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서촌 한옥에서 하룻밤

안녕, 호캉스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올겨울에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경주로 2박 3일 여행 다녀오기, 여름...
안녕, 호캉스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올겨울에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2019. 11. 21

안녕, 호캉스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올겨울에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경주로 2박 3일 여행 다녀오기, 여름 말고 겨울에. 지난 여름에 다녀오긴 했는데, 여름 경주는 너무 덥더라. 두 번째는 목표는 한옥에서 하룻밤 묵기. 이건 지난주에 막 달성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묵었던 서촌의 한옥 ‘일독일박’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한옥을 좋아한다. 화려하지만 멋있고, 예스럽지만 촌스럽지 않다. 한옥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고, 마루 끝에 앉아 기와에 걸쳐진 하늘을 바라보는 게 좋다.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와 이영애가 마루 끝에 앉아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던 기분을 알 것만 같다. 괜히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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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일박, ‘한 권의 책과 하룻밤’ 정도의 뜻이다. 여기는 독서를 위한 스테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설명이 길어지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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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헴 이리오너라라고 하거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쿵쿵 두드려야 할 것 같은 외관이다. 하지만 일독일박은 삼성에서 만든 최첨단 비밀번호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곳. ‘띵똥띵띵띵땡’ 비밀번호를 누르면 문이 열린다. 끼이익, 문을 밀고 들어가자 양옆으로 신발장이 보이고 바로 앞에 현관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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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일박은 ㄷ자 모양의 집이다. 대문의 위치는 ㄷ의 왼쪽 세로획 중간쯤에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오른쪽에는 욕실, 서가 그리고 그 위로 숨겨진 공간 다락방이 있다. 천천히 둘러보자. 시간은 많다. 먼저 중정부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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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나무가 주는 이 따뜻한 질감. 정말 마음에 드는 공간이었다. 중정은 ㄷ자 안쪽에 있다. 마치 집이 중정을 품고 있는 모양새랄까. 중정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중앙에 있는 정원을 말한다. 우리말로 바꾸면 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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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여기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소개한다. 족욕탕에 발 담그기, 마루에 앉아 처마 끝 바라보기 정도가 있다.

1400_ildokilbak-35[위에 네모난 돌을 돌리면 물이 나온다. 왼쪽은 냉수, 오른쪽은 온수]

하지만 지금은 11월. 바람이 불고 무릎이 시린 계절. 족욕탕에 뜨거운 물을 받고 조심히 발을 담가보았지만 발만 따뜻하고 몸은 추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12월부터는 동파의 위험성 때문에 족욕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 책을 읽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들어가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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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구경할 공간은 부엌이다. 오븐,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등 요리를 하기엔 충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요리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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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혼자 왔기 때문이다. 같이 가 놓고 혼자 간 척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지 말자. 정말 혼자 갔다. 같이 갈 친구가 없는 건 아니고, 이 날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으니까. 다들 그럴 때가 한 번쯤 있지 않나?

만약 여러 명이 함께 묵었다면 요리를 해볼 수도 있었을 거다. 일독일박은 최대 4인까지 묵을 수 있다. 일독일박에 다 같이 가고 싶다면 지금부터 교우관계를 잘 유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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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면서 동시에 거실이다. 작은 테이블이 있고 책장이 있으며 스피커가 있다. 처음에는 두루마리 휴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애플의 스피커 홈팟이었다.

홈팟 실물을 처음 봤다. 크리넥스, 아니 홈팟의 정수리를 누르니 바로 음악이 재생됐다. 잔잔한 한국 가요와 해외 팝이 섞여 나왔다. 십센치 노래가 여러 번 나왔다. 혹시 여기 스태프가 십센치 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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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팟 바로 옆에 있는 아이패드로는 조도를 조절할 수 있다. 조명은 버튼으로 끄고 켤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간접등은 아이패드로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서촌의 한옥이라고 하면 시설이 불편하거나 낡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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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탁자 위에는 작은 항아리가 있었다. 슬쩍 냄새를 맡아보았다. 보기에는 노란 강황가루 같았는데, 냄새는 향균 될 것 같은 향이었다.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결국 먹지는 않았는데, 알고 보니 족욕할 때 쓰라고 비치해둔 바스솔트였다. 웬만해선 다 먹는데, 안 먹길 잘했다. 역시 인간은 위험을 직감적으로 아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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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옆에 붙어 있는 곳은 침실이다. 일독일박에는 두 군데의 침실이 있는데, 여기가 더 좋다. 메인이라고 보면 된다. 만약 4명이 오게 된다면 현관문 열자마자 선착순으로 달려가서 여길 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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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꼭꼭 닫고 침대에 폭 누웠다. 춥지만 않았다면 창문을 활짝 열고 밤하늘을 보며 잘 수 있었을 텐데. 초봄 날씨가 그립다.

