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초보 시계 리뷰어 이주형입니다. 50주년이라고 하면 다른 분야에서는 “정말 오래 있었구나” 느낌이 듭니다. 하다못해 애플도 아직 50주년이 안 됐으니까요. 하지만 시계로 넘어오면 얘기가 다릅니다. 작년에 오메가 씨마스터는 라인업 75주년을 맞이했고(오메가 자체는 1848년에 설립했으니 175년이 넘었습니다), 작년 스와치와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 콜라보를 내놓았던 블랑팡은 내년이면 창립 290주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와 산업에 끼친 영향력의 크기는 무관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다뤄볼 브랜드 카시오가 그렇습니다. 카시오는 시계 마니아들에게도 인정받는 몇 안 되는 가성비 브랜드 중 하나로, 웬만한 시계 수집가라면 카시오 시계 하나쯤은 컬렉션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1974년에 첫 손목시계를 내놓은 뒤로, 꾸준히 가성비 좋은 제품을 출시하며 손목시계라는 아이템을 대중화한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카시오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손목시계는 모두가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손목시계는 기계식이 기본이었거든요. 배터리 대신 메인스프링을 통해 동력을 공급받은 다음, 다양한 작은 기어들이 촘촘히 맞물리면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설계된 시계가 기계식 시계입니다. 당시로서는 일일이 수제작을 할 수밖에 없는 고급 물건이었고, 몇 년마다 시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작동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인 오버홀을 해야 했기에 구매와 관리 비용도 상당해서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걸 깬 게 바로 쿼츠 기술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배터리로 시계를 구동한다는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실험되고 있었지만, 기계식 무브먼트에 동력만 배터리로 바꾸는 등 완전한 전자식 무브먼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연찮게 석영 수정에 전압을 가하면 규칙적인 진동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회로를 통해 이 진동을 잘 조정하면 시간을 잴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쿼츠 시계가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는 세이코가 1969년에 내놓은 아스트론이었죠.
쿼츠 시계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정과 배터리를 회로와 IC칩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라 수백 개의 부품이 맞물려 있는 기계식 시계 무브먼트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시계를 만들 수 있었고, 그만큼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제조 난이도 또한 낮아지니 기계식 무브먼트의 기술이 없어서 손목시계를 못 만들던 회사도 케이스나 다이얼 제작 기술만 있다면 쉽게 손목시계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일로 인해 기계식 시계 판매에 의존하던 많은 브랜드가 줄줄이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쿼츠 파동’이라고 합니다.
카시오는 이러한 쿼츠 파동의 수혜자 중 하나입니다. 지금에야 지샥을 대표로 한 손목시계로 유명하지만 당시만 해도 계산기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브랜드였습니다. 카시오는 계산기를 만들던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손목시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고, 매달 마지막 날을 자동으로 계산해 날짜를 넘겨주는 오토매틱 캘린더 기능을 처음으로 도입한 손목시계 ‘카시오트론’을 1974년에 출시했습니다. 지금에야 만 원도 안 하는 탁상시계에도 들어가는 기능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월이 31일로 끝나지 않으면 매월 1일마다 날짜를 조정해 줘야 했거든요. 심지어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윤년까지도 알아서 계산할 수 있었죠. 첫 손목시계부터 기술 혁신이라니, 뭔가 카시오답습니다.
그 이후 카시오는 1983년에 뭘 해도 망가지지 않는 시계의 대명사인 지샥을 만들었고, 카시오는 지금도 많은 시계 덕후들이 인정하는 저렴하고도 강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시계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시계 시장 진출 50주년을 맞아 카시오에서 특별한 시계를 선보였습니다. 바로 카시오의 첫 시계 카시오트론을 거의 그대로 복각한 한정판 카시오트론(모델명 TRN-50-2A)입니다. 전 세계에 4,000점이 풀렸고, 우리나라에서도 판매했는데, 개시하자마자 대부분 지역에서 완판된 모델입니다. 어렵게 입수해 사용해 봤습니다.
50년 전에 출시된 첫 카시오트론과 거의 똑같은 모습입니다. 카시오에 따르면 높이와 케이스 폭 모두 똑같이 맞췄다고 할 정도로 50년 전 카시오트론의 느낌을 똑같이 재현했습니다. 다만 두께는 조금 얇아졌고, 하나만 있던 버튼은 네 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카시오트론의 디자인이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보였지만, 50년 전의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했다 보니 이제는 레트로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특히 디스플레이 주변부에 둘러진 빛나는 톱니식 베젤 같은 디자인 요소는 이제 보면 좀 촌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계의 목표가 기존의 카시오트론을 복각하는 것이었던 만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보단 당시의 디자인에 충실한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전반적인 마감은 웬만한 카시오 시계에서는 보기 힘든 폴리싱 수준을 보여줍니다. 카시오답지 않은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난다고나 할까요. 캐주얼 정장과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케이스백은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케이스백을 통해 전파 수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가운데 로고는 역시 50년 전 카시오트론에 적용했던 로고(당시 카시오 본사 건물을 위에서 바라본 모습을 본뜬 로고라고 합니다)를 그대로 가져왔고, 그 주변에는 시계가 가진 기능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이 얘기는 이따가 해보겠습니다.
