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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애플이 작년부터 주야장천 밀고 있는 슬로건이 있다. “아이패드 프로가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다”라는 얘기 말이다. 이 문구는 많은 이들을 자극했다....
애플이 작년부터 주야장천 밀고 있는 슬로건이 있다. “아이패드 프로가 컴퓨터를 대체할 수…

2016. 08. 29

애플이 작년부터 주야장천 밀고 있는 슬로건이 있다. “아이패드 프로가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다”라는 얘기 말이다. 이 문구는 많은 이들을 자극했다. 어찌 감히 태블릿 따위가 PC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겠냐고 거품을 무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발매 직후부터 아이패드 프로를 쭉 사용해왔다. 한 달 쯤 써봤을 당시 짐짓 회색분자로서 결론을 내렸다. “아이패드 프로는 PC의 일부 영역을 대체할 수 있다”라고.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로 어설픈 문장이었다. ‘일부’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조차 PC의 일부 영역을 대체한다. 이제 더 확실한 문장이 필요한 때다.

답답한 건 질색이니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자. 아이패드 프로는 당신의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다. 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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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윈도우 PC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날 사망했다. 회사 업무용으로는 아이맥을 사용했는데, 어느날 직장을 그만뒀다. 순식간에 내겐 아이패드 프로만이 남겨졌다. 이런저런 사정과 결정장애로 인해 노트북 구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심지어 디 에디트 웹사이트 오픈을 앞둔 때였다. 나는 iOS 기반으로 구동되는 9.7인치 태블릿을 하나를 들고 웹사이트를 만들어야했다. 지금은 맥북을 구입해 함께 쓰고 있지만, 석 달 넘게 오로지 아이패드 프로만 사용했다. 다들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다. 나중엔 보는 사람마다 아이패드 프로를 다루는 내 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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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에 놓인 나는 아이패드 프로를 활용할 방법을 아주 면밀히 연구했다. 리뷰를 위한 게 아니라 내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PC 운영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려고 들면 아이패드는 금세 한계를 드러낸다. 애초에 다른 인터페이스로 설계된 기기다. 모바일 기기에서는 더 단순하고,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가장 쉽게 일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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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디트 웹사이트를 오픈하기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의 영역은 무궁무진했다. 끝없는 회의와 논쟁, 정리와 나열, 선택이 반복됐다. 에디터M과 항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Quip이라는 앱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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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모든 앱에서 실시간 동기화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텍스트, URL, 체크리스트, 사진까지 모든 정보를 쉽게 공유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앱을 사용하면 PC와 아이패드, 아이폰을 오가며 작업해도 인터페이스나 서식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문서 별로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만나기 힘들 땐 회의도 Quip으로 해결했다. 스마트 워크 느낌 물씬. 의견이 강한 우리가 쉽게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는데 큰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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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를 만들 땐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PC에서 사용하던 포토샵과 동영상 프로그램 등은 아이패드에서 쓰기엔 마땅치 않았다. 좀 더 쉽게 쓸 수 있는 툴이 필요했다. 이것저것 써본 결과 포토샵은 픽셀메이터로 대체했다. 이걸로 사진 외곽선을 정리하고 컬러를 바꾸고, 텍스트를 넣는 등 온갖 작업을 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필요한 기능들을 포토샵에서보다 훨씬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맥에서 포토샵으로 작업하다 힘들어지면, 에어드롭을 이용해 아이패드 프로로 옮겨 받아서 사진 편집 작업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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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드라마틱한 느낌으로 보정할 땐 VSCO cam을 사용했다. 이 앱에서 판매하는 거의 모든 유료 필터를 구입했다. 어려운 툴로 사진 톤을 잡느라 끙끙댈 필요 없어 편하다. 촬영한 사진에 어울리는 필터를 골라 쉽고 간단하게 보정 작업을 끝냈다. 그 다음엔 앞서 소개한 픽셀메이터로 사진을 이동해 워터마크를 넣거나 사진 사이즈를 조정하면 된다. 내가 즐겨쓰는 필터 이름은 C8이다. 부르기 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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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에서 동영상 편집도 했다. 필름 메이커 프로나 아이무비를 써보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특히 아이무비를 쓸 때는 스마트 키보드로 모든 단축키를 다 사용할 수 있어서 PC 보다 훨씬 작업 환경이 좋다. 때로는 애플펜슬까지 가세해 마우스보다 더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하다. 영상 편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능에 대한 부분도 언급하고 넘어가자. 태블릿으로선 오버스펙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잘 돌아간다. 지금 2세대 맥북과 함께 쓰고 있는데 동영상을 렌더링할 땐 아이패드 프로가 훨씬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반칙에 가까운 성능이다.

