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맥시멀리스트 에디터B다. 잠시 1999년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나의 유년기를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하면 게임, 영화, 음악이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려는 엄마, 컴퓨터를 독점하려는 형에게 밀려 영화와 게임은 마음껏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만큼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음악 감상은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였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가 발매되면 레코드 샵에 가서 테이프 앨범을 샀다. 20세기는 CD와 테이프가 공존하던 시기였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에겐 테이프만 한 것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카세트테이프는 그때 그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아련한 물건이다.
그로부터 22년 후, KT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출시한다는 뉴스를 봤다.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왜? 뭐하러? 뭐 때문에? 뭘 위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브랜드 마케팅을 위해서였다. MZ세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란다. 신박한 제품을 만들어주니 고맙긴 한데, 그 전략이 효과적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각자 판단에 맡긴다.
이름은 KASSETTE, ‘카세트’라고 읽는다. Cassette의 C를 K로 바꾼 이유는 당연히 판매자가 KT이기 때문일 거다. 센스 있는 언어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런 이름은 검색에 불리하다. 한글로 적으면 일반명사와 다를 바 없어서 검색 결과만 혼탁해질 뿐이다. 시즌, 지니, 웨이브, 옥수수, 멜론 역시 마찬가지다. 합천군 멜론 소비 촉진 행사와 아침에 먹는 멜론의 건강 효과 6가지는 궁금하지 않다.
패키지는 고급스러운 편이다. 일회성으로 출시하는 이벤트성 상품 치고는 포장이 견고해 보이고, 대충 만들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주황색 끈을 잡아 올려 박스를 개봉하는 방식이다.
구성품은 크게 카세트 플레이어와 굿즈 두 가지. 아마 KT 카세트를 구매한 대부분은 굿즈 때문에 샀을 거다. 한정판으로 생산되는 아이즈원, EXO 백현 등 인기 아이돌의 굿즈가 듬뿍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포토 카드엔 큰 관심이 없고, 오로지 카세트 때문에 샀기 때문에 오늘 기사에서는 카세트만 다룰 예정이다.
제품은 이렇게 생겼다. 혹시 이 디자인을 보고 네 글자 외국인 이름이 떠오르지 않나? 아니면 세 글자 브랜드라거나. 바로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브라운’이다.
한쪽 면이 투명하게 비치는 커버, 하얀색 바디에 주황색, 검은색으로 포인트를 준 단순한 디자인을 보면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턴테이블 SK55가 떠오른다. 물론 자세히 뜯어 보면 그의 ‘Less, but better’ 정신을 완벽히 반영하지는 않았다. 로고 때문이다. 아마 디터 람스라면 왼쪽 상단에 들어간 로고를 앞쪽이 아닌 뒤쪽에 넣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더 작게 넣었을 거다. 실제로 디터 람스는 로고의 위치와 크기로 CEO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더라.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가진 수많은 제품이 나는 브라운이다! 라고 소치리는 모습을요. 그건 분명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할 거예요. 새로운 곳에서 자신을 소개해야 할 때, 소리치지 않잖아요. 조용히 말해야 합니다.” 영화 <디터 람스> 중
조작 버튼은 기기 상단에 있다. 엽산, 마그네슘 알약을 닮은 동글동글한 버튼이 귀엽다. 한 가지 신기한 버튼이 있는데, 바로 A/B 버튼이다. 버튼을 누르면 A에서 B면으로 바뀐다. 내가 어렸을 때 써본 카세트 플레이어에는 이런 신기한 기능이 없었다(대부분 저가 카세트 플레이어였던 것 같다). 덕분에 듣던 음악을 멈추고 카세트를 꺼내 반대로 끼우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 없다.
나머지 버튼은 기기 오른쪽에 있다. 위에서부터 이어폰 단자, 볼륨 조절 다이얼, 블루투스 연결 버튼, 블루투스 스피커/이어폰 전환 스위치 순이다. KT 카세트의 가장 큰 장점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나? 에어팟을 카세트 플레이어에 연결할 수 있다(KT 카세트가 최초는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아주 작은 화면도 없는 이 기기를 어떻게 이어폰에 연결할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스위치를 BT EAR로 옮긴 상태에서 블루투스 버튼을 3초가량 누르면 LED가 파란색으로 깜빡인다. 이때 연결하고 싶은 헤드폰에서도 블루투스 연결 버튼을 누르면 서로 연결된다. 하지만 음질은 기대하지 말자. 음…좋게 말해서 많이 레트로하다. 참고로 무선으로 연결한 상태에서 추가로 유선 이어폰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옆자리 친구와 동시에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재밌는 기능이 또 하나 있다. 자체 스피커가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에 연결해 블루투스 스피커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커 출력은 0.5W로 딱 귀여운 수준. 차라리 스마트폰으로 듣는 게 낫다. 물론 레트로와 저음질 사이의 묘한 음질을 원한다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충전식 리튬이온 배터리를 쓰지 않고, AA 배터리 2개를 쓴다. 그러니 지방 출장 갈 땐 여분의 배터리를 챙기도록 하자. 배터리가 15% 이하가 되면 블루투스 스위치 아래에 있는 LED가 빨간색으로 깜빡인다. 솔직히 이 카세트 플레이어는 한정판 기념품 또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역사에 남을 것 같은데, 배터리 부족 알림 같은 편리한 기능을 넣어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완성도 높은 디자인부터 무선 이어폰 연결,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카세트에 이 정도로 많은 기능이 들어갈 수 있다니, 나는 이 오래된 방식의 음향 기기에 더이상 바랄 게 없다. 아마도 이게 카세트의 최종 진화 버전이겠지.
KT 카세트의 가격은 11만 1,000원. KT Shop에서 판매했지만, 현재는 모두 품절되었다. 추가 제작 소식이 없기 때문에 이 한정판을 갖기 위해서는 당근을 흔들며 번개처럼 중고시장에서 발품을 팔아야 한다(하지만 매물이 별로 없더라).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KT 카세트는 카세트 플레이어와 굿즈로 구성되어 있는데, 굿즈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정말 짧게 소개하려고 한다.
테이프에 들어있는 음악은 KT와 여러 기획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앨범 <리와인드: 블러썸>이다. 요즘 인기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옛날 유행가가 수록되어 있다. 아이즈원이 부르는 ‘3! 4!’, EXO 백현과 NCT 도영이 부르는 ‘인형’, 유승우가 부르는 비 오는 거리 등이다.
총 여덟 곡의 노래는 음원으로도 들을 수 있지만, 테이프에는 특별하게 아이즈원의 소소한 토크가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가 있다. 이건 오직 테이프에서만 들을 수 있다. “Eyes on me! 안녕하세요 아이즈원입니다!”를 카세트로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위즈원에게는 뭉클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20년이 흘렀지만 유년기에 사 모은 테이프는 아직도 서랍장에 고스란히 있다. 오래된 물건을 보면 가끔 ‘토이 스토리’ 같은 상상을 해본다. ‘저 테이프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재생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가끔씩 감성에 젖어 옛날 노래 좀 들어볼까 싶다가도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제는 어엿한 카세트가 생겼으니 오늘은 유튜브 대신 보아 1집을 틀어놓고 인터넷 쇼핑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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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