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H의 취향] 수건을 샀다

수건을 샀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건을 샀다. 매일 쓰는 물건인데 한 번도 내 손으로 직접 사본 일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수건을 샀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건을 샀다. 매일 쓰는 물건인데 한 번도 내…

2017. 04. 24

수건을 샀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건을 샀다. 매일 쓰는 물건인데 한 번도 내 손으로 직접 사본 일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식구 중 누구도 수건을 사본 적 없었다. 페이스북 피드를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다 우연히 본 로우로우(RAWROW)의 게시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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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월과 그림의 공통점은 걸어 놓는 것이다. 매일 보는 타월이 예쁜 그림 같으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만들었다.”

마음을 울리는 문구였다. 게다가 타이밍이 적절했다. 때마침 나는 변기 위에 앉아있었다.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앉아 있을 땐 수건 걸이와 마주보게 된다. 볼일을 보면서 습관적으로 수건의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다. 몰두할 것이 없는 사람의 시선은 의미없이 집요해진다. 수건에 인쇄된 희미해진 글씨나, 닳아버린 끝자락을 바라본다. 창립 50주년 기념, 체육대회 기념. 이미 지나간 시대의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건들이다. 너무 익숙해서 만지지 않아도 손에 닿는 느낌을 알 수 있다. 얄팍하고 까끌하다.

매일 이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예쁜 수건’을 볼 수 있다면, 꽤 의미있는 변화가 될 것 같았다. 변기 위에서 일어나기 전에 결제를 마쳤다. 화려하고 이색적인 디자인이 많았는데, 내 취향은 ‘Sleepless in Very Seoul’이라고 쓰인 시크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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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에 비해 커다란 상자에 담긴 수건이 도착했다. 파우치도 제법 깔끔했다. 수건걸이에 걸어놓고 사진도 찍었다. 엄마는 집에 수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왜 샀냐고 물었다. “엄마, 이건 예쁘잖아” 엄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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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꼼꼼히 살폈다. 앞뒤의 컬러가 다른 디자인 요소에 기분이 좋았다. 뒷면이 살짝 보이도록 걸어두면 더 예뻤다. 수건 끝에 달린 ‘송월’이란 택도 클래식한 멋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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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 역시 새로 산) 클렌저로 세수를 하고 새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깔끔한 사람들은 새 수건은 꼭 빨아서 사용한다던데, 나는 그 정도로 부지런하진 않다.

새 수건인데도 물기를 튕겨내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흡수한다. 제법 볼륨감이 있어서 푹신하다. 얼굴에 닿는 면은 아주 부드럽다. 자극적이지 않고, 물기를 제거하는 속도는 빠르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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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하나로 요란한 후기다. 나는 물건을 사고 난 뒤의 기분(굳이 따지자면 만족도라고 표현해도 되겠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똑같은 수건에 ‘동창회 기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거나, 엄마가 아무말 없이 화장실에 걸어둔 상태였다면 나는 지금같은 감동을 경험했을까?

이 타월로 세안 후의 물기를 닦아낼 때 받은 ‘좋은 느낌’은 수건 자체에서만 비롯된 건 아닐 것이다. 로우로우라는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 타월과 그림의 공통점은 걸어 놓는 것, 이라며 내 마음을 흔든 감각적인 카피. 디자이너들이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는 스토리. 나는 의미있고 세련된 소비를 했다는 스스로의 마인드 컨트롤까지. 수건이 내 얼굴에 닿기 전까지 많은 요소가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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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에 좋은 물건은 많다. 하지만 좋은 타이밍에, 좋은 콘텐츠로 일러주지 않는다면 그 물건의 ‘좋은 점’을 일일이 깨닫기는 어렵다. 나쁜 것은 목에 걸린 가시 같아서 금방 눈치 채게 되지만, 좋은 것은 내 몸에 꼭 맞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눈치 채기 어려운 법이니까.

나는 호텔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컨셉과 철학이 있는 호텔을 좋아하는데, 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공간은 머무는 이에게 근사한 경험이 된다. 미국에서 포시즌스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그 자체로 신이 났었다. 어메니티도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가방에 비누를 챙겨 넣으며 “역시”라는 말을 연발했다. 최고는 침구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묵직하게 반응하는 푹신함에 뇌가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만약 이 베개를 서울 어느 뒷골목의 모텔방에서 만났다면 나는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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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사는 건 즐거운 모험이다. 우리는 시간을 지불하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산다. 같은 돈을 냈다면 최고의 경험을 하고 싶다. 단순히 가성비를 따지고 싶다는 얘긴 아니다. 택배 박스를 뜯어내고 물건을 처음으로 손에 잡았을 때, 그 순간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마케팅’이다. 이 물건이 어떤 스토리와 디테일을 품고 있는지에 참신하게 속삭여줄 수 있는 마케팅이 필요하다. 잘 만든 물건과 스토리가 만나면 단추 하나에도 눈이 가고, 깔끔한 지퍼 마감에도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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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쁘지만 심심하며, 가난할 때도 탐욕스럽다. 행복한 소비는 인생의 양념이다. 셔츠는 인생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셔츠 소매의 스티치 하나 까지 완벽하고 정교하다는 만족감은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입을 때마다 소매 끝을 바라보며 행복해지겠지. 그러니까, 누군가는 속삭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뽐뿌가 오도록!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런 깨달음을 위해 쇼핑을 한다.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