모바일 앱은 기본적으로 훨씬 더 가볍고 쉽게 설계돼있다. 때문에 내 작업 환경에 딱 맞는 앱을 찾는다면 PC보다 훨씬 덜 공을 들이고도 멋진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이게 생산성이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으로도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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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를 활용할 때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제품의 쓸모도 한정된다. 여기는 키보드와 애플펜슬과 터치 디스플레이가 모두 갖춰져 있다. 이 세 가지 도구를 모두 이용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이끌어내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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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에 서명하고 다시 스캔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아이패드 프로에선 아무 편집 앱이나 열어서 애플펜슬로 서명하면 그만이다. 개발자와 사이트 수정 피드백을 주고 받을 때도 개발 중인 사이트 디자인을 캡처한 후에 애플펜슬로 화살표와 설명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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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ability는 학생들에게 정말 유용한 앱이다. 강의를 듣고 있었다면, 바로 음성 녹음 파일도 첨부할 수 있다. 애플펜슬, 키보드 등 아이패드 프로에게 허락된 모든 입력장치를 사용해서 노트를 정리할 수 있는 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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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스마트 키보드도 중요한 요소다. 얇고, 가벼워서 아이패드라는 장치가 가진 휴대성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오래 써보면 키감도 상당히 좋다. 난 맥북보다 아이패드 프로용 스마트 키보드의 키감이 훨씬 좋다고 느낀다. 내구성도 뛰어나고 충전이 필요 없어 편리하다. 물론 문제도 있다. 비싸다, 아주 많이. 이 제품의 공격적인 가격이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떨어트리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확실한 건 아이패드 프로를 PC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스마트 키보드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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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긴 했지만 한글 키보드가 출시된 것도 만족스런 요소 중의 하나다. 글을 쓸 땐 주로 Pages 앱을 이용한다. 워드나 PDF로 공유할 수 있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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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태스킹의 자유도는 PC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제법이다. 두 앱을 양쪽 화면에 각각 띄우고 화면 속 화면 기능으로 넷플릭스 미니창을 띄우면 아이패드 프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멀티태스킹 환경이 구현된다. 꽤 좋다. 버벅임도 없다. 물론 그래도 부족하긴 하다. 난 PC에서 작업할 땐 창을 서른 개 정도는 띄워놓고 혼돈 속에서 일한다. 두 개는 부족하다.

물론 아쉬운 점은 아직 있다. 심지어 몇 가지 것들은 상당히 치명적이다. 아이패드 프로가 모바일 운영체제인 iOS로 구동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불편함들이다. 일단 특정 웹사이트나 앱에서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끝없이 내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모바일 페이지에서 접근할 수 없는 기능이 있으며, 입력 오류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해 육두문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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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프로는 키보드와 결합해 가로로 거치하고 사용함으로써 PC와 비슷한 사용자 환경을 구현하는데, 아쉽게도 화면 속에 표현된 내용은 가로 모드를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즐겨 쓰는 카카오의 브런치가 그렇고, 네이버 블로그 조차 최근에야 가로모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은 아이패드 버전을 따로 출시하지 않아 가로모드가 안되며,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다. 마이너 앱도 아니고 너네 정말 왜 그러니.

멀티태스킹 화면에서는 사파리를 양쪽에 동시에 띄울 수 없어서 답답할 때도 있다. 다행히 iOS10 부터는 가능해진다. 조금만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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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패드 프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충분히 말한 것 같다.

글을 시작하며 아이패드 프로가 PC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절대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발할 것이다. 오버워치도 할 수 없고 국세청 사이트에 들어가서 연말정산 서류를 뗄 수도 없는 기기라고 말이다. 사실이다. 아이패드에선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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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아이패드 프로라서 PC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PC의 대체재가 필요해서 아이패드 프로가 나온 것이다. 애플은 영민한 장사꾼이다. 우리가 최근 10년 간 적응해온 전통적인 PC의 사용자 환경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묵직한 데스크톱에서 이루어지던 엄숙한 작업들이 5인치 안팎의 스마트폰 화면으로 옮겨오고 있다. PC가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아이패드 프로로 절대 일할 수 없는 사람도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더 가볍고, 더 쉬운 기기에서 일상적인 작업을 해결하고 있다. 특히 20대 이하의 어린 세대에서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그들은 모바일 기기에서 소비하고 생산하는 일을 기성세대보다 더 선입견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왕도’라고 믿던 PC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과도기에서 아이패드 프로는 불쑥 등장해 질문을 던졌다. 아이패드는 당신의 컴퓨터인가요? 지금은 맞고, 예전엔 틀리다. 아이패드 프로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제 모바일 기기로 생산성을 논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은 확실해졌다. 3개월의 스파르타 체험에서 느꼈다. 내게는 아이패드도 컴퓨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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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