가운데에는 파란 다이얼 테두리에 둘러싸인 카시오 시계의 상징과 같은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보입니다. 디스플레이는 미네랄 글라스로 덮여 있습니다. 이 정도 가격의 시계면 훨씬 흠집에 강한 사파이어 글라스를 쓸 법도 한데 그 부분은 아쉽긴 합니다. 디스플레이 크기는 지샥에서 볼 수 있는 LCD보다 작지만 가독성이 좋은 STN 디스플레이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지샥에서도 풀메탈 스퀘어 등 고급 기종에만 달아주는 LCD입니다. 거기에 오리지널 모델에는 없었던 LED 백라이트도 장착돼 있습니다. 화면 배치는 기존 카시오트론과 디자인의 궤는 같지만 좀 더 기능이 추가된 모습을 보입니다. 초와 날짜를 보여주고, 요일과 초 디스플레이를 겸했던 가운데 표시등은 이 시계가 가진 다양한 기능들의 작동 여부를 표시해 주는 표시등으로 재활용되었습니다.
이 다양한 기능들이 카시오의 지난 50년 역사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듯합니다. 카시오가 지난 50년의 시간 동안 개발한 기술들이 모두 적용됐으니까요. 세계시간, 알람, 스톱워치, 타이머 기능은 요즘 카시오 시계에서 빠지면 섭섭한 기능들이고, 여기에 터프 솔라 기술은 주광을 동력원으로 활용해 시계를 상시 충전해 줄 수 있습니다. 다이얼에서 디스플레이를 둘러싸고 있는 파란색 부분이 바로 소형 태양 전지판으로, 여기를 통해 빛을 흡수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원리입니다. 배터리를 갈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셈입니다.
멀티밴드 6은 일본과 미국, 유럽, 중국에 있는 여섯 개의 전파 송신국에서 시간 정보를 받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 있는 전파 송신국에서 신호를 수신할 수 있죠. 유리로 된 케이스백은 바로 이 정보를 받는 안테나를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블루투스 연동 기능도 있습니다. 비록 많은 지샥 마니아들이 블루투스는 필요 없는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저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멀티밴드 6 신호가 닿지 않는 곳에 있다면 하루에 한 번 블루투스를 통해 기지국에서 정확한 시간 정보를 받아오는 스마트폰과 시간을 동기화할 수 있고, 세계시간 설정이나 알람 설정 등을 스마트폰에서 관리해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없어도 쓰는 데 지장은 없지만, 있으면 상당히 편합니다. 특히 제가 사는 집은 멀티밴드 6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서 블루투스로 스마트폰 시간 정보를 받아오는 게 더 빠릅니다. 또한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도 로밍으로 스마트폰 시간이 잡히는 대로 다시 시간을 맞춰주면 시계를 따로 조작할 필요 없이 현지 시간으로 바로 조정됩니다. 거기에 세계시간 기능까지 합쳐져 여행과 출장에 최적인 시계가 되죠.
사실 이 기능이나 풀메탈 디자인은 모두 일명 ‘풀메탈 지샥 스퀘어’라 불리는 GMW-B5000 시리즈 모델들에서 구현된 기능들이고, 저도 GMW-B5000 시리즈 모델을 두 점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GMW-B5000 시리즈는 지샥 수준의 내구성을 풀메탈에서 구현하려고 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시계가 두텁고 무겁습니다. 그나마 가벼운 소재인 티타늄이나 탄소섬유로 만들어진 모델들도 있지만 이 모델들은 비싸기도 비쌀뿐더러(작년에 공개된 탄소섬유 모델은 가격이 웬만한 기계식 시계 가격 수준인 270만 원을 넘습니다), 저같이 얇은 손목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커 보이는 편입니다. 카시오트론의 의의는 바로 저 같은 얇은 손목을 가진 사람들, 혹은 지샥이 자신의 패션과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카시오의 최신 기술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위에 언급한 대로 4,000점 한정으로 출시된 50주년 카시오트론의 가격은 71만 5,000원으로, 카시오 시계치고는 고가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거기에 위에 말한 미네랄 글라스를 차용한 점이나, 방수가 50m밖에 되지 않아서 가성비가 좋지는 않다는 의견도 많죠. 하지만 이 시계는 카시오 시계의 역사를 하나로 모아 놓은,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그 역사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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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백수가 되었지만, 백수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디터이자 팟캐스터. IT가 메인이지만 관심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 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