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21세기에도 위인전이 있다면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에 내가 도움받은...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2022. 05. 23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에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이번 달에 읽은 책 세 권을 순서대로 소개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글쓰기를 낳았다. 그래서 시리즈 이름은 [꼬꼬북]이다. 글 읽는 재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를.


[1]
<종이 동물원>

kko5_1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읽은 책을 주제로 수다떠는 걸 좋아해서 예전에도 종종 독서모임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최근 1~2년간은 독서모임을 꺼렸다. 때론 ‘독서’가, 때론 ‘모임’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선정된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독서’가 힘들었고, 그럼에도 억지로 다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은 펴보지도 않았을 땐 ‘모임’이 힘들었다. 이번 독서모임은 출발이 좋았다. 첫 책으로 선정된 <종이 동물원>은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고, 모두 꼼꼼히 읽어왔다.

<종이 동물원>은 열네 편의 소설이 수록된 SF 단편집이다. 10p 내외의 아주 짧은 초단편도 있고, 꽤 긴 중편도 있다. ‘딱 봐도 SF 같은’ 소설과 ‘얼핏 봐선 SF 같지 않은’ 소설이 섞여 있기도 하고. ‘섞여 있음’은 이 책의 장점이다. 길이도 스타일도 다양해서 어쩌다 한 편이 마음에 안 들었더라도 ‘다음 소설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에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각자가 꼽은 ‘베스트’와 ‘워스트’도 다 달랐다.

표제작이자 첫 번째 단편인 ‘종이 동물원’에 대한 반응부터 엇갈렸다. ‘자식이 부모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는 전개가 너무 뻔하게 느껴졌다는 K,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오열하는 자신이 창피했다는 J, 그리고 뻔한지도 모르고 마냥 감동하며 읽은 나. 셋의 의견이 일치한 부분도 있었다. ‘전형적인 소재를 갖고도 이 정도로 울컥하게 하는 걸 보니, 기본적으로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는 작가네요.’

나의 베스트는 ‘상태 변화’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특정 물질이고 이것이 소멸되면 죽는다는 설정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리나의 영혼은 얼음 한 조각이고, 친구 에이미의 영혼은 담배 한 갑이다. 얼음을 녹지 않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리나와, 아낌없이 불을 붙여 이제 서너 개비밖에 남지 않은 에이미. 읽다 보니 꽤 오래 전에 들었던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영혼을 팔기 전까진 결코 행복한 날은 오지 않아.” 행복한 날을 맞이하려면 영혼을 지켜야 할까, 아님 불태워야 할까. ‘소울리스’해질 때마다 꺼내 읽고 싶은 소설이다.

K가 꼽은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요괴와 요괴 사냥꾼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가는 이야기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뿌려놓은 떡밥을 빠뜨림 없이 회수하는 작가의 구성력을 높이 샀다. 영생을 택한 여자와 택하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 ‘파(波)’를 얘기할 땐 각자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J는 ‘시뮬라크럼’을 베스트로 꼽았다. 시뮬라크럼은 ‘아주 생생해서 진짜라고 믿게 되는 홀로그램’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결정적인 순간’이 담긴 과거의 한 장면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J의 말대로, 내가 진짜라고 믿는 것들은 사실 거대한 진실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고 밑줄친 것들은 순간의 진실일 뿐인데, 그걸 자꾸만 잊어버린다. 이렇게 모여서 같이 읽으면 그나마 덜 잊는다.

  • <종이 동물원> 켄 리우 | 황금가지 | 2018.12.5 | 15,800원

[2]
<책의 엔딩 크레딧>

kko5_2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 지혜를 전수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르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 <종이 동물원> p195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은 <종이 동물원>에서 재밌게 읽은 또 하나의 소설이다. 우주 외계인들의 종족 특성이 제각각이듯 그들의 책 또한 우리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 영화 <컨택트>에서 먹물 비슷한 걸 뿌려 대화하던 외계인처럼,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책을 쓰고 읽는다. 주둥이로 훑고 전류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상천외한 책 만들기 습성을 구경하고 나니, 지구인의 책도 자랑하고 싶다. 시력이 발달하고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이 정교한 덕분에, 한 겹씩 넘겨가며 읽을 수 있도록 낱장마다 소량의 잉크를 굳혀 만든 네모반듯한 정육면체. <책의 엔딩 크레딧>의 주인공은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아래 저자의 말처럼, 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책이 더 좋아졌다.

