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사계절의 하룻밤

나는 호텔을 좋아한다. 그곳은 철저히 비일상의 영역이다.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새하얀 침대 시트와 푹신한 침구, 갓 살균된 향기. 하드보안관이...
나는 호텔을 좋아한다. 그곳은 철저히 비일상의 영역이다.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새하얀…

2018. 01. 15

나는 호텔을 좋아한다. 그곳은 철저히 비일상의 영역이다.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새하얀 침대 시트와 푹신한 침구, 갓 살균된 향기. 하드보안관이 깔린 윈도우처럼 새로운 객이 들 때마다 모든 게 새로 정렬되는 낯섦 또한 좋다. 심지어 나태함이 미덕이 되는 장소가 아닌가.

물론 호텔을 찾는 사연은 저마다 제각각이겠다. 최근 몇 년을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녔다. 공간에 대한 경험도 좋은 리뷰가 될 것 같아 짬짬이 글을 모아볼까 한다.

새해엔 일주일의 휴가를 가졌지만,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야 했다. 그래서 가장 익숙한 도시에서 하룻밤의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요즘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호캉스’‘스테이케이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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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광화문의 포시즌스 서울. 기자 간담회나 인터뷰때 가본 적은 있지만 객실 예약은 처음이다. ‘포시즌스 호텔 앤 리조트’는 1961년에 시작되어 현재 38개국에서 92개의 호텔을 운영하는 럭셔리 브랜드다. 흔히 ‘6성급 호텔’이라 부르는 곳 중 하나인데, 사실 한국관광공사가 공식적으로 호텔을 분류하는 기준은 5성급을 최고로 한다. 다만, 일반적인 5성급 호텔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에서 덧붙이는 타이틀이다. 콘래드, 반얀트리, 파크 하얏트 등이 이런 럭셔리 호텔에 속한다. 물론 통상적인 5성급도 충분히 좋은 호텔이다. 전국의 5성급 호텔이 고작 38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서비스나 시설면에서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했다는 얘기니까. 심지어 이 등급 심사는 3년 주기로 이뤄지기 때문에 5성급 호텔이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굴욕적인 일도 있다더라. 호텔 등급을 무궁화 꽃잎으로 따지던 시절 보다는 훨씬 엄격해졌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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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설명이 길어졌다. 이제 에디터H의 휴가를 엿볼 차례다. 어쨌든 나는 6성급 호텔을 예약했고, 나름대로 크게 지른 하룻밤이었다. 포시즌스 웹사이트에서 ‘익스피리언스 모어’ 패키지를 예약했다. 조식과 10만원의 호텔 크레딧이 포함된 패키지라 꽤 쏠쏠했다. 디럭스보다 조금 더 넓은 프리미어 룸을 선택했고 결제 금액은 49만원 정도였다.

IMG_4700_o0[사진 속 공간은 예전에 머물렀던 팔로알토 포시즌스 호텔이다]

무리해서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하나였다. 예전에 실리콘밸리 팔로알토의 포시즌스 호텔이 묵었던 적이 있는데,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아주 좋았기 때문.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서비스나 디테일이 훌륭했다. 이것이 미국 부자들의 삶인가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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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시즌스 서울은 2015년 가을에 오픈한 새 건물이다. 호텔 중에서는 아주 어린 편(?)에 속한다. 내부에 위치한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금주법 시대의 비밀스러운 느낌을 살린 찰스.H 바, 바버샵 등이 모두 화제가 되어 왔다. 콘텐츠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지은지 얼마 안된 호텔의 특혜는 말끔한 룸컨디션이다. 비교적 밝은 컬러의 카펫을 깔았는데도 뽀송뽀송 깨끗하다. 기분이 좋다.

cq5dam.web.1280.720[이건 파리 포시즌스. 물론 에펠탑을 보고 눈치채셨을 거라 짐작한다]

파리의 포시즌스는 에펠탑 옆에 자리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선 그 유명한 붉은 광장 옆에 자리를 잡았고 말이다. 어느 도시에서든 상징이 될 만한 입지를 차지한단 뜻이다. 광화문은 그런 의미에서 적합한 장소다. 서울의 심장같은 곳이니까. 로비부터 곳곳에 ‘한국의 정서’를 표현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오래된 것들을 고루하지 않게, 세련되게 풀어낸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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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류에서도 동양적인 정서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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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아주 넓다. 서울에 있는 호텔 중에 가장 객실이 넓은 편이다. 서울 시내에 있는 호텔은 스위트룸을 예약하지 않고서야 대부분 답답한 기분이 드는데, 탁 트인 통유리 창문이나 널찍한 공간이 유쾌한 첫 인상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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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과 벽이 병풍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시원스러운 뷰를 제공하면서도 지나치게 노출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절묘한 설계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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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도 좋다. 버튼 식으로 샤워기 조작이 간편하다는 것도 가산점. 해외 출장에서 호텔 샤워기를 조작법을 몰라 욕조에서 머리를 감았던 슬픈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고마운 요소다. 절대 내가 바보라 그런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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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사소한 요소인데, 세면대의 컵에 멋스러운 홈이 패여 있어 손으로 잡기 편하다는 게 좋았다. 호텔에서 물 묻은 손으로 미끄러운 컵을 잡았다가 놓쳐서 깨트린 경험도 있으니까. 이것도 내가 바보라 그런 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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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니티는 로렌조 비로레시. 바디 크림이 꽤 좋았다. 어메니티는 평소에 써보지 않은 제품을 기분 좋게 테스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다, 호텔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아이템이라 꼼꼼히 써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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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내엔 전통 도자기와 목단 서랍장이 장식돼 있고, 그 밑으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아이패드가 설치되어 있다. 이거야 말로 전통과 기술의 조화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비치된 아이패드를 살펴본다. 대부분의 객실 서비스를 아이패드에서 바로 요청할 수 있다. 심지어 룸서비스까지. 먹고 싶은 메뉴를 장바구니에 담고 원하는 시간에 예약하면 누군가가 마치 요정처럼 갖다준다. 굳이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깔끔하다. 한편으론 살풍경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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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호텔은 인테리어나 서비스는 훌륭해도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머리맡에 스마트폰 충전기를 꽂을 곳이 없거나, 콘센트가 턱없이 부족해 화장실 콘센트까지 쓰게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포시즌스 서울은 그런 면에서 정말 자애로웠다. 다양한 국가의 플러그를 모두 꽂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위치 선정도 훌륭하다. 침대 좌우에도 손이 닿기 쉬운 위치에 콘센트가 있어 아이폰을 옆에 끼고 잠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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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사무용 책상에 노트북을 두고 바로 HDMI 케이블을 연결해 객실 TV 화면으로 송출할 수 있다. 컨시어지에 HDMI 케이블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작은 서랍 안에 HDMI 케이블을 비롯한 온갖 선과 문구류를 준비해두었다. 놀라운 센스다.

