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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 취향] 겨드랑이에 이솝을 뿌렸다

더위가 시작될까 말까 하던 지난달, 재빠르게 쇼핑을 했다. 이 계절에 딱 맞는 구매였다. 고럼 고럼. 이솝 가로수길 매장에서 이 작은...
더위가 시작될까 말까 하던 지난달, 재빠르게 쇼핑을 했다. 이 계절에 딱 맞는…

2017. 05. 13

더위가 시작될까 말까 하던 지난달, 재빠르게 쇼핑을 했다. 이 계절에 딱 맞는 구매였다. 고럼 고럼. 이솝 가로수길 매장에서 이 작은 녀석을 결제하고 나오면서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콧노래를 불렀다.

아니 그래서 무엇을 샀냐고? 내 몸의 가장 음습한 곳에 뿌리는 것. 너의 이름은 데오드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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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에 꽤 민감한 사람이다. 향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다.

덥고 끈적이는 계절이 오면 잠시 향수를 내려놓는다. 무거운 건 딱 질색. 아무리 가벼운 향도 땀 냄새와 섞이면 역해진다. 여름엔 향수 대신 좋은 데오드란트를 쓰는것이 더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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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50ml 용량에 4만 1,000원. 안다. 향수도 아닌데 다소 사악한 가격이라는거. 패키지도 별거 없다. 그냥 갈색병이다. 가격 대비 분사력이 좋지도,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패키지도 아니다.

이솝 허벌 데오드란트는 로즈마리, 세이지, 모로칸, 네롤리 등 다섯 가지 에센셜 오일을 조합해 만든 천연 데오드란트다. 이솝은 숲에서 나는 향기를 사람 곁으로 불러들이는데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다. 어떤 느낌이냐면, 좋은 호텔의 파우더 룸에서 날 법한 향이랄까. 일반적인 화장품 브랜드에서 많이 사용하는 시트러스, 머스크, 플로랄 같은 향은 맡자마자 강렬하게 우리의 후각을 사로잡는다. 단숨에 느낄 수 있는 화려한 모습의 향이다. 반면 은은하고 상쾌한 풀 향기는 시간을 조금 두고 지켜봐야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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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요즘 이솝과 연애중이다. 이 쇼핑을 시작으로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자꾸만 기웃거린다. 데오드란트를 시작으로 몇 개의 제품을 더 샀다. 마라케시 향수는 찜콩을 해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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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의 작은 미용실에서 시작한 이솝(Aesop)은 창립자 데이스 파피티스가 <이솝 우화>를 좋아해서 따온 이름이다. 이름과 브랜드 철학의 상관 관계 같은걸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뚜렷한 건 나오지 않는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난데 없이 헤어 오일 제품의 이름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이솝의 창업자는 좀 괴팍한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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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퍼져있는 60개의 이솝 매장은 하나 같이 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가로수길 매장은 이솝 제품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나무 선반이, 여의도 ifc 매장은 천정부터 바닥까지 길게 뻗어있는 묵직한 벨벳 커튼이 포인트다. 모든 매장은 직영으로 운영되며 직원들은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 유난스러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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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에서 고객 등록을 하면 잊을 만할 때쯤 작은 선물이 날아든다. 샘플을 보내주는 건 흔하디 흔한 마케팅이지만, 이솝의 샘플은 쉽게 지나치기 힘들다. 손글씨로 쓴 편지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다. 직원들이 무슨죄야 싶지만, 내심 기쁘다. 별 걸 다 시키는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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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사면 아주 얇고 조금 까끌까끌한 에코백에 담아준다. 향기도 함께 따라온다. 마지막 순간에 직원에 에코백에 향수를 칙칙 뿌려주기 때문이다. 이 에코백은 여행갈 때 빛을 발한다. 속옷이나 양말 등을 담아가기 좋다.

이렇게 작은 터치가 더해지면 물건을 산다는 것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은 기꺼이 호갱의 길을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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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것은 겨땀과 액취를 잡아줄 데오드란트였지만, 내가 진짜 돈을 지불한건 이솝이란 브랜드가 가진 괴팍함이었다. 매일 아침 데오드란트를 뿌리면서 난 이솝을 입는다. 에디터H는 요즘 좋은 물건이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고 말한다. 맞다. 좋은 물건과 함께 하는 경험은 내 몸 가장 음습한 곳도 사랑하게 한다. 내 겨드랑이는 좋은 향기가 난다구! 곧 여름이다. 아마 이걸 다 뿌릴 때 쯤이면, 아직 오지 않은 여름도 조용히 물러난 뒤겠지?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