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파리에서 인사드리는 HAE입니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오히려 한국 본토에서보다도 K문화의 글로벌 인기를 더 생생하게 실감하게 되는데요. 매달 프랑스 곳곳에서 열리는 K팝 파티부터 오가는 길에 쉽게 발견하게 되는 코리안 카페, 최신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까지 한국인으로서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들이 있죠. 그중에도 패션 에디터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아무래도 해외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 브랜드를 마주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오늘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디자이너 브랜드, 메종 김해김, 레지나 표, 그리고 아더 에러에 대한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메종 김해김 MAISON KIMHĒKIM
지난해 파리 패션위크를 뜨겁게 달군 브랜드가 있었죠. 바로 김인태 디자이너의 메종 김해김입니다. 특히 2023 F/W 시즌에 선보인 전위적인 쇼가 SNS상에서 크게 바이럴 되었는데요.
맨몸에 진주 장식만 걸친 모델이 조심스레 런웨이를 걸어 나옵니다. 그녀의 아슬아슬한 발걸음으로 쇼장의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순간, 어디선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해 진주 장식을 끊어버리죠. 엮여 있던 진주의 알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쇼를 관람한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2016년 파리에서 론칭한 메종 김해김은 매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꾸뛰르 쇼를 선보이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브랜드를 시작하고 고작 한 시즌 만에 파리의상협회(FHCM)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현재 파리 패션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임은 틀림없죠.
여기서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길 궁금증, 브랜드명이 정말 김해 김씨(金海 金氏)를 뜻하는 걸까요? 이에 대한 디자이너의 대답은 Yes! 처음 파리에 왔을 때부터 본인을 ‘김해 가문의 김 씨’라고 소개한 이후로 ‘김해김’으로 불려 왔다고 합니다. 브랜드 이름으로서는 본관인 금관 가야(金官伽倻)의 유산이 깃든 의상을 선보이겠다는 의미를 담았죠.
유학 시절 김인태 디자이너는 프랑스 3대 의상 학교 중 하나인 스튜디오 베르소에서 여성복은 물론 남성복, 아동복까지 두루 섭렵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발렌시아가 원단 관리팀 인턴에 지원했는데요. 될 성 싶은 나무는 역시 떡잎부터 알아보는 걸까요? 그의 비범함을 일찍이 눈여겨본 면접관 덕분에 곧장 발렌시아가 컬렉션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하죠. 덕분에 현 루이비통의 CD이자 당시 발렌시아가의 CD였던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함께 꾸뛰르 의상을 제작하는 경험을 쌓았습니다.
김해김의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미니멀하고 구조적인 실루엣에 진주, 리본, 머리카락, 라벨 등의 디테일이 예상을 벗어나는 부분에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난해 말 공개된 2024 Spring 컬렉션에서도 이와 같은 김해김 디자인의 특성이 잘 드러나죠. 여기에 소매 부분이 과장된 퍼프 슬리브와 바디 라인을 강조한 코르셋의 대조 등은 이번 시즌만의 색다른 분위기를 더해줬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음양을 상징하는 블랙과 화이트 색상만 사용되기도 했는데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모노톤의 컬렉션이지만, 다채로운 아이디어 덕분에 룩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컬렉션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메종 김해김에서는 한국의 고대 왕실이라는 키워드도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척 모던해 보이는 의상들이지만 그 속에서 한국적인 요소들도 찾아볼 수 있죠. 어린 시절 김인태 디자이너는 할머니가 직접 짓던 한복 저고리나 치마를 인형 사이즈로 따라 만들어 놀곤 했다는데요. 한복 전통 옷감인 오간자나 실크에 대한 남다른 그의 애착을 컬렉션에서도 엿볼 수 있답니다.
현재 메종 김해김은 서울의 삼청동과 청담동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브랜드의 철학과 독특한 미학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김인태 디자이너는 자신의 영역을 패션으로만 한정 지을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가 있는데요. 향수, 코스메틱, 가구, 인테리어 소품부터 음악이나 연극 등 브랜드의 확장 방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앞으로 메종 김해김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릴 놀라게 해줄까요?
레지나 표 REJINA PYO
파리에 도착해서 갤러리 라파예트를 구경하던 중 예상치 못한 순간 낯익은 라벨을 발견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쥬(Maje), 자딕앤볼테르(Zadig & Voltaire) 등과 같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와 나란히 놓여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 디자이너의 브랜드, 바로 레지나 표였죠.
레지나 표는 2014년 런던에서 표지영 디자이너가 런칭한 브랜드입니다.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했던 세인트 마틴에서의 졸업 컬렉션이 네덜란드 보이만스 반 뵈닝겐 뮤지엄(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에서의 단독 전시로 이어진 것을 시작으로, 2016과 2017년에는 영국 패션협회가 선정한 10대 디자이너로 선정되며 주목을 받았고, 2019년에는 런던 패션 어워즈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전 세계 유명 백화점과 편집숍 등 120여 개의 온 오프라인 매장에 판매되며 글로벌 디자이너 브랜드로서 톡톡히 자리매김하고 있죠.
레지나 표의 디자인은 우아하면서도 조형적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실루엣과 밝고 대담한 컬러 조합, 짝이 맞지 않는 단추와 같이 디테일에 변주를 준 포인트 등으로 특징지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두 일상생활에서도 쉽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사실이죠.
