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책을 읽다 아이스크림을 흘렸다

어린 시절의 에디터 기은은 다독가였다. 도서관 사서에게 과자를 얻어먹고 독후감 대회 출전을 권유받는 아이였으니 뻔질나게 책과 함께한 것은 분명하다. 도서관에서...
어린 시절의 에디터 기은은 다독가였다. 도서관 사서에게 과자를 얻어먹고 독후감 대회 출전을…

2018. 07. 26

어린 시절의 에디터 기은은 다독가였다. 도서관 사서에게 과자를 얻어먹고 독후감 대회 출전을 권유받는 아이였으니 뻔질나게 책과 함께한 것은 분명하다. 도서관에서 인기 있는 책은 언제나 대기가 길었다. 겨우 내 차례가 와 대여하면 종이 위 얼룩진 커피 자국이 가슴을 후벼팠다. 더러운 책들은 반납할 때쯤 더욱 더러워져서 자리로 돌아갔다. 왜냐고? 어린 시절의 내가 늘 우유와 과자를 옆에 두고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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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더럽히곤 한다. 커피 얼룩을 남기고, 여름밤엔 아이스크림까지 흘린다. 울상이 된 페이지를 닦아내며 상상한다. 젖지 않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금방 포기하고 만다. 제법 어른스럽게 시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나 말고 그런 책을 원하는 사람이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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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짠, 하고 젖지 않는 워터프루프책이 등장했다. 민음사가 익히 인기 있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네 권을 워터프루프책으로 발간했다. <82년생 김지영>, <한국이 싫어서>, <보건교사 안은영>, <해가 지는 곳으로>가 방수 버전으로 나왔다. 물놀이 가기 딱 좋은 계절에 말이다! 투명한 PVC 파우치 안에 책이 들어있는 모습부터 물속에 풍덩 담그고 싶어진다.

이 버전은 오리지널 버전보다 딱 2,000원 비쌀 뿐이다. 띠용, 이게 가능한 거였나요? 궁금해졌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어떤 순간에 젖지 않는다는 신비로운 책을 읽으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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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용도를 상상해봤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어울릴 것이다. 수영장에 놀러 가 선베드에 누워 젖은 손으로 페이지를 넘겨도 좋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읽어도 좋다. 여행지에서 책 읽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겐 참 로망 같은 얘기다. 종이 젖을 걱정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책은 물과 상극이라 배웠는데 말이다!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해가 지는 곳으로’의 책장을 슬쩍 펼쳐보았다. 종이를 살펴보려고 한 건데, 재밌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수영장에서 정독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가락, 발가락이 쭈글쭈글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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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을 위해 한 권의 책을 둘로 분권했다. 한 번에 읽으면 온몸이 쭈글쭈글해질 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워낙 얇기 때문에 물 위에서 읽어도 부담 없으며,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다. 누워서 들고 봐도 손목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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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심하고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읽어봤다.

“볼펜을 보니 글자를 쓰고 싶었다. 낙서를 하고 편지를 쓰고 싶었다. 책을 보니 문장을 읽고 싶었다. 입안에서 오랫동안 한 문장 한 문장 녹여 삼키고 싶었다. 얇은 책을 들고 반들반들한 표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제목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아무 곳이나 펼쳤다.” – <해가 지는 곳으로>

해가 지는 곳으로를 읽으며 내 감정과 닮은 문장이 있어 소개한다. 이 워터프루프책도 반들반들한 표지에 얇은 두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쓰다듬기도 했다. 제지의 촉감은 보드랍다. 매끈매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살이 닿았을 때 착 붙는 보들보들한 재질이다.

