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딥티크가 만든 종이 향, 로 파피에

직역하자면 종이의 물이다
직역하자면 종이의 물이다

2023. 04. 04

지난 3월 16일. 딥티크가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향수를 출시했다. 아 참,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아론이다. 마음이 급해서 인사도 건너뛸 뻔했네. 딥티크가 새로운 향을 내놓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많은 향수 덕후들과 딥티크 마니아들이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게다가, 이번 향수의 이름은 ‘로 파피에’. 직역하자면 종이의 물이다. 메인 콘셉트가 ‘종이’라니! ‘글’ 쓰고 ‘향’ 만드는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셈이잖아? 그리하여… 결국 로 파피에를 ‘오픈런’ 해버린 향덕이자 조향사인 나의 시향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 조향사님,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주기 싫으시군요?

1400_retouched_-2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로 파피에’. 종이의 물이란 뜻을 가진 이 향을 만든 조향사는 파브리스 펠레그린(Fabrice Pellegrin)이다. 조말론의 블랙베리 앤 베이를 비롯하여 다양한 향수를 만든 조향사인데, 딥티크에서는 도 손과 오 듀엘르, 그리고 오 로즈 퍼퓸 등을 조향했다. 딥티크에서 만든 대표적인 세 가지 향만 봐도 꽃향기와 달콤한 향을 잘 다루는 조향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게다가 파브리스 펠레그린은 향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그라스 지역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라스가 어디냐고? 프랑스에 위치한 지역으로 ‘세계 향수의 중심지’로 불리곤 한다. 이 곳에서 향수가 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금도 전 세계 향수 시장에 가장 많은 향수 원료를 납품하는 곳이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 <향수>의 배경지 또한 바로 그라스다.

1400_retouched_-18

그런 그라스에서 나고 자랐다? 완전 타고난 조향사 재질 아니냐고요. 외국에도 돌잡이가 있다면, 분명 향수나 바이알(향수 원료 등을 담는 병)을 잡았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대체 이번엔 또 어떤 멋진 향을 만들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향수 관련 사이트들과 딥티크 프랑스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포기된 노트부터 살펴봤다. 그런데… 탑, 미들, 라스트 구분도 없이 몇 가지 노트만 단순하게 적혀있었다. 머스크, 화이트 머스크, 미모사, 우디 노트. 그리고 스팀 라이스 노트.

1400_retouched_-13

노트 표기를 봤을 때 든 생각. ‘조향사님, 이 향수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주기 싫으시군요…?’ 머스크나 화이트 머스크, 우디 노트는 굉장히 광범위한 영역을 가진 노트들이기 때문에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스팀 라이스 노트는 또 뭐람. 결국 궁금증과 호기심을 잔뜩 부풀리기만 한 채로, 로 파피에를 만나게 되었다.


# 엄마, 향수에서 누룽지 냄새가 나….

1400_retouched_-6

‘로 파피에’의 첫 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오묘했다. 어려운 향은 아닌데 설명하려고 하면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복잡한 기분이 드는 향이었다. 보통 향수는 첫 향이 심플하고 시간이 갈수록 향이 다채롭게 바뀌는 것들이 많은 편인데 ‘로 파피에’는 달랐다. 종이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듯, 첫 향부터 복잡다단하고 임팩트가 크거든.

뿌린 직후부터 약간은 매캐한 향이 올라온다. 스모키한 느낌은 아니고, 가벼운 후추 향을 닮은 매캐함이다. 그래서인지 이 향을 맡고 딥티크의 다른 향수인 ‘플레르 드 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더라.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라이트한, 핑크 페퍼 정도의 향이 종이 질감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1400_retouched_-4

탑 노트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스팀 라이스 노트’다. 쌀내음, 밥 짓는 냄새, 고소한 냄새 등등. 맡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결은 같다. 나는 ‘누룽지 냄새’라는 표현이 가장 와 닿았다. 어떻게 이런 향을 만들어냈지? 가만히 맡고 있으면 아주 옅은 베이지의 컬러감이 절로 떠오른다. 마음이 스르륵 풀어지듯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 내가 한국인이라서일까. 외국인이라면 오트밀 우유 같은 향이라고 표현했을 것 같다.

1400_retouched_-1

그리고 숨어있긴 하지만, 비밀스럽게 무거운 물 내음이 깔려있다. 맑고 투명한 물 내음이 아니라, 짙으면서도 무게감이 있다. ‘로 파피에’의 홍보 문구를 보면 종이뿐만 아니라 잉크 냄새도 함께 강조 하던데. 잉크라고 생각하고 향을 맡으면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불호를 느끼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 같다.

