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있잖아, 나 트레바리 해

모처럼 야근 없는 금요일. 집에 가기 싫은 날이다. 지하철 개찰구 앞을 한참 서성인다. 괜스레 카톡창을 뒤적이지만 온통 업무 관련 메시지뿐이다....
모처럼 야근 없는 금요일. 집에 가기 싫은 날이다. 지하철 개찰구 앞을 한참…

2018. 12. 10

모처럼 야근 없는 금요일. 집에 가기 싫은 날이다. 지하철 개찰구 앞을 한참 서성인다. 괜스레 카톡창을 뒤적이지만 온통 업무 관련 메시지뿐이다. 오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입밖으로 꺼내본다. 친구 J는 결혼을 했고, Y는 요즘 맨날 야근이랬지… 결국 수많은 인파를 토해내는 지하철 안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조금 우울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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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좀 외롭다. 이상한 일이다. 사실 디에디트를 시작하고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하나같이 친절하고 흥미로운 사람들 뿐이다. 게다가 나에겐 언제 만나도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 말고
다른 것에 대해 말할 순 없을까?”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좁고 깊은 우물이 생겼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다.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과 누구를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공존한다. 사람은 이렇게나 복잡한 존재다. 때로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서 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반대로 나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는 사람에게 나를 설명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피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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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을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본다. 습관처럼 SNS 창을 연다. 심드렁한 표정과 무관심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문득 시선이 머무는 화면. 트레바리의 새로운 멤버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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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를 해보기로 했다.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라는 문구가 마음을 움직였다. 명확한 주제와 목적이 있는 모임이라니. 그래,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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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는 유료 독서모임이다. 일 년을 4개월 단위로 나눠 멤버를 모집한다. 이걸 트레바리에선 한 시즌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시즌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총 네 권의 책을 읽는다. 모임에 드는 비용은 19만 원에서 29만 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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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고 모임을 주최하는 일종의 호스트를 클럽장이라고 한다. 클럽장이 유명하면 모임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가격도 10만 원 더 높아진다. 물론 트레바리엔 클럽장 없이 파트너로 진행되는 모임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클럽장이 있는 모임을 선택한다. 4개월 동안 29만원이라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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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장은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수 있는 기업의 대표부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트레바리 멤버로 참여하고 있는 에디터 기은은 평소 궁금했던 분이 클럽장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좋은 기회였다. 트레바리는 1대 다(多)로 만나는 강의 혹은 인사와 명함을 건네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스무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격의없는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친다. 중요한 순간, 나보다 더 많은 경험과 혜안을 가진 인생 선배에게 듣는 조언은 단순히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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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는 압구정, 안국, 성수 이렇게 총 3개의 아지트가 있다. 가능한 요일과 아지트 그리고 주제에 따라 원하는 독서모임을 신청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임, 해외의 기사를 발 빠르게 읽고 분석하는 모임, 주제가 없는 게 주제인 모임 등 생각보다 목적도 주제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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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석한 크루크루는 트레바리 크루(트레바리 직원을 크루라고 한다)가 직접 참여하는 비정기 모임이다.

bcut_DSC01690[트레바리 성수 아지트로 입성하는 노랑머리, 발걸음이 영 어색하다]

