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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수를 만드는 사람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매번 같은 말로 자기 소개를 했는데 말이지. 의아하진 않았나? 내가 쓴...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매번 같은 말로…

2020. 07. 20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매번 같은 말로 자기 소개를 했는데 말이지. 의아하진 않았나? 내가 쓴 걸 지금 읽고 있을테니 ‘글쓰는 사람’이란 건 알텐데, 대체 ‘향 만드는 사람’은 뭔가 싶을 수 있잖아. (신경도 안 썼다고? 그럴 수도 있겠네…)

향을 만드는 일을 ‘조향’이라고 하고, 조향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조향사’라고 한다. 맞다. 나는 조향사다. 동시에 프리랜서 에디터이기도 하고,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참. 그리고 직접 조향한 향으로 향수를 만드는, 향수 브랜드 ‘ahro(아로)’를 운영하고 있다. ‘향기를 영혼에 아로 새긴다’는 뜻에서 아로라는 이름을 지었다.

조향을 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레 ‘향수 공방’ 같은 걸 떠올린다. 장미 향, 백합 향, 그린티 향, 라즈베리 향… 그런 것들을 조합해서 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뭐, 처음에는 그런 것부터 배우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씨스 쓰리 헥세놀, 페닐 에틸 알코올, 씨트로넬올, 리날룰 같은 걸로 향료를 만든다. 물론 베르가못 오일이나 일랑일랑 오닐, 오렌지 에센스처럼 천연 향료도 있다.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걸 조합해서 꽃향기도 만들고 풀 내음도 만들고, 과일 냄새도 만든다. 깊이 들어와 보니 조향은 화학이었다. 하지만 천상 문과인 내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지….


[1]
예이, 프리-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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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의 첫 향수였던 ‘Yay, Free-sia!(예이, 프리-지아!)’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프리지아 향을 메인으로 한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꽃다발에 가장 자주 보이는 그 노란 꽃! 바로 그 꽃이 프리지아다. 개나리만큼 빨리 개화하고 여름이 다다를 때가지 쭉 피는데, 싱그러운 풀내음이 지배적이라 봄을 시작하는 꽃으로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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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프리지아를 고른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프리지아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 포함) 정말 많은데, 프리지아 생화의 향이 나는 향수를 찾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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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니치 향수 브랜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조말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잉글리쉬 페어 앤 프리지아’는 프리지아의 파릇파릇한 향보다 서양배의 달콤함이 더 중심적이라 아쉬웠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아쿠아 디 콜로니아 프리지아’는 꽃비누향 향수라는 애칭에 걸맞게 화사하고 부드러운 비누향이 매력적이지만, 프리지아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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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다면 내가 만든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조향은 완성까지 거의 1년이 넘게 걸렸다. 탑노트부터 그린함이 도드라지는 시트러스인 청귤이 느껴지도록 했다. 초록빛의 쌉쌀한 시트러스와 풀내음을 지나면 프리지아의 노란 꽃향기가 피어난다. 무겁거나 답답하지 않게, 맑은 느낌이 들도록 은방울꽃 향을 섞어가며 그린 노트가 쭉 이어지도록 조향했다. 마지막은 있는 듯 없는 듯 가벼운 화이트 머스크의 잔향으로 남는다.


[2]
니티 허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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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향수 ‘Knitty hug(니티 허그)’는 니트의 부드러운 향을 담았다. 고객 설문 조사를 진행했는데 꽤 많은 분들이 린넨 향, 섬유유연제 향, 코튼 향, 뭔가 부드럽고 편안한 그런 향…을 많이 선택하셨거든. 물론 거기 덧붙는 조건도 있었다. “흔하거나 뻔하지 않고 유니크한 향이요!” …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리지아 향을 조향할 때보다 더 많이 망했다! 1.5배쯤 더 실패하고 시간도 더 오래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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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은 단순히 후각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향에서 시각적, 촉각적, 더 나아가 공감각적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니티 허그를 조향할 때 특히 그 부분에 집중했다. 탑노트에서는 베르가못, 화이트 로즈와 함께 알데하이드 계열의 향료를 사용해 쨍한 느낌을 냈는데, 그걸 어떤 사람은 ‘햇볕에 바싹 마른 듯한’ 향으로 어떤 사람은 ‘겨울 바람에 코 끝이 시린’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외에도, 사람마다 다른, 다양한 감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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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 노트의 중심에는 코튼 플로럴 느낌의 하얗고 부드러운 꽃향기가 자리잡고 있다. 린넨처럼 가벼운 섬유보다는 더 도톰하고 푹신한 느낌을 더해 니트의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조향했다. 그리고 그 향이 실크같은 머스크의 느낌으로 이어지며, 향긋한 살냄새로 남는다. 니티 허그의 향은 중성적인데, 그건 바로 향 전반에 깔려있는 시더우드 덕분이다. 나무 냄새가 도드라지지 않아서 ‘정말 우디 노트가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향은 균형이니까. 숨겨놓은 향의 역할도 중요하다.


