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파리에서 글 쓰는 HAE 입니다. 패션 콘텐츠를 보다 보면 ‘크리에이티브 디텍터’ 혹은 이것의 줄임말인 ‘CD’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죠. 한 브랜드의 CD가 바뀌었다는 것은 패션지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커다란 이슈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패션 하우스의 전체적인 디자인과 미학을 다듬는 사람을 아티스틱 디렉터(Artistci Director)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맡게 되는 역할이 점점 다양해져 의상 디자인뿐 아니라 패션 하우스의 전체적인 비전부터 커뮤니케이션 방식, 심지어는 모델이나 앰베서더의 선정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을 부르는 새로운 호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riector)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죠. 오늘은 현재 패션계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리, 킴 존스, 그리고 미우치아 프라다의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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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 Daniel Lee
최근 화려한 복귀로 또 한 번 신화를 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에 대한 이야길 전해드렸는데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빈자리를 채우듯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죠. 2018년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CD로 부임하며 ‘뉴 보테가’의 시대를 열었던 인물, 다니엘 리입니다.
다니엘 리는 피비 파일로가 지휘하는 셀린느에서 디렉터 경험이 있는 ‘파일로 키즈’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피비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꼭 닮은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실용적인 디자인, 탁월한 감도로 보테가 베네타를 가장 트렌디한 브랜드의 반열에 올려놓았죠. 이를 통해 다니엘 리는 2019 영국 패션 어워즈에서 무려 네 개 분야의 상을 휩쓸며 자타 공인 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토마스 마이어(Tomas Maier)가 이끌던 보테가 베네타는 사실 ‘트렌드’보다는 ‘전통’과 ‘장인 정신’을 내세우던 브랜드였는데요. 다니엘 리는 ‘보테가 그린’ 색상을 제안하며 젊은 감각을 불어넣기 시작합니다. 또 과감하게 확대한 ‘인트레치아노’ 패턴과 보테가의 ‘V’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시그니처를 선보이며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죠. SNS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파우치 백’과 ‘카세트 백’, ‘리도 뮬’ 등의 히트작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21년 보테가 베네타와 결별한 다니엘 리는 최근 버버리의 새 CD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달라진 버버리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곳은 브랜드의 인스타그램이었습니다. 버버리의 헤리티지인 체크 패턴의 다채로운 변주과 ‘나이트 블루(Knight Blue)’로 불리는 새로운 시그니처 컬러, 그리고 승마 기사 모양의 과거 버버리 프로섬 로고의 부활이 눈에 띄었죠.
지난 2월 런던 패션 위크에서 선보인 다니엘 리의 첫 버버리 쇼는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이 됩니다. 이전에 보테가의 인트레치아노 기법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은 것처럼, 이번에도 버버리의 체크 패턴의 컬러와 크기, 방향 등에 변화를 주며 니트 톱, 스커트, 타이츠를 비롯한 다양한 아이템에 적용시켰죠. 한편 다니엘 리는 현재 버버리의 가방 라인에 주력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과연 이번에는 어떤 히트템을 탄생시킬지 기대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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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존스 Kim Jones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누굴까요? 루이비통, 디올, 펜디부터 알렉산더 맥퀸, 슈프림, 앰부시, 알릭스 등 일일이 나열하기에도 벅찰 만큼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한 워커홀릭, 킴 존스입니다. 현재 디올 맨과 펜디의 여성복 CD 직을 겸하고 있는 그는 일 년에 각 브랜드에서만 약 10개의 컬렉션, 자그마치 총 20 여개의 컬렉션을 총괄하고 있죠.
‘킹 존스’ 아니, 킴 존스는 럭셔리 남성복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곤 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2012년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은 이후였습니다. 럭셔리 메종의 섬세한 테일러링에 스트릿 스타일 요소를 더해, 전에 없던 패션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 것이죠. 나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열풍의 문을 열기도 했는데요. 특히 2017년 슈프림과의 전례 없던 협업을 시작으로, 프라그먼트 디자인, 캐피탈, 크리스토퍼 네메스 등과 함께하며 럭셔리와 스트릿 패션을 아우르는 엄청난 팬덤을 형성했습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킴 존스는 2002년 본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하는데요, 이때부터 그만의 스포티하면서도 격식 있는 스타일(Sporty dressiness)로 주목을 받습니다. 2008년에는 영국의 클래식 남성복 브랜드 던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하며, 한결 산뜻하게 브랜드의 분위기를 바꿔놓았죠.