표지영 디자이너는 이전 인터뷰에서 ‘보여주기 위한 옷이 아니라 입는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힌 적이 있었는데요. 이는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이자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동시에 엄마이기도 한 표지영 디자이너 스스로가 입고 싶은 옷을 디자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흔히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타자로서 존재하는 ‘뮤즈’의 개념을 거부하고, 디자이너 본인이 자신이 만든 옷을 입는 한 명의 고객으로서 디자인하죠.
레지나 표의 2017 S/S 컬렉션에서는 런던 패션 위크 최초로 다양한 체형을 가진 일반인 모델을 런웨이 위에 올려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레지나 표의 옷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럭셔리 패션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소신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H&M 그룹의 SPA 브랜드 앤 아더 스토리즈(& Other Stories)와 함께 했던 콜라보레이션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표지영 디자이너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에 대해서도 고민이 깊습니다. 이것은 레지나 표가 매 시즌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덜 사되 좋은 걸 살 필요가 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레지나 표는 기본적으로 오가닉 천연 소재 혹은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여 유행 상관없이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 튼튼한 제품을 추구합니다. 레지나 표의 지속가능성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가꾸어 나가는 데도 힘쓰고 있죠.
표지영 디자이너는 앞으로 패션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되는 레지나 표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요. 특히 런던 소호에 위치한 레지나 표의 스토어에서는 그녀가 직접 참여한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도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미 2015년에는 영국인 요리사 남편과 함께 ‘우리의 한식 부엌(Our Korean Kitchen)’이라는 책을 낸 이력도 있죠. 현재는 홈웨어 및 화장품 콜라보레이션에 대해서도 논의 중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요, 앞으로 레지나 표의 제품으로 집안 전체를 꾸밀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요?
아더에러 ADER ERROR
대학생 시절 부담 없이 구입했던 푸른 로고의 티셔츠 브랜드가, 어느 순간 핫 플레이스가 되어 줄을 서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을 목격하였다가, 이제는 해외 친구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되는 기분은 어떨지 짐작이 가시나요? 모두 제가 아더 에러를 통해 겪은 일화인데요. 때문에 아더 에러를 대하는 제 심경은 사뭇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가 막 설립되었던 2014년부터 지금까지 브랜드의 흥미진진한 성장 스토리를 지켜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앞서 살펴본 메종 김해김과 레지나 표와는 달리 아더 에러를 설립한 디자이너나 창업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브랜드인 만큼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이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는데요. 유일한 단서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던 4명의 친구들이 합심해 브랜드를 런칭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도 아더 에러는 인테리어 디자인, 패션, 건축 등 다양한 전공자로 구성된 크루를 통해 컬렉션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를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패션을 기반으로 한 문화 커뮤니케이션 브랜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더 에러는 ‘But near missed things’이라는 브랜드 슬로건 아래,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작업을 주로 선보입니다. 특히 지난해 공개한 아더 에러의 첫 번째 스니커즈 컬렉션 “Log”에서 이들만의 독특한 미감과 실험 정신을 제대로 보여줬죠.
아더 에러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콜라보레이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밀라노의 편집숍 10꼬르소 꼬모부터 푸마, 컨버스, 버켄스탁은 물론, 케이스티파이, 헬리녹스, 베어브릭 등 장르를 불문한 전 세계 유명 브랜드와 협업하며 글로벌 인지도를 확장해 나갔죠.
특히 프랑스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메종키츠네(MAISON KITSUNÉ)와는 2018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협업 컬렉션을 선보여왔습니다. 모던한 럭셔리 캐주얼을 지향하는 메종 키츠네의 아이템에 아더 에러만의 예상치 못한 뒤틀기로 포인트를 더한 것이 특징이죠.
2021년과 2022년에는 글로벌 SPA 브랜드 자라와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아더 에러를 상징하는 푸른 컬러의 사용부터 다양한 패브릭이 결합된 패치워크, 디스트로이드 디테일 등 데일리 룩에 재미를 더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군의 아이템들이 눈에 띄는데요. 특이하게 몰입형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디지털화된 제품들을 함께 선보이기도 했답니다.
가장 최근에는 주얼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와 ‘포 올 젬마’라는 협업 컬렉션을 선보이며 브랜드의 저변을 더욱 넓히기도 했죠. 포근한 윈터 액세서리로 구성된 이번 컬렉션의 캠페인 사진을 살펴보면 스와로브스키가 이렇게까지 힙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과연 아더 에러와의 협업을 원하는 브랜드가 끊이질 않는 이유가 있네요!
아더 에러 하면 공간 브랜딩을 빼놓을 수 없죠. 현재 서울에는 ‘아더 스페이스’라고 불리는 플래그십 스토어 4곳이 운영되고 있는데요. 우주를 컨셉으로 한 초현실적인 미디어 및 설치 작품으로 꾸며진 이 공간에서는 아더 에러만의 독특한 브랜드 철학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로 공간 브랜딩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죠. 아더 스페이스는 이러한 트렌드에 선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언젠가 이곳 파리에도 아더 에러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About Author
HAE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하는 에디터. 내면에 락 스피릿을 간직한 미니멀리스트. 내세울 숟가락 색깔은 없어도 글 쓰는 펜수저 만큼은 대대로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