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IT 리뷰어이자 팟캐스터이면서 초보 시계 수집가이기도 한 이주형입니다.
스와치가 오메가와 콜라보해서 만든 문스와치가 출시한 지 1년 반이 흘렀습니다. 문스와치는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시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출시일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스와치를 처음 출시했던 명동 스와치 부티크에서 난 난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벌써 1년 반이 흘렀다는 게 더 놀랍기도 합니다.
문스와치는 스와치와 오메가 모두에게 큰 성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스와치는 단 8개월 만에 100만 점의 문스와치를 판매했으며, 더불어 문스와치가 기반으로 한 스피드마스터 문워치에 대한 판매량도 덩달아 증가했다고 합니다. 문스와치가 오메가의 인지도를 박살 낼 것이라는 일부 주장과는 다르게 시계와는 거리가 먼 젊은 층 등에게 오메가 브랜드 자체에 대한 인지도를 더 끌어올려준 셈입니다.
이렇게 문스와치가 스와치도 예상 못한 큰 성공을 거두고 나니 자연스럽게 스와치가 다음으로 협업하게 될 브랜드는 어디가 될지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오메가가 그랬듯 당연히 스와치 그룹 산하의 브랜드 중 하나와 다시 협업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그중 하나로 지목된 곳이 블랑팡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측은 9월 9일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라는 컬렉션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메가와 다르게 블랑팡은 시계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생소한 브랜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와 헤리티지 면에서는 오메가보다 여러모로 상위인 브랜드입니다. 블랑팡은 오메가보다 113년도 더 전인 1735년에 창립된 브랜드로, 중간에 폐업 없이 현재까지 계속 영업하고 있는 시계 브랜드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컬렉션이자 이번 협업 제품의 원본이 되는 피프티 패덤즈는 현대 다이버 시계의 시조로 불립니다. 다이버 시계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특성들이 몇 가지 떠오르는데, 이러한 개념들을 처음 정립한 시계가 피프티 패덤즈였습니다.
피프티 패덤즈의 기원에는 프랑스 해군과 당시 블랑팡의 CEO인 장-자크 피슈테르가 있습니다. 프랑스 해군 산하의 새로운 특수잠수부대를 창설한 봅 말루비에 대위는 부대원들이 차게 될 다이빙 시계를 발주하기 위해 여러 제조사들을 다니지만 당시는 툴워치보다는 드레스 워치가 더 유행이었던 시대여서 번번이 거절당합니다. 그때 취미로 다이빙을 하던 블랑팡의 CEO 피슈테르와 만나게 되죠.
피슈테르는 어느 날 수중에서 언제 입수를 했는지를 까먹고 잠수를 하다가 탱크 속 산소가 소진되어 죽을 뻔한 경험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피슈테르는 다이버 시계를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마침 블랑팡을 찾아온 말루비에 대위와 의기투합해서 만든 것이 바로 최초의 다이버 시계인 피프티 패덤즈인 셈입니다. “피프티 패덤즈”라는 이름도 수심을 계측하는 단위인 패덤(fathom)에서 따온 것으로, 50 패덤은 약 91m를 뜻합니다. 지금은 웬만한 스포츠 시계나 올라운더 시계면 100미터 방수는 기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91m를 버틴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이었죠.
먼저, 잠수 시간을 쉽게 측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분침에 맞춰서 회전을 하면 잠수 시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회전형 베젤을 탑재했습니다. 피슈테르가 잠수 시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서 죽을 뻔한 경험에서 나온 이 베젤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만 돌릴 수 있게 하여 물속에서 쉽게 회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용두를 지속적으로 돌려서 용두의 방수 실링 설계가 닳는 것을 막기 위해 시계를 흔드는 것만으로 동력이 충전되는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장착했습니다. 물론 방수 설계 자체는 피프티 패덤즈 이전의 시계들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시계들이 드레스 워치에 방수 성능을 강화한 물건에 불과했던 반면, 피프티 패덤즈는 처음부터 잠수를 하는 다이버들의 필요에 맞춰서 개발된 최초의 다이버 시계였던 것이죠.
