. 한국에서 멀쩡히 에디터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훌쩍 파리로 건너와 8개월째 살고 있다. 그래서 디에디트엔 어쩐 일이냐 물으신다면, 혼자만 보고 즐거워하기 아까웠던 파리의 재미난 공간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해 보려고 한다. 당신이 파리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줄 거다. 첫 번째로 소개할 공간은 오랫동안 애정하던 수공예 유리 공방 ‘라 수플레리’다. 좋은 기회를 얻어 공동 창업자 발렌티나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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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수플레리는 2007년, 조각가 세바스티앙 노빌(Sébastien Nobile)과 미술 작가 발렌티나 노빌(Valentina Nobile) 부부에 의해 설립됐다. 불어로는 ‘La soufflerie’라 하는데, ‘(입김을) 불다’라는 의미의 ‘souffler’와 가게를 뜻하는 접미사 ‘-erie’가 붙어, ‘부는 가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머리 모양 화병(Vase Tête)으로 유명한데, 이외에도 개성 있는 유리잔과 캔들 홀더 등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는지, 감각 좋다고 소문난 편집숍에서도 종종 만나볼 수 있는 브랜드다. (다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가 난처해서 정확한 발음으론 몰랐던 사람도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고백건대 나도 그랬으니까. 이젠 당당히 ‘라 수플레리’라 부르자. 참고로 에프 발음에 신경을 써주면 좀 더 멋들어지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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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 수플레리는 그동안 이렇다 할 부티크 없이 온라인 스토어와 팝업 스토어, 리테일 숍을 중심으로 판매를 지속해 왔다. 그러다 드디어 2022년말, 센 강 왼편에 위치한 오데옹 7번가에 첫 부티크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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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옹은 20세기 프랑스의 문학과 지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부티크가 자리를 잡은 이곳 역시 역사적 기념물로 등재될 정도로 유서 깊은 건물 중 하나. 가장 ‘라 수플레리’다운 곳을 원했던 발렌티나는, 20세기 초 서점으로 문을 열어 갤러리로도 사용되곤 했던 이 공간을 택했다. 그녀의 탁월한 안목을 증명하듯, 새 부티크의 자태는 마치 오래전부터 언제나 이곳에 있어온 터줏대감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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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와 공간에 대한 부부의 애정도 매장 구석구석에서 드러났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빼곡한 선반들은 물론, 100년이 훌쩍 넘은 나무 바닥의 복원 공사부터 사소한 페인트칠까지, 모두 노빌 부부의 손길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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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 위에 가지런히 진열된 유리 제품들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반사되어 저마다의 빛깔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모양도, 색깔도 어느 것 하나 일정한 것이 없이 제각각이었다. 라 수플레리의 유리잔들이 이렇게 특별한 모양새를 가지게 된 건, 모두 재활용 유리를 활용해 블로잉(blowing) 기법으로 만들어진 데에 있다. 블로잉 기법이란 뜨거운 온도에서 용해되어 부드러워진 유리에 파이프를 통해 숨을 불어넣어 형태를 만드는 공예 기법을 가리킨다.

사실 아직까지 이런 수고로움을 고수하며 유리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는 많지 않다. 공방의 문을 처음 열었던 16년 전에도, 기계의 도움 없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유리 블로잉 공예는 이미 소멸해 가던 분야였다고.

1400_retouched_parisflower-17 [부티크 앞에서, 발렌티나 노빌]

HAE: 사라져가던 유리 블로잉으로 브랜드까지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리 블로잉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끼신 건가요?

VALENTINA: 20년 전, 세바스티앙은 유리 블로잉 수업을 들으면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이 수업을 계기로 유리가 가진 소재적 특성과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되었죠. 이후 저희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유리 블로잉의 다양한 기술과 역사를 탐구하고, 뛰어난 유리공예 장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분들과 함께 라 수플레리를 만들기로 결심했죠.

