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만약에 네가 간다면

안녕.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에서 에디터H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가 한 달동안 머무른 아름다운 섬에 오게될 일이 있을까?...
안녕.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에서 에디터H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가…

2019. 11. 11

안녕.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에서 에디터H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가 한 달동안 머무른 아름다운 섬에 오게될 일이 있을까? 너무 낯선 곳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직접 오기 전에는 시칠리아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니까. 그냥 ‘씨실리아’라는 발음이 너무 근사해서 무작정 떠나왔을 정도로 얄팍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월에도 포근한 햇볕, 날씨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바다, 별이 잔뜩 빛나는 밤하늘, 고집스럽지만 다정한 사람들, 공기마저 느리게 흐르는듯한 느긋함. 말하면 낯간지럽지만 직접 마주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들이 시칠리아에는 참 많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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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혹시, 만약에 당신이 언젠가 내 말에 홀려 시칠리아에 오게 될 때를 위한 짧은 가이드다. 이탈리아의 최남단까지 떠나라고 말하면서, 밤하늘이나 공기가 아름답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순 없겠지. 한 달 동안 지내며 마음 속에 즐겨찾기 해둔 가장 근사한 장소만 모아봤다. 해시태그를 달자면 #팔레르모맛집 #팔레르모핫플 정도 되겠다. 모름지기 여행정보는 맛집으로 시작해서 맛집으로 끝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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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인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섬에서 가장 큰 도시다. 기원전 8세기에 건설되어 번화가에 있는 건물 곳곳에서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수세기에 걸쳐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아랍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여러 문화의 흔적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시가지는 제법 크지만 화려한 느낌은 아니다, 유럽 여행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뭔가 투박한데?”라고 생각할지도. 그 투박함이 팔레르모의 매력이니 좁은 골목 골목 사이를 누벼보시기를. 어떤 곳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Ferramenta
Piazza Giovanni Meli, 8, 90133 Palermo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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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를 찾은 건 정말 우연한 순간이었다. 팔레르모 시내와 맞닿아있는 선착장까지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갔는데 눈앞에 거짓말처럼 근사한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앤틱한 초록색 간판에는 ‘Ferramenta’라고 쓰여있었다. 급히 화장실을 빌려쓰고 가게를 빠져나오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좋더라. 시칠리아 시골 마을에 갇혀 답답했던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노오란 조명 앞에서 와인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매일밤 여기서 모이는 사람들처럼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 여기에 뜨내기 관광객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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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다가 사흘 쯤 후에 그 가게를 다시 찾았다. Ferramenta라는 단어는 철물점을 뜻했다. 오래된 철물점의 골격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가게였다. 이거야말로 성수동 감성, 포틀랜드 감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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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저녁 식사를 잊지 못한다. 와인을 주문하겠다고 말하니 친절하게 소믈리에를 불러줬고, 시칠리아에선 보기 드물게 영어가 유창한 소믈리에는 우리의 취향을 묻고 어느 지역의 와인을 원하는지도 물었다. 우리는 시칠리아 본토의 와인을 골랐다. 기분도 들뜨고 향도 근사했다. 파스타도 훌륭했기 때문에 포크에 감은 면발을 씹으며 호들갑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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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에 자리를 옮겨 디저트에 와인을 더 시키고, 호기심 어린 눈빛의 현지인들과 어설픈 영어로 담소를 나눴던 것 같다. 시칠리아에 머무는 동안 팔레르모 시내에 나갈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갔을 정도로 사랑스런 장소였다. 갈 때마다 어김없이 행복했다. 와인도 좋고 음식도 좋았지만,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노랗고 환한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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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가까이 맞대고 와인잔을 흔드는 사람들. 어쩌면 나도 거기 섞여서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한 이탈리아노처럼 보이고 싶었는지도.


