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을지로에 술마시로

나는 을지로를 잘 모른다. 어떤 식당의 꼬치구이가 제일 맛있는지, 어느 바의 하이볼이 최고인지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다. 을지로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나는 을지로를 잘 모른다. 어떤 식당의 꼬치구이가 제일 맛있는지, 어느 바의 하이볼이…

2019. 07. 18

나는 을지로를 잘 모른다. 어떤 식당의 꼬치구이가 제일 맛있는지, 어느 바의 하이볼이 최고인지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다. 을지로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많으며, 언제 그곳을 가게 될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거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돈 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괜찮은 집을 소개해주는 거다. 멋진 분위기와 평균 이상의 맛을 가진 곳들. 오늘 소개할 세 곳이 그런 곳이다. 서서 먹는 스탠딩바,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바 그리고 세운상가 3층에 있는 야장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나를 따라오라.


스탠딩바 전기

이곳의 이름은 전기다. 처음 여기를 알게 된 건 가오픈 가게를 잘 찾는 한 분의 인스타그램 타임라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몇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가오픈 중이며 다국적 요리를 취급하고 서서 먹는 술집이라는 점 빼고는 말이다. 서서 먹는 술집이라니. 나는 이른 시일 내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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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이 왠지 낯익다 싶더니 내가 예전에 소개했던 애프터 저크 오프 바로 옆이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십분의 일도 바로 그 골목에 있으니, 만약 전기가 만석이라면 몇 걸음만 옮겨도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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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마주하는 건 ‘ㄷ’자 테이블이다. 정말로 의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레알’ 선술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술집의 원래 의미는 서서 마시는 술집에서 유래했다. 가방은 테이블 밑에 있는 고리에 걸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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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한국에서 이런 형태의 선술집이 처음 등장해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저렴하게 후딱 술 한잔할 수 있는 곳이어서 한국인, 일본인 모두 좋아했다고. 일본 사람들은 선술집을 다치노미라고 불렀는데 이 또한 ‘서서 마신다’라는 뜻이다. 다치노미는 1990년대 말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되며 장기 불황이 지속되자 유행했다. 앉아서 먹는 곳보다 저렴하니까.

전기의 사장님은 한때 금융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퇴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세계 각지의 술집을 다녔는데, 그중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에서 경험한 서서 마시는 술집의 분위기가 좋아서 이렇게 한국에서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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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넓지는 않았지만 거울을 사방에 붙여 넓어 보이는 효과를 냈다. 바 테이블 특성상 여럿이 술을 마시는 건 어렵지만, 위 사진처럼 주방과 붙어있지 않는 별도의 테이블을 마련해놨다. 물론 여기도 의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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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멘보샤(7,000원)와 생맥주를 한 잔 시켰다. 멘보샤는 하루 여덟 세트만 파는 한정 메뉴니 가능하다면 꼭 먹어보면 좋겠다. 빵 사이에 있는 새우살의 두께가 아주 실하고, 느끼한 맛도 없다. 토마토 케첩을 베이스로 매콤한 맛을 내는 소스에 찍어 먹으면 하루의 노곤함이 풀릴 거다. 이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맥주도 빠질 수 없지. 생맥주는 맥스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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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왔을 때는 스지된장조림 도테야끼, 감자 사라다와 함께 마르스 하이볼을 마셨는데,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일식뿐만 아니라 볼로네제파스타, 이탈리아풍 곱창요리 등 다국적 요리를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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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안주로는 일본에서 많이 먹는 구운 풋콩(에다마메)이 제공되는데, 이것 또한 고소해서 계속 손이 가더라. 그 위에 올라간 건 그라나파다노 치즈다. 함께 먹으면 별미. 예전에 함께 갔던 친구는 주문한 안주가 나왔는데도 계속 콩을 까먹었었다.

  • 서울 중구 수표로 42-19
  • 화-토 18:00 – 24:00 / 월요일, 일요일 휴무

향연

을지로에는 유독 높은 층에 위치한 공간이 많다. 3층, 4층 그리고 5층에 위치한 곳도 있다. 더군다나 연식이 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 그러니 올라갔다가 헛걸음하지 말고 꼭 자리가 있는지 전화로 확인하도록 하자. 몸이 힘들면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입맛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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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은 6층에 있다. 여기에 정말 바가 있어?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분위기 있는 공간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은 향연이 아니니 한 층 더 올라가도록 하자. 우리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었다. 노력은 쓰고, 열매는 달다고. 힘들게 향연에 도착했으면 이제 경치를 즐길 시간이다. 을지로에서 이 정도로 높이 있는 공간은 찾기란 힘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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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은 패션 회사의 동료였던 세 사람이 함께 만든 곳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두 분이 가게에 나와 있었다. 헥헥거리며 자리에 앉은 나는 목이 마른 와중에도 왜 향연이라고 지었는지가 궁금했다. 남자분이 생수 한 컵을 주며 설명했다.