와이파이 속도엔 큰 아쉬움을 표한다. 요즘은 어지간한 비즈니스급 호텔에서도 무료로 초고속 인터넷을 제공하는데, 포시즌스는 인터넷 상품을 나눠놨더라. 속도가 너무 느려서 확인해봤더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와이파이엔 속도 제한이 걸려있다.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다면 하루에 2만원의 추가요금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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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휴식공간과 완벽히 분리되는 데스크 설계가 매력적이다. 쉬러 와서 괜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객실에 비치된 네스프레소를 한 잔 내려마시고, 잠시 맥북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해외 출장지에서 일하고 있는 느낌이 젖어든다. 나 자신이 너무 멋있는 것 같아서 커피만 마셨는데 셀프뽕에 취할 것 같다. 지금 막 커피를 내린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객실에 작은 쿠키가 하나 배달됐다. 부드럽고 맛있다. 좋은 타이밍이고, 좋은 디테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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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가 참 좋았다. 포시즌스의 장점은 매트리스를 푹신한 정도에 따라 3단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그냥 보통 수준으로 부탁했다. 처음에 누웠을 땐 “아, 더 푹신한 게 좋은데… 별로야…”라고 생각했는데 밤에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녹아들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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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처럼의 휴가라 샴페인을 사갈 요량으로 예약 후에 “객실에 샴페인 잔을 미리 준비해달라”고 부탁해뒀다. 특별히 축하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호텔에서 케이크도 함께 준비해주겠다고 한다. 공짜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일렁거린다. 실제로 체크인해보니 아름다운 초콜릿 무스 케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필요하다고 말한 샴페인잔은 챙기는 걸 까먹은 것 같았지만. 재밌는 사실은 서비스로 제공된 이 케익이 호텔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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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를 몇 번 터치해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새벽 내내 주문할 수 있는 오버나이트 메뉴가 따로 있다는 게 특징. 포시즌스 서울 내에 있는 레스토랑의 메뉴도 이용할 수 있다. 가격은 예상보다 합리적인 수준. 파스타 메뉴는 3만원 내로 주문할 수 있다. 링귀니에 연어 스테이크를 함께 주문했다. 원하는 시간을 지정해두면 그 시간에 음식을 가져다준다. 한 송이 생화를 곁들인 정갈한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객실이 넓은 덕에 테이블이 들어와도 북적거리지 않아서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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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솔직히 그냥 그랬다. 너무 평범해서 먹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서비스는 훌륭했다. 직원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정하게 들어와 눈치껏 객실을 살피고 테이블을 설치할 위치를 묻는다. 식사가 섭섭해서 새벽에 간단한 음식을 더 주문했는데, 이때는 영화를 보고있었더니 TV 앞에 테이블을 놔주더라. 테이블 정리 역시 아이패드로 예약해두면 제시간에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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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전망을 기대했는데 객실 배정이 아쉬웠다. 광화문 교보타워 사거리가 내다보이는 시티뷰였는데, 내가 묵었던 방은 시티뷰라기 보다는 ‘갤럭시뷰’에 가까웠다. 바로 앞에 삼성 갤럭시 전광판이 있어서 밤새 내게 푸른색 빔을 쏴댔다. 블라인드를 치려다 희미한 도시 불빛이 내다보이는게 좋아서 그냥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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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호텔을 가르는 건 단순히 인테리어는 아니다. 요즘은 모텔들도 화려한 인테리어를 내세우곤 하니까. 결국 서비스가 주는 경험, 콘텐츠의 문제다. 은은한 미소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서비스도 좋았고, 굳이 필요한 걸 요구하지 않아도 객실에 대부분 준비되어 있는 치밀함도 좋았다. 게다가 포시즌스 호텔은 콘텐츠가 실로 풍부하다. 누군가에게 서울을 각인하고자 하면 이 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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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인근에서 4년 넘게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씁쓸한 기억만 잔뜩 남아있는 도심을 내다보면서 기분이 남달랐던 이유다. 26층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다르더라. 서울의 사람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이 안에선 모든 게 느긋하다.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휴식이었다. 오늘 리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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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