뒤이어 풍겨오는 미모사 꽃향기를 배경으로, 옅은 베이지가 떠오르는 색감과 도톰한 두께감이 느껴지는 매캐함 그리고 푸근하고 부드러운 누룽지 냄새(…)가 섞이며 자연스레 종이의 이미지가 연상됐다. 종이가 콘셉트라고 해서 너무 어렵거나 올드하거나 부담스러운 향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접근하기 쉬운 예쁘장한 향이라 조금은 머쓱했을 정도다.


# 미모사 꽃 뒤에 숨겨진 향들

1400_retouched_-8

미들 노트로 갈수록 스팀 라이스 노트의 고소함과 숨겨진 물내음이 빠져나가면서 파우더리한 미모사 향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실 미모사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 접하는 꽃은 아니다. 최근 매장 디스플레이에서 자주 보이긴 하지만, 남의 매장을 꾸미고 있는 꽃에다가 코를 들이밀 수는 없잖아…. 그러니 미모사 향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 수밖에.

다행히도 나는 코로나 전, 일본 여행에서 꽃가게에 들렀다가 처음 미모사 향을 맡아봤다. 아주 작은 노랑 솜뭉치처럼 생긴 귀여운 꽃에서, 부드럽고 파우더리한 꽃향기가 달콤하게 풍겨왔다. 한국에서 접했던 그 어떤 꽃과도 다른 향이었다. 보송보송하면서도 둥근 질감의 향, 파우더리한 달달함, 안개처럼 밀도 높으면서도 하늘하늘 가벼운 무게감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파우더리한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모사의 향은 좋아한다. 텁텁하거나 코 끝이 답답한 기분이 들지 않는 자연스러운 파우더리함이거든.

본디 미모사 생화의 향은 굉장히 예쁘고, 그다지 무겁지 않다. 하지만 당연히 ‘로 파피에’ 속 미모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모사 향이 함께 느껴지는 우디와 머스크 노트들의 특정 부분들을 부스팅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1400_retouched_-9

전체적인 향을 고급스럽고 예쁘장하게 만들어주는 꽃향기 속에, 다채로운 우디 향이 뒤섞여 종이의 이미지를 확장해간다. 약간은 마른 건초 같은 베티버나 드라이한 우디인 시더 우드, 혹은 연필에서 심을 뺀 마른 나무 같은 뉘앙스의 우디 노트들이 꽤 가볍게 펼쳐진다.

그리고, 나에게는 표기된 노트에서 발견하지 못한 앰버 그리스 노트도 느껴졌다. 앰버 그리스는 한국어로 ‘용연향’. 원래 향유고래의 배설물에서 비롯된 향이다. (자연과 동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합성 향료로 그 향을 표현한다.) 몽환적이고 따뜻하면서도 부드럽고, 조금은 동물적인 뉘앙스가 있다.

1400_retouched_-15

내가 생각하는 앰버 그리스 노트는 ‘알게 모르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향’이다. 좋은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자꾸 생각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이 향을 메인으로 내세우면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비릿하거나 메탈릭한 느낌을 강하게 느낄 수 있고, 애니멀릭한 뉘앙스를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 파피에’에서는 이 향이 파우더리한 달콤함을 뒤집어쓰고(?) 너무나도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로 파피에’를 맡고 단번에 코쿵 당한 분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던데, 분명 이 시크릿 노트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 빈 종이에 적어 내려가는 것처럼

1400_retouched_-14

사실 향이 중반부로 갈 때부터 궁금했다. 이 많은 향들 중에 과연 어떤 게 마지막까지 남을까? 로 파피에에서 느껴지는 다채로운 우디 노트와 머스크 노트 중, 어떤 것이 잔향이 될까 흥미진진했다. 혹은 모든 게 뒤섞인 채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주변 지인들과 ‘로 파피에’를 함께 착향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누군가의 피부에서는 건조한 우디 향이, 누군가의 피부에서는 고소하고 뭉근한 내음이, 누군가의 피부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머스크와 앰버 그리스의 뉘앙스가…. 사람의 피부에 따라, 잔향에 다다를 수록 다른 방식으로 향이 전개됐다.

1400_retouched_-11

그제서야 조향사나 브랜드 측에서 ‘종이’라는 이미지 외에 다른 정보는 극히 제한하여 전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 파피에’의 향은 사람마다 가진 고유의 피부, 온도, 살성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추측 없이, 지레짐작 없이, 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결국 내 피부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건 꽃내음을 살짝 머금은 우유 같은 화이트 머스크 뉘앙스였다. 누군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면, 이 향을 분명 향수가 아닌 내 살내음으로 착각하게 할 그런 향이었다.

‘로 파피에’의 향을 만난 시간은, 마치 빈 종이에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내 살갗 위에 나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변화하는 향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어쩌면, 아니 조만간 딥티크에서 가장 사랑받는 향이 될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든다.

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