HAE: 그만큼 라 수플레리만의 뚜렷한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VALENTINA: 유리 블로잉의 과정과 그것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브랜드를 만든 것이 라 수플레리의 시작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유리 공예에 대한 지원과 공예가 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기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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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부부가 공방 문을 열고 만든 첫 제품은 재활용 유리로 만든 화병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번듯한 매장은 물론, 인스타그램도 없었던 때. 그러니 별수가 있나, 이들은 손수 만든 4개의 화병을 자전거에 싣고 파리 시내의 꽃집을 돌아다니며 판매를 시작했다. 그렇게 화병을 구입한 고객과는 수많은 대화를 나눴고,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듣는 입장에서는 영화 속 장면처럼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지만, 사실 보통 열정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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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수플레리에는 수많은 제품들이 있지만, 브랜드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는 누가 뭐래도 머리 모양 화병이다. 한 손에 들어오는 사이즈부터 꽃다발을 꽂아둘 수 있는 크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해당 제품의 인기가 많아지면서 같은 디자인의 컵도 나왔다. 금액대는 4만 원대에서 8만 원대 사이. 비이커, 페르마타, 캄캄 등의 국내 온/오프라인 스토어에서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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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의 절친한 동료 조각가, 마리-조 부론(Marie-Jo Bourron)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화병도 있다. 마리-조는 주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업을 하는데, 이 화병의 모델이 된 인물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인권 운동가로도 알려진 흑인 아티스트, 조세핀 베이커(Joséphine Baker). 라 수플레리의 온라인 몰에서 구입 가능하며 가격은 49유로다.

HAE: 제품 디자인은 누가 담당하고 있나요? 디자인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지도 궁금합니다.

VALENTINA: 디자인은 세바스티앙과 제가 전적으로 맡고 있어요. 저희 제품의 영감은 가족이나 친구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때문에 시제품을 만드는 순간마저도 무척 특별하고 친밀하게 느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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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부티크에서는 이들의 유리 제품 외에도, 부부가 직접 셀렉한 브랜드의 제품도 만날 수 있다. 양초, 인센스 스틱 등 기존 제품들과 함께 사용이 가능한 아이템들이다. 모두 부부가 여행을 다니면서 발견한 브랜드들로, 제품 하나하나에도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감성을 엿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 소개되지 않은 브랜드가 대부분이며, 일부는 유럽에도 소개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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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매장은 세바스티앙의 석고 조각을 비롯한 크고 작은 미술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특히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건축물에 사용됐던 테라코타를 리사이클 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처럼 ‘리사이클’은 라 수플레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 중 하나.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라 수플레리의 모든 유리 제품은 각종 유리를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주로 레스토랑이나 호텔, 공장 등에서 버려진 유리들을 직접 가져와 분해한 뒤 용해해 사용하고 있다고.

“저희는 항상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스마트’하게 일해 왔어요. 포장이나 패키지에 크게 투자하지 않았던 이유도, 버려질 물건에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정말이었다. 재생지에 제품을 둘둘 말아,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다소 소박한 종이봉투에 넣어주는 것이 이들 패키지의 전부다. 요새 브랜딩이다 뭐다 해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패키지에 비하면 무척이나 소박한 모양새. 그렇지만 진정성만큼은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 깊이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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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이들이 굳이 힘주어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공간에서부터 제품, 포장 하나까지 브랜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라 수플레리’라는 이름으로 어우러지곤 했다. 중요한 것은 브랜딩이라며, 엄청난 자원과 비용을 들여 화려한 세계관을 만드는 브랜드도 많은 요즘이지만, 과연 진정한 의미의 브랜딩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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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지만 확고한 노빌 부부만의 철학. 그것은 16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라 수플레리라는 브랜드를 흔들림 없이 유지시켜준 전략 아닌 전략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라 수플레리는 앞으로 보다 많은 세월과, 긴 시간을 머금을수록 분명 더욱 멋지고 근사해질 거라고 감히 확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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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 앞으로 오데옹 부티크에서는 어떤 일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VALENTINA: 매장을 가지고 있으니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매장에 들르는 분들께 저희 유리잔에 차나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요. 앞으로 매장에서는 새로운 제품은 물론 리미티드 에디션도 선보이고 싶습니다. 늘 그래왔듯, 저희의 진심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말이에요.

About Author
HAE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하는 에디터. 내면에 락 스피릿을 간직한 미니멀리스트. 내세울 숟가락 색깔은 없어도 글 쓰는 펜수저 만큼은 대대로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