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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다이어리] 비밀번호 찾기 질문을 고르세요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설정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당신의 보물 1호는?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설정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당신의 보물 1호는?

2017. 06. 03

H 다이어리
날짜 : 2017년 6월 4일
날씨 : 수퍼 맑음

세상엔 여러 클리셰가 있다. 나 어렸을 적 미스코리아의 꿈은 한결같이 세계평화였다. 나는 사자머리를 한 예쁜 언니들이 그토록 큰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에 비하면 내 꿈은 소박하고 보잘것없었다. 미미의 집을 갖는 것. 그게 당시 나의 소원이었으니까. 애당초 미스코리아가 될 그릇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나 어른이 된 나는 노트북 모니터 앞에서 세계평화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본다. 미스코리아들이 사자머리를 버리고, 파란 수영복을 포기하는 동안 세계평화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왜 세상 모든 웹사이트들은 각기 다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것인가. 이건 대체 몇 번째 회원가입인가.

리넨 스커트 한 벌을 사기 위해 새로운 쇼핑몰에 회원가입을 하면서 내 분노 게이지는 한없이 차올랐다. 요즘 같은 세상에 네이버 체크아웃도 지원하지 않는다니. 너무해. 하지만 이 스커트는 이 쇼핑몰에서만 파는걸. 어쩔 수 없지. 가입해보자. 비밀번호에 특수문자를 섞으라는 무리한 요구에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이 세계의 평화는 여전히 먼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이 너른 웹 세상을 하나의 아이디로 통일해준다면 노벨 평화상을 받을 것이다. 틀림없다.

내가 최초로 아이디를 만든 건 PC 통신 시절의 ‘천리안’이었다. 그 뒤로 다음 한메일, MSN, 버디버디… 수많은 서비스를 거치며 온갖 오그라드는 아이디를 만들어보았다. 몇 년의 네티즌 생활을 거쳐 결국엔 하나의 아이디로 통일되는 듯 싶었다. 비밀번호도 똑같았으니 헷갈릴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각 포털 사이트들은 1년 마다 비밀번호를 변경하라고 나를 달달 볶았고, 걸핏하면 해킹당했다며 사과문을 띄웠다. 나는 내 개인 정보가 탈탈 털리는 일보다 새로운 비밀번호에 적응하는 일이 더 괴로웠다.

정신을 차리니 엉망이었다. A 사이트는 내게 8자리의 비밀번호를 요구했고, B는 10자리의 비밀번호를 요구했으며, C는 영문과 특수문자를 섞어달라고 떼썼다. 평화로웠던 나의 패스워드 세계가 쑥대밭이 됐다. 자주 로그인하지 않는 웹사이트를 오랜만에 방문할 땐, 여러 비밀번호로 기웃대다가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였다.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으니 꺼지라나 뭐라나. 비밀번호 찾기의 과정도 실로 녹록지 않았다. 그중 가장 당황스러운 사례는 이거다.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설정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당신의 보물 1호는?”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질문에 답했을까. 보물 1호라니. 너무나 감성적인 질문이다. 당시 애인의 이름을 썼을지, 샤넬백이라고 썼을지, 정말 모르겠다. 비밀번호 찾기 질문에 몇 번 데인 후론 늘 같은 질문을 골랐다. 절대 변할리 없는 것들. “어릴 때 살던 동네는?” 같은 질문 말이다. 사실 보안 장치로서의 가치는 크게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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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 스커트를 사기 위한 여정에도 이 ‘질문’이 등장했다. 회원가입 과정에서 비밀번호 확인 질문을 설정해야 하는 사이트였다. 쭉 훑어보았다. 나의 단골 질문들이 보이지 않는다.

Q. 기억에 남는 추억의 장소는?
모르겠다.

Q. 자신의 인생 좌우명은?
없기도 없지만, 누가 이런 걸 설정한담. 한 글자라도 틀리면 비밀번호를 알 수 없는데.

Q.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성함은?
없다.

Q. 타인이 모르는 신체 비밀이 있다면?
진심이야??

Q. 받았던 선물 중 기억에 남는 독특한 선물은?
없다.

Q. 유년시절 가장 생각나는 친구 이름은?
갑자기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다.

Q. 인상 깊게 읽은 책 이름은?
인터뷰하는 것도 아닌데 책 한 권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

Q. 읽은 책 중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이하동문.

Q. 자신이 두 번째로 존경하는 인물은?
첫 번째도 모르겠는데 왜 두 번째를 물을까.

Q. 친구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어릴 적 별명이 있다면?
근데 그걸 왜 너에게… 공개해야 해요? ㅠㅠ

Q. 초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짝꿍 이름은?
노 메모리.

Q. 다시 태어나면 되고 싶은 것은?
철학적이기까지…

Q.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무례하다. 최애캐를 고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비밀번호 찾기용 질문을 고르지 못해 고심했다. 그나마 고른 것은 이 질문이다.

“추억하고 싶은 날짜가 있다면?”

네 자리 숫자로 딱 떨어질 수 있는 질문. 이 중에서는 가장 신빙성 높은 답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고민이 시작됐다. 추억하고 싶은 날짜. 딱 한 가지 날짜만 떠오른다. 이미 지나간 사람과의 시간이라 기념할 수 없는 날짜. 너무 오랫동안 곱씹어서 유일하게 잊혀지지 않는 날짜. 달리 답변할 날짜가 떠오르지 않아서, 씁쓸한 기분으로 초가을의 어느 날짜를 써넣는다.

회원가입은 무사히 마무리됐고, 사흘 만에 배달된 리넨 스커트는 내가 입으니 썩 예쁘지 않았다. 그대로 옷장 한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그 날짜처럼. 언제 또 그 쇼핑몰에 로그인할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비밀번호는 벌써 잘 기억나지 않는다. 8자리 였던가, 10자리 였던가 머리속에서 흐물흐물하게 숫자와 대문자, 소문자가 엉켜버렸다. 이 쇼핑몰에서 또 다른 싶은 스커트가 사고 싶어지는 날에는 그 곤란한 질문과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도 나는 똑같은 날을 떠올릴 수 있을까? 밤 바람이 썩 차지 않았고, 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휘청거리면서 길을 걸었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내가 했던 말들이 모두 선명하게 생각난다. 설마 언젠가는 이것마저 잊어버리게 될까?

지문이나 홍채인식으로 사용자를 식별하는 시대가 왔는데, 한 편에서는 여전히 내 기억을 캐묻는다. 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들쑤시고 들어오는 이 질문들이 불편하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기억에 비밀번호를 맡기는 것도 자꾸만 두렵다. 아니, 사실은 내 기억이 자꾸만 변하는 게 무섭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변해버렸음을 어김없이 마주해야 하니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