그러한 피프티 패덤즈가 올해 70주년을 맞았습니다. 블랑팡도 7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한정판 모델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스와치와 콜라보하여 나름 특별한 방법으로 피프티 패덤즈의 70주년을 축하하는 셈입니다.
스와치의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는 크게 다섯 가지 모델로 구분됩니다. 각각의 모델은 5대양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각각의 대양의 심해에서 서식하는 갯민숭달팽이의 색을 본땄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입수한 태평양 모델을 보면, 태평양에서 서식하는 갯민숭달팽이인 Chromodoris Kuiteri(학명)의 색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달팽이의 모습은 케이스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델마다 소소한 차이는 그 외에도 또 있는데, 남극해와 북극해 모델은 다이얼 인덱스가 3, 6, 9, 12의 숫자 대신 원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좀 더 초기형 모델과 유사한 다이얼 레이아웃을 갖고 있고, 날짜창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 피프티 패덤즈의 역사에서 가져온 유명한 표식 두 가지를 박아 놓았는데, 남극해에는 실제로 작동한다고 하는 시계 내부에 습기가 침투했을 때 색이 변하는 표시 장치를, 그리고 북극해에는 시계 제조에 어떠한 방사성 물질도 쓰지 않았다는 “No Radiations” 마크를 새겼습니다. 이 마크는 20세기 중반의 시계들의 다이얼에서 야광을 내기 위해 라듐이라는 방사성 물질을 바른 적이 있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라듐이 치명적인 방사능을 내는 물질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죠.) 간단히 말해, 남극해와 북극해는 좀 더 초기형 모델에 가까운 빈티지의 맛을 가진 다이얼 배치를 가지고 있고, 그 외의 세 가지 모델은 현대의 피프티 패덤즈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케이스 자체는 동일합니다. 42.3mm의 직경에 14.4mm 두께, 그리고 48.0mm의 케이스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간 큰 편이기는 하나 스트랩을 체결하는 부위인 러그의 길이가 짧은 편이라 큰 손목이 아니어도 착용에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은 크기는 아니기 때문에 혹여나 직접 차시는 용도로 구매하신다면 스와치 부티크에서 한 번 실착은 해보시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케이스 재질은 바이오세라믹으로, 세라믹 70%에 피자마유로 만든 자연추출 플라스틱 30%를 섞은 신소재입니다. 이 소재가 시계 자체를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의견도 있긴 하나, 바이오세라믹 덕분에 무게도 상당히 가벼워지고, 다양한 색을 즐길 수도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스와치는 이 소재를 시계 케이스 자체뿐만 아니라 스트랩의 버클에도 사용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스트랩에 대한 얘기를 해보죠.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에는 나토 스트랩이 같이 제공됩니다. 솔직히 문스와치의 벨크로 스트랩은 썩 좋은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반적인 손목보다 훨씬 두꺼운 우주복 바깥에 차기 위해 만든 벨크로 스트랩을 구현한 건 좋은 취지였다고 생각하지만, 문스와치에 제공되는 벨크로 스트랩은 상당히 뻑뻑해서 착용감이 썩 좋진 않았거든요. 저도 문스와치를 사자마자 하는 일이 스트랩을 바꾸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의 나토 스트랩은 훨씬 고품질입니다. 재활용된 어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 스트랩은 너무 빳빳하지 않고 유연한 편이라 제 얇은 손목에도 착 감깁니다.
이 외에도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의 전반적 품질은 스와치가 문스와치의 품질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바이오세라믹이라는 재질의 한계상 묵직하지 않고 한없이 가볍기 때문에 차면 장난감 시계를 찬다는 느낌이 여전히 들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재질이나 QC 면에서는 훨씬 품질이 개선됐다는 점이 느껴졌습니다.