날 좋은 어느 토요일. 트레바리 성수 아지트 지하로 멤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엔 각자의 이름표가 놓여있다.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들어 남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단다.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처럼 마음이 간지럽다. 앞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다. 4평 남짓의 작은 공간은 기분 좋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맴돈다. 꼭 새 학기가 시작될 때의 교실과 비슷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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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모임이 그렇듯 여기에도 룰이 존재한다. 그것도 꽤 엄격한. 기본은 책이다. 이곳의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다. 모임 이틀 전 자정까지 공백을 제외한 400자 이상의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참석할 수 없다. 모임이 가까워지면 트레바리 사이트엔 사람들이 적어 내린 독후감이 차곡차곡 쌓인다. 타인의 감상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워밍업이다. 이래 봬도 글을 쓰고 남에게 읽히는 일이 직업인데, 오늘은 조금 쑥스럽다. 이렇게 공개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멋지게 쓸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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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시간이 되자 그날의 발제자가 모임을 이끌어나간다. 시작은 자기소개다. 한 사람의 소개가 끝나면 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방식이다. 다음 번엔 내가 될까? 수건 돌리기를 할 때처럼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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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의 커다란 화면엔 ‘이름이 뭐예요? 무엇을 하나요? 여긴 왜 왔나요?’ 등의 기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다소 가벼운 랜덤 질문이 차례로 떠오른다. 좋은 시스템이다. 참여한 사람들의 자기소개 시간을 비교적 공평하게 나누고,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 가벼운 질문과 답변이 오가며 분위기는 한층 더 누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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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의 구성은 다양했다. 트레바리 크루, 마케터, 대학원생, 건축 설계사, 논술지도교사까지. 아마 여기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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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임의 선정 도서는 <초격차: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 삼성전자를 33년간 이끈 권오현 회장이 쓴 책이다. 평소 경영서라면 담을 쌓고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펼쳐보지도 않았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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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놀랍도록 솔직한 대화가 이어진다.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만 있다면, 의견에 성역은 없다. 책이 좋았던 사람과 반대로 이 책이 썩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사람이 섞여 있다. 대화는 독후감과는 다르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독백처럼 뱉어내지 않는다. 모두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만, 동시에 남의 의견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오랜만에 나누는 진짜 대화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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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운 건 사람마다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 모두 다르고, 거기에 대한 생각 역시 똑같은 것이 없다. 너무 달라서 같은 책을 읽은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달까.

bcut_DSC01725bcut_DSC01721[누구는 종이책으로 나는 ebook으로 읽었다. 읽는 방식 만큼이나 책에 대한 해석도 각자 달랐다.]

초격차에 인쇄된 문자는 모두 똑같이 리더십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직원과 중간 관리자, 그리고 작은 스타트업의 대표인 내게 모두 다르게 다가왔다. 똑같은 글도 사람마다 이렇게 다르게 닿는구나. 모르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이렇게 밀도있게 생각을 나눈 게 처음이라 굉장히 놀라웠다. 내가 쓰는 이 글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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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15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모두 약속이나 한것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앞에 있는 당신을 조금 더 알고 싶고, 당신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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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4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낯선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몇 시간 동안 한 가지 주제로 이야기한다. 정답은 없다. 서로가 만든 결과물을 존중하고 애정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는 경험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영하 10도를 넘는 추운 날씨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공간은 따듯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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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좋은 이야기만 했으니 조금 더 냉정해져보자. 사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지적인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유니콘에 가깝다. 트레바리는 절대로 당신의 모든 갈증을 풀어줄 만능키가 되지 못 한다. 20만 원의 돈과 고작 4번의 만남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눈앞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는 건 욕심이고 환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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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리는 피곤하고 혼자는 외롭다.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을 보고 거기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혼자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책을 읽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일. 너와 내가 같지도 그렇다고 많이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트레바리 모임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사람이 모이는 일이 모두 완벽할 순 없다. 하지만 100점이 아니더라도 80점, 90점이 되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한 달에 한 번의 만남, 한 권의 책이라는 느슨함과 여백을 제외한 400자의 독후감을 쓰는 성의는 좋은 모임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렇게 좋은 시스템이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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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작 한 번의 모임이었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이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는지. 혹은 참여한 멤버들이 “나 독서모임 해”라는 말 대신 “나 트레바리 해”라고 말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잘 짜인 판 위에서 적당한 온기와 호기심을 갖고 나눈 대화는 밀도 높고 의미있었다.

모임이 끝나자 이상할 만큼 아쉬웠다. 몇몇 사람들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삼삼오오 모여 사라졌다. 내 마음속 우물의 물이 반짝. 조금씩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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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