“책은 매우 친숙한 물건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몰랐던 걸 알게 되면서
조금 더 책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 <책의 엔딩 크레딧> p519

프롤로그부터 인상적이다. 인쇄회사 영업맨 우라모토와 나카이도는 신입 채용을 위한 취업설명회에 참석한다. 대학생들과의 Q&A시간, 업무스타일처럼 두 사람의 대답도 극과 극이다. ‘열정파’ 우라모토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장인의 마음으로 일한다면, ‘실속파’ 나카이도의 유일한 꿈은 하루하루 맡은 업무를 실수 없이 끝내는 것.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작가는 둘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힘을 합치게 한다.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가라앉는 배를 가라앉히지 않으려면” 열정과 현실 모두 필요하니까.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매우 디테일하게 그리다 보니, 등장인물이 많다. 인쇄회사 영업맨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인쇄 기술자, 컬러를 다루는 별색 기술자, 저자의 원고를 인쇄용 파일로 만드는 데이터 제작자, 출판사 편집자와 디자이너, 제본회사 사장까지… 놀라운 건 이 많은 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같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하게 되는 고민들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인데, 단순히 ‘무슨 일을 하는지’만 취재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덕분에 ‘일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더 망설여지고 불안에 시달린다.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면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된다.”
– <책의 엔딩 크레딧> p243

337페이지에서 오타를 발견했다. ‘노련함’이 ‘노렴함’으로 잘못 인쇄되었다. 363페이지에도 오타가 있다. 평소 같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오타가 유독 눈에 밟힌다. 뒤늦게 오타를 발견한 편집자의, 데이터 제작자의, 영업맨의 탄식이 들리는 것 같아서.

  • <책의 엔딩 크레딧> 안도 유스케 | 북스피어 | 2022.4.23 | 16,800원

[3]
<엔지니어 히어로즈>

kko5_3

<책의 엔딩 크레딧>이 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엔지니어 히어로즈>는 그 반대다. 엔지니어들이 이룩한 성과에 비해, 그들을 조명하는 책이 드문 이유다.

“책을 쓴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엔지니어들의 세계관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럴 시간 있으면 뭔가 쓸모 있는 걸 하나라도 더
개발하려 드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 <엔지니어 히어로즈> p15

저자는 날개 없는 선풍기(다이슨), 소음 제어 헤드폰(보스), 드론(DJI) 등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문과 출신으로서, 껍데기만 익숙했던 제품들의 내부 구조를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성취감이 크다. 또한 테크놀로지(technology)에 대한 저자의 정의 덕분에 그동안의 무지를 깨달았다.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일련의 지식 체계나 학문이 아니다.
지적 유희의 단계를 넘어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다.”
– <엔지니어 히어로즈> p54

위대한 엔지니어는 이익을 추구한다. 단, 그 이익은 반드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엔지니어들의 ‘스웩’을 느낄 수 있다. 산업용 로봇을 만드는 화낙은 굳이 특허 신청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외부에서 아무리 관찰해봐야 따라할 수 없을 테니까. 헤드폰 및 스피커를 만드는 보스는 테크놀로지 하나를 개발하는 데 10년 이상을 투자하고, 벌어들인 이익은 대부분 연구개발을 위해 쓴다.

제임스 다이슨은 필터와 먼지봉투가 필요 없는 청소기를 개발하기 위해 3년을 꼬박 자기 집 창고에 틀어박혔다. 그가 3년 동안 혼자서 만든 시제품이 모두 5126개다. 1년에 1709개, 매일 약 4.7개의 시제품을 만들고 부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만들어진 5127번째 시제품은 훗날 다이슨의 간판 제품이 됐다. 이 책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21세기의 위인전이다.

  • <엔지니어 히어로즈> 권오상 | 청어람미디어 | 2016.12.23 | 14,000원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