다이버 시계의 상징인 회전 베젤은 실제로 역방향 회전을 제대로 구현했으며, 커버 유리는 역시 문스와치 때 너무 쉽게 긁힌다는 비판을 받아들였는지 긁힘 방지 코팅을 추가했다고 합니다. 후면에는 무브먼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투명 케이스백을 적용하였으며, 이 케이스백은 흠집에 강한 사파이어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다이버 시계의 기원에 충실하도록 발광 물질도 핸즈와 인덱스, 그리고 다이빙 베젤에 모두 발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름에 충실하기 위해 50 패덤, 즉 91m 방수를 구현했습니다. 91m면 물에 완전히 잠겨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방수 성능으로, 거의 모든 환경에서 물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의 무브먼트 또한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부분입니다. 문스와치는 스와치의 일반적인 쿼츠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었습니다. 하지만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는 원판의 헤리티지에 맞게 기계식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채용했습니다. 실제로 블랑팡의 과거 간부 하나는 “앞으로 블랑팡에 쿼츠 무브먼트를 넣을 일은 없다”라고 못 박았는데, 이 말을 지킨 셈이기도 합니다.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에는 스와치의 전용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시스템51(SISTEM51)이 장착됩니다. 시스템51은 사상 최초로 모든 조립을 로봇이 할 수 있으며, 부품 수를 51개로 줄여서 제작 단가를 확연히 줄인 기계식 무브먼트입니다. 보통 손목시계에 들어가는 기계식 무브먼트는 매우 작은 부품이 수백 개에 달해서 조립 과정에 일부라도 사람이 무조건 관여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업적입니다. 거기다 태엽이 완전히 감긴 상황에서의 파워 리저브가 무려 90시간이고, 니바크론이라는 항자성 합금을 활용해 자성에도 대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무브먼트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오버홀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버홀은 기계식 무브먼트를 분해하여 닳았거나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고, 필요한 부분에는 윤활을 다시 한 후 조립해서 무브먼트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해주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수백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만큼 영구적으로 동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진행하는 것이죠.
그만큼 오버홀은 만들어진지 몇십 년이 지난 시계도 큰 오차와 고장 등의 문제 없이 동작하도록 해주는 중요한 단계인데, 시스템51은 무브먼트 구조와 공정의 특성상 이러한 오버홀이 불가능합니다. 즉, 무브먼트가 고장나 버리면 부분적인 수리가 안 되고, 통째로 교체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의 케이스도 91m의 방수 성능을 보장하기 위해 아예 밀봉돼 있어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시계를 통째로 교환해야 합니다. 스와치가 2년 보증을 하긴 하지만, 많은 시계들이 2년은 고사하고 오버홀 등을 통해 잘만 관리해 주면 몇십 년은 간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정은 많이 아쉽습니다. 하다못해 무브먼트라도 쉽게 교체할 수 있는 설계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정확히 이 부분 때문에 많은 시계 애호가들이 불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Second Watch (세컨드 워치)”라는 의미의 브랜드 이름을 가진 스와치는 예전부터 “고장 나면 교체한다”라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요즘 같이 환경 문제와 소비자의 자가수리의 권리 등 하나의 제품을 구매해서 오래 쓰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스와치의 이러한 정책은 40년 전 브랜드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특히 이러한 특별한 시계라면 그런 부분에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았을까요.
문스와치를 네 점이나 사 모은 저도 이 부분이 아쉽습니다. 문스와치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나마 쿼츠 시계이기 때문에 기계식보다는 고장 날 부분이 적어서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보다는 더 오래 찰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의 전반적인 품질은 올라갔는데, 극단적으로 말하면 작은 거 하나만 고장 나도 버려야 하는 무브먼트 때문에 555,000원이라는 가격이 현실적인가라는 고민이 들게 만드는 점이 아이러니랄까요.
저는 이런 콜라보의 취지 자체는 환영입니다. 특히 오메가보다 덜 알려진 블랑팡에게는 브랜드 인지도를 넓히기 위해 필요한 콜라보였을지도 모르죠. 다만 이런 콜라보를 통해 특별한 시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 특별함을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하고 싶은 소비자들의 마음도 알아줬으면 합니다. 환경에 좋은 건 덤이고요.
* 업데이트 (2023/10/27): 이 글이 발행된 이후 나온 일부 외신 보도에 따르면, 스와치 측에서 스쿠바 피프티 패덤즈에 탑재된 시스템51 무브먼트는 교체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후면 케이스백은 분리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무브먼트 교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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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테크에 대한 기사만 10년 넘게 쓴 글쟁이. 사실 그 외에도 관심있는 게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