“향연의 어원에는 함께 술을 마신다는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고 플라톤의 책 <향연>에  술 마시며 대화하는 분위기가 나오는데 이곳을 그렇게 연출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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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대화체의 책이다. 책을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술 마시면서 무엇이 사랑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매일 하는 거다. “야, 걔랑 걔랑 사귄다는데 너무 안 어울리지 않냐? 둘이 성격도 너무 다르잖아.” “뭐 어때, 결혼한 선배가 그랬는데 남는 건 얼굴이라던데?”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큰 테이블은 그런 컨셉에 딱 맞지 않나 싶다. 테이블을 가득 채워 넣은 촛불들까지도. 이곳이 6층인 이유 역시 외부와 단절된 느낌을 주고 싶어서라고 하니 여기는 오직 손님들의 대화를 위한 공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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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린 청포도와 산딸기가 나왔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안주는 아니고 가끔 준비될 때만 서비스로 주는데 내가 운이 좋았다. 청포도를 얼려먹은 건 처음이었는데, 한 입 베어 먹으니 입안에 청포도향이 사르르 퍼졌다. 청포도맛 슬러시를 먹는 것처럼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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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길어진 탓에 저녁 늦게까지 노을이 보이지 않았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분은 조금만 더 있기를 권했다. 해가 떨어지면 더 멋있어질 거라고 하며. 사실 향연을 추천한 사람은 에디터H였는데, H도 해 질 녘 풍경을 꼭 보고 오라고 했으니 더 있어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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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동안 ‘김부각과 명란마요’을 먹었다. 이 명란마요는 매일 직접 만드는 건데, 향연의 창업자 중 한 명의 할머니가 젓갈로 유명한 강경에서 보내준 백명란으로 만든다고 한다. 짜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었다.

혼자 온 탓에 대화할 사람이 없었고, 그 대신 김부각을 와구와구 먹었다. 그러는 사이 창 밖에는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혼자 와인을 홀짝이는 시간도 좋았지만,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사랑이 뭐냐’에 대해 얘기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가도 좋은 곳은 함께 가기에도 좋은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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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퇴근하시겠네요?” 취재 차 왔다는 걸 아는 남자 주인분이 물었다. 나는 아직 한 군데가 남았다고 말했다. 바로 다전식당이다. “거기 지금 가면 자리 없을 걸요? 여기서 웨이팅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이는데, 잠시만요. 지금 두 분 있는 거 같아요.” 친절하게도 다전식당을 못 갈 경우를 대비해 백만불식품이라는 식당도 추천해줬다. 나는 일단은 다전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 서울 중구 청계천로 166-1 6층
  • 화-금 18:00 – 23:00 / 토요일 17:00 – 23:00

 


다전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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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상가 밑을 지나가면 머리 위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다. 고기 냄새는 그 일대에 진하게 퍼져있다.

다전식당은 청계상가 3층에 있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이어놓은 다리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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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야장을 보면 신세계다. 주변은 휑한데 다전식당의 손님들은 열심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멀리서 보면 그 분위기가 이질적이고, 신기하다.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라고 하는 만선호프를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여긴 또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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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논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곳은 분위기가 메인 디쉬다. 나는 고추장 철판을 2인분 주문했는데, 혼자 왔다고 하니 굉장히 놀라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하다. “혼자 왔다고? 조금 뒤에 일행 안 오고?” 나는 혼자 갔지만, 여러분은 부디 여럿이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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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철판은 제육 요리이고, 오징어 볶음도 있는데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다면 섞어 철판을 주문하면 된다. 이곳은 주문하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셀프 시스템이다. 상추, 김치, 고추장아찌 등 다양한 사이드 메뉴는 무한 리필이지만 이것 또한 철저한 셀프. 술도 스스로 냉장고에서 꺼내와야 하며, 제육도 직접 볶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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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 고추장 제육의 맛이었다. 여긴 맛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유명해졌으니까.

혼자 제육을 볶았을 걸 생각하면 외로웠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다른 테이블의 분위기를 관찰했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을지로의 매력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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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는 모두가 좋아하는 곳은 아니다. 낡은 건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노포보다는 쾌적한 식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을지로는 정말 마음 맞는 편한 사람들끼리 오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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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봐도 서먹한 분위기의 테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친해지지 못한 커플이나 어색한 회식자리는 없었다.

이 곳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증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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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먹고 을지로3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항연에서 추천받은 백만불식품이 생각났다. 아직 9시 밖에 되지 않았고, 근처라고 했으니 구경이라도 해보자 싶어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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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골목 끝에 백만불식품이 있었다. 백만불이라는 이름부터 간판의 폰트까지 을지로스럽달까. 이곳이 로컬들이 추천하는 맛집이라니, 들어가고 싶었지만 다음을 위해 미루기로 했다. 다음에는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종로구의 노포를 소개해야겠다.

  • 서울 중구 청계천로 160 청계상가 바 301
  • 매일 09:00 – 21:00 / 일요일 휴무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