제목을 오래 곱씹어 본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어떤 마음에서 나온 제목일까 추측하며. 이 책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져 폐허가 된 세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다.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섬세하게 표현되는데, 가장 눈길이 가는 사랑은 두 소녀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다.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각자의 감정이 진지해 각 잡고 보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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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보다 아이스크림을 흘렸다. 사실 흘려도 된다는 마음으로 일부러 흘렸다. 녹아내린 체리맛 아이스크림이 책장 위에 흘러내렸다. 자유로워진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하다. 물티슈로 닦아내니 변색하나 없이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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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에 친구들과 호캉스를 갈 예정인데, 멋진 호텔의 멋진 욕조에 누워 괜시리 담갔다 뺐다 하면서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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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닦으면 다시 멀쩡한 내 책으로 돌아오겠지. 문득 새로운 걱정거리도 덜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 올 때 우산이 없으면 가방을 머리에 올리곤 하는데 그때 이 책이 들어있다면 우산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가방에 책이 있어 젖을 걱정하는 것보단 낫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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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STONE PAPER, 미네랄 페이퍼 소재로 만들어졌다는데 이번에 처음 만들어낸 소재는 아니었다. 익히 쓰이고 있던 소재로 대중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물에 젖지 않는 노트, 카탈로그의 용도로도 사용하던 소재인데 이렇게 화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선 대리석의 향기가 난다. 좀 더 유추하기 쉽게 말하자면 민트향과 흙 향기도 난다. 알고 보니 미네랄 페이퍼의 원료가 대리석 채석장에서 버려지는 돌가루였다. 대리석 향기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슈가파우더가 발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가루와 소량의 결합재를 합쳤다는 데 넘기는 경험이 재밌다. “책은 넘기는 손맛”이라 외치는 반()전자책파에게(?) 환호받을 것 같은 손맛이다.

제조 과정에서 물을 사용하지도 않고 버려질 때도 일반 종이처럼 분해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친환경 소재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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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적시고 말리고. 모든 행위가 재밌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기분]

사실 물에 닿은 후 혹시나 찢어질까 두려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소재 자체가 질겨서 잘 찢기지 않는다. 호기심에 찢어봤는데 안 찢어진다. 찢기지 않고 늘어나더라. 물방울이 닿으면 또르르 굴러가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그렇진 않았다. 그랬으면 귀여워했을 텐데, 아쉽. 스며드는 듯 안 스며들면서 물먹은 종이처럼 보였다. 잘 말리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혹시나 불안해서 말하는 건데 젖어도 된다고 너무 막 굴리진 않았으면 한다. 얘도 결국은 훼손되는 물에 강한 아이일 뿐이다. 괴롭히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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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본도 실로 엮어 만들었다. 독립출판물같은 묘미가 있달까? 실제본한 책들은 소박해 보이면서 정성 있어 보이고 유니크한 느낌이 들어 좋다. 오리지널 버전이 하드커버인데 반해 워터프루프북은 커버가 말랑해서 넘길 때 편하다. 프린팅도 깔끔하다. 글씨가 번지거나 흐릿하지 않다.

오이뮤 / OIMU®(@oimu_)님의 공유 게시물님,

책 제작은 오이뮤가 맡았다. 성냥갑 디자인이 너무 예뻐 늘 훔쳐보던 디자인회사였는데, 이렇게 예쁜 책을 만들어 내다니. 어쩐지 오이뮤에서 자주 쓰는 컬러로 표지가 나왔더라. 특유의 깔끔한 디자인이 ‘워터프루프’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 ‘워터프루프’라는 실용적인 키워드는 왠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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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으로 좋아하는 디자인 링크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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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리지널 디자인 뒷 커버에 인용됐던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가 사라진 부분은 좀 아쉽다. 책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문구인데 생략됐다. 아쉬움에 새로운 명대사를 첨부한다.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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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선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오리지널 버전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워터프루프버전도 구매할 것으로 보인다. 워터프루프 버전을 먼저 읽은 난 오리지널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당장 서점에 달려가 사 왔다. 그러니 반대도 거뜬히 가능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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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에게 젖지 않는 책이 필요할까 고민하다가 새로운 포인트를 발견했다. 손에 다한증 있어 워터프루프 책을 갖고 싶다는 사람이 있더라. 맙소사, 생각조차 못 했던 블루오션이 이곳에 있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그러니 이 얄팍한 책과 함께 다양한 순간을 상상해보자. 물과 맥주와 햇빛과 책 한 권이 있는 그런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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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은

새로운 서비스와 플랫폼을 소개하는 프리랜스 에디터. 글과 영상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