현재 킴 존스는 디올 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고 있는데요. 2019년 봄에 열린 데뷔 쇼에서 팝 아티스트 카우스(KAWS)와 함께한 컬렉션을 선보이며 화려한 시작을 예고했죠. 그는 디올의 로맨틱 감성에 스포티 디테일을 더해 힙해진 디자인으로 MZ 소비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습니다.
물론 버켄스탁, 트래비스 스콧의 캑터스 잭 등 다채로운 브랜드와의 끊이지 콜라보레이션도 그 인기에 한몫을 했죠. 특히 에어 조던과 함께한 ‘에어 디올’은 지금까지 스트릿 스니커즈의 전설적인 아이템으로 여겨집니다.
2020년에는 칼 라거펠트가 죽기 직전까지, 장장 54년간 지휘했던 펜디 하우스의 후임 CD로도 부임합니다. 이로써 그의 손이 이번에는 여성복의 영역까지 뻗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용성을 갖추면서도 재밌고 쿨한 여성복을 제안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죠. 브랜드의 오랜 전통과 든든한 장인 정신을 등에 업은 그는, 킴 존스 표 펜디 아카이브를 탄탄히 쌓아가고 있는데요. 패션계 마당발인 그가 이곳에서는 또 어떤 협업을 가져와 줄지도 궁금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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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치아 프라다 Miuccia Prada
아찔한 플리츠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얇은 이너를 겹겹이 쌓아 올린 레이어링 스타일, 여기에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올드 머니 룩까지. 모두 근 1-2년 사이 SNS에서 가장 하입했던 패션 트렌드였는데요. 이들을 가장 먼저 런웨이에서 제안한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아셨나요? 게다가 무려 약 45년 동안 패션에 공헌하고 있는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하죠. 그 이름도 화려한 미우치아 프라다입니다.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그녀는 브랜드를 설립한 프라다 가문 출신의 여성입니다. 지금이야 프라다가 영화 속에서도 상징적인 존재로 언급되고, 모두가 선망하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지만, 시작은 고급 가죽 제품을 판매하는 작은 매장이었다고 하죠. 세계 대전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가 1970년에는 파산 직전에 놓이기도 했던 이 가족 기업을 현재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미우치아 프라다입니다.
1985년 프라다의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투입된 그녀가 처음 선보인 것이 포코노 나일론 백입니다. 포코노 나일론은 그저 가죽 트렁크를 포장하기 위해 사용되던 소재였죠. 하지만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 가볍고 기능적인 포코노 나일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고, 이를 활용해 지금까지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백을 만들어 냅니다. 2019년부터는 ‘리나일론(Re-Nylon)’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기존 나일론 제품을 모두 재활용 나일론(에코닐)로 재탄생시킨 라인이죠.
프라다가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뛰어든 것은 1988년 여성복 라인을 론칭하면서부터입니다. 세컨 레이블인 미우미우는 5년 뒤인 1993년 파리 패션 위크에서 첫 선을 보이죠. 두 브랜드를 통해 그녀는 90년대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견인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 보아도 놀랍도록 세련된 룩들이죠!
4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컬렉션을 선보였지만, 그녀가 한결같이 지켜오고 있는 디자인 철학이 있습니다. 심플함과 실용성, 그리고 이질적인 요소 간의 믹스 매치죠. 젊은 시절 그녀는 정치 학도로서 여성 인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디자인은 여성의 주체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단순히 예쁘게 보이는 옷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니까요!
오늘날과 같이 공간 브랜딩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기 전부터, 미우치아 프라다는 브랜드만의 색다른 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시작은 2001년 뉴욕 소호 거리에 문을 연 에픽센터입니다. 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거대한 커브 형태의 스케이트보드 경기장의 구조인데요. 마치 설치미술과도 같은 이러한 인테리어는 프라다가 추구하는 미학을 효과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패션쇼나 전시회, 콘서트 등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는 무대로도 활용되었죠.
2020년 그녀는 또 한 번 대담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바로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라프 시몬스’를 영입한 것인데요. 럭셔리 메종의 CD 경력을 보유한 동시에 개인 레이블에서는 유스컬처와 서브컬처를 주로 다루던 그가, 미니멀리즘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프라다에 들어오면서 브랜드는 새로운 동력을 찾게 됩니다. 이렇듯 적절한 시기에 탁월한 안목으로 유능한 CD를 섭외한 미우치아 프라다의 판단 덕분에 브랜드는 현재 N 번째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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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하는 에디터. 내면에 락 스피릿을 간직한 미니멀리스트. 내세울 숟가락 색깔은 없어도 글 쓰는 펜수저 만큼은 대대로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