침대에 누워 45도 각도로 밖을 내다보면 중정과 처마가 보인다. 이런 걸 두고 고즈넉하다고 하지. 고요하고 아늑하다, 이 순간에 쓰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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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가 놓인 협탁 위에는 책 한 권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시칠리아 사진집이었다. 시칠리아와 나는 대체 무슨 인연인 건지.

정멜멜 사진 작가의 사진집이다. 알고 있는 책이다. 시칠리아 한 달 살기를 준비하며 읽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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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얘기가 나왔으니 슬슬 서재로 넘어가 보자. 서재는 침실의 반대편에 있다. 침실이 ㄷ의 위쪽 끝, 서재는 아래쪽 끝. 반대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중정을 가로질러 갈 수도 있지만 추우니까 실내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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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라고 했지만 정식 명칭은 다이닝이다.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책을 읽는 곳. 마음의 양식도 먹고, 진짜 양식도 먹는 곳. 난 저녁으로 도미노 피자를 테이크 아웃해서 먹었다. 한옥엔 역시 피자다. 그래도 약간의 퓨전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고기 피자를 먹었다. 다이어트 중이니까 미디움 사이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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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일독일박이라는 이름 때문에 책은 단 한 권만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다이닝에만 10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거실과 다락방에도 책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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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도 좋다. 대부분은 내가 한 번쯤 들어본 책이거나 언젠가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이었다. 한옥을 굳이 찾아서 호캉스를 할 법한 사람, 서울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사람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좋아할 책을 놓아둔 것 같았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심플하게 산다>, <근사하게 나이 들기>, <모든 요일의 여행>, <베를린 일기>,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힘 빼기의 기술>. 제목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자, 우선 욕심부터 버릴까요? 인생 복잡하게 살 거 없잖아요. 나이 먹는 게 슬프다구요? 나이 먹는 게 어때서요. 그냥 여행하듯이 살아요. 시간 있으면 베를린이든 파리든 떠나고, 그게 힘들면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아봐요. 모든 요일이 여행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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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이닝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소개한다. 마음에 들었던 글귀를 적어두기, 다른 사람이 적어둔 글귀를 읽어보기 그리고 그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항상 변함없는 것을 마주하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이 메모를 한 사람은 왜 이 문장을 뽑았을까. 궁금해진다. 어떤 고민이 있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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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마지막으로 다락방에 갈 차례다. 하지만 그전에 아주 잠깐 화장실을 둘러보자. 어메니티는 이솝의 제품이다.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까지 모두 이솝이다. 특히 샴푸 향이 마음에 들어서 이번 달에 월급 받으면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는 정말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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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은 다이닝의 윗공간에 있으며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다리를 타야 한다. 사다리는 꽤 가파르다. 만약 술을 마셨다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안전을 위해 손잡이를 만들어놨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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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는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이 없다. 좌식 테이블, 이부자리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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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통의 집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다락방이 아닌가. 모험심 많은 꼬맹이들이 이상한 계획을 꾸밀 것만 같은 곳. 허리를 숙이고 걸어 다녀야 하는 낮은 천장은 다락방의 불편함이지만, 불편함과 특별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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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다락방에도 책이 여러권 놓여있다. 독서와 친하지 않다고? 그래도 일독일박에서는 책을 피할 수 없다. 여긴 TV도 없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면 이번 기회에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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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아래층을 보면 이런 뷰다. 부엌에서 누가 뭘 먹는지 감시할 수 있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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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밤이 되었다. 나는 서재에서 혼자 남아있는 도미노 피자에 맥주를 먹을 생각이다. 이런 날 거짓말같이 눈이 내린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비 온 뒤 운동장처럼 잔뜩 어지러워진 마음이 조금 정돈됐다. 혼자라도 좋고, 혼자여서 좋은 일독일박이었다. 호캉스는 약이다. 이러니 내가 호캉스를 안 좋아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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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