Seven Restaurant
Via Roma, 111, 90133 Palermo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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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탑 레스토랑이라는 건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아이디어다. 목이 좋고 높은 장소에서 낮은 풍경을 내다보며 식사를 즐긴다니. 풍경이라는 한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에 자릿세라는 구체적인 댓가를 요구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루프탑을 싫어하냐고? 천만에 말씀. 난 풍류를 아는 도시 여자니까, 루프탑에서 술마시는 걸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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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에서 한 달간 함께한 인턴 에이미가 “아주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놨다”며 메시지로 주소를 보내왔다. 한참 걸어가니 Hotel Ambasciatori라는 오래된 건물이 나온다. 로비로 들어가보니 작지만 꽤 괜찮은 호텔같다. 직접 나무문을 수동으로 닫아야 작동하는 로맨틱하고 공포스런 승강기를 타고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는 팔레르모에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변 건물들이 다 낮은 덕에 탁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해가 질 시간이었다.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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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그날 눈으로 봤던 풍경의 반도 담지 못했을 거다. 빛바랜 오랜지색 지붕이 드문드문 보이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작은 창문들과 빨래가 널려있었다. 그리고 멀찍이 보이는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팔레르모의 화려하고 투박하고, 낡은 요소들이 모두 모여 완벽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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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그림 같은 풍경을 보기 위해 얼마든지 자릿세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메뉴판 조차 착하다. 좋은 가격에 색이 고운 로제 와인을 주문했다. 노을이 핑크색으로 물들 즈음에 마시는 로제 와인은 행복의 맛! 에이미는 높은 곳에서 보니 이 도시가 아름답다는 걸 이제야 알 수 있겠다고 말했다. 천천히 해가 저물어가는 걸 보며 와인을 한 병 비웠다. 나중에 이 자리에 없는 다른 멤버들과도 꼭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곳에선 아끼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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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안주로 주문했던 플레이트가 12유로로 가격도 착하고 맛있었다. 혹시 여길 찾아오게 된다면 되도록 예약을 하고 오시길 요일에 관계없이 붐비는 편이다. 우린 예약을 하지 않아서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간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그 역시 괜찮긴 했다. 레스토랑이 오픈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면 미리 와인부터 주문해서 즐길 수 있다.


Locale Palermo
Via Francesco Guardione, 88, 90139 Palermo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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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길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내 구글 맵에 노란 별표시롤 즐겨찾기가 되어 있었다. 내 힙스터 레이더가 제대로 작동한걸까. 위치가 애매했지만 설명하기 힘든 근사함이 느껴져서 용감하게 찾아갔다. LOCALE이라고 큼직하게 걸린 철제 간판을 보자마자. “아, 여기다!”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레스토랑 입구부터 자유분방하게 놓인 의자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앤틱하고 독특한 가구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규칙없이 이리저리 둘러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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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입구는 칵테일과 위스키 등을 파는 바였고, 레스토랑은 안쪽 깊은 곳에 있었다. 식사를 할 거라고 하니 안쪽으로 안내해준다. 겉에서 보기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완전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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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주는 바이브는 글이나 사진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든데,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운 요소들이 가득 모여 힙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고 말하면 여러분이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 안은 다양한 옷차림의 젊은 힙스터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3일은 굶은 사람처럼 음식을 잔뜩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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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으로 나온 생선과 새우, 스테이크, 파스타, 홍합찜까지 어느 것 하나 맛이 떨어지는 게 없었다. 와인의 취기가 조금 오를 때 쯤에는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더라. 모든 게 완벽한 식사였다. 기분 좋게 취해서 2차를 외치며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도돌이표처럼 가장 먼저 소개했던 Ferramenta로 2차를 떠나게 된다.

어느 도시나 그렇겠지만 팔레르모 역시 처음 볼 때는 몰랐던 골목이 두 번째에 보였고, 두 번째엔 몰랐던 분위기가 세 번째에 보였다. 찾을수록 몰랐던 매력이 넘쳐났던지라 한 골목 한 골목 집요하게 들여다보지 못했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내게 오래 기억남을 근사한 저녁 시간을 선물해준 세 장소를 건졌다. 언젠가 시칠리아에 가게 된다면, 만약에 팔레르모에 방문하게 된다면, 에디터H의 리스트를 꼭 기억하시길. 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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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