[3]
피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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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의 세번째 향수는 무화과를 메인으로 한 ‘Figment(피그먼트)’다. 부끄럽지만, 서른 살이 지나서야 무화과를 처음 먹어봤는데 충격적이었다. 까끌하고 쌉쌀한 껍질, 풍부한 과즙, 크리미하고 달콤한 속살, 안에 숨겨진 꽃과 씨에서 느껴지는 나무의 느낌까지! 단박에 반해버렸다. 하지만 시크하고 도시적인 무화과 향수(딥디크)도 있고, 상큼한 시트러스 무화과 향수(아쿠아 디 파르마)도 있는데, 내가 원하는 무화과 향수는 없었다. 무화과 맛, 진짜에 가까운 그 무화과 향…. 없으면 어떻게 한다?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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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과일을 메인으로 조향하는 건 쉽지 않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진짜 데인저러스하다는 건 아니고…. 과일향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식향(먹는 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주스, 아이스크림, 젤리, 사탕 등등으로 이미 다양한 익숙해져버린 다양한 과일향을 피해, ‘향수다운’, ‘향수로 쓰고 싶은’ 과일향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아서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화과는 향수로 만들기는 적합한 과일이지만, 막상 조향해보니 그 무게감과 질감 그리고 농도를 조절하는 게 까다로운 과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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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먼트를 조향하며 가장 신경쓴 부분은 탑노트였다. 뿌리는 순간, 화과를 베어물기 직전에 느끼는 그 까끌한 껍질 냄새가 가닿도록 그린 노트를 신경써서 고르고 조합했다. 살풋 풍기는 흙냄새도 매력적이다. 물론 중심은 무화과의 하얀 속살에서 느껴지는 크리미한 달콤함! 코코넛 향을 사용해서 무게감과 부드러움을 더했다. 잔향에서는 샌달 우드와 다양한 우디, 머스크 노트를 섞어 무화과 나무가 느껴질 수 있도록 조향했다.


[4]
라이크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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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향수는 얼마 전에 선보인 라일락 향의 ‘Like lilac(라이크 라일락)’이다. 프리지아 이후로 라일락 향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일 년에 만개하는 시기가 고작 2-3주 정도뿐이라, 모두에게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하는 향기인가보다. 나 또한 사계절 내내 라일락 향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 그걸 가능케 하는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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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라일락 향기는 묘하다. 바람결에 풍겨오면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인상적인데도, 방금 맡고 돌아서도 가물가물하고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는다. 다른 꽃들과 다르게, 꽃송이에 코를 박고 킁킁대도 멀리서 맡는 향기보다 더 짙거나 강하지 않다. 그래서 ‘물기 어린 바람에 실려오는’ 라일락 향을 중심으로 조향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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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노트부터 풀냄새와 함께 물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그린 노트와 워터리 노트를 조합했다. 워터리 노트 중 오이 냄새(!)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들은 배제하고, 바람결에 실려오는 물기어린 꽃향기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절했다. 라일락 향은 최대한 투명하고 부드럽고 은은하게. 거기에 장미향을 살짝 더해 달콤함을 더했다. 마지막은 캐시미어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머스크를 선택해서 라일락의 잔향이 끝까지 이어지도록 했다. 봄밤에 주변을 은은하게 맴도는 라일락 향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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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을 하다보면 매일매일이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다. 이마가 수천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올 수 있는 힘은 조향이 글쓰기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감과 감각으로 하는 멋진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엉덩이와 손이 엄청나게 고생하는 일.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반복해야하는 일. 아무도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만들어내고 싶어서 하게 되는 일. 아직 어디에도 없는 걸 0에서부터 쌓아올려, 세상에 꺼내 놓는 일.

끈기 없고 호기심 많고 빨리 불타는 만큼 빨리 식는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온 것은 딱 두가지. 글쓰기와 조향이다. 누군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하라고 한다. 나 또한 접점이 없어보이는 이 두가지를 함께 끌고가도 되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이제는 되묻는다. 왜 안돼? 글쓰며 향 만드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궁금하다면 앞으로도 기대해줘요. 만나줘요. 나의 다음 글을, 아로의 다음 향을.

P.S – 어디서 만나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아로 향수’를 검색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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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