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모두의 드로잉

나에겐 C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이따금 똑똑하지만 대체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정잡배다. 평소에 물고 뜯고 싸우다가도 나중엔 항상 그의 승리다....
나에겐 C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이따금 똑똑하지만 대체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정잡배다.…

2017. 04. 12

나에겐 C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이따금 똑똑하지만 대체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정잡배다. 평소에 물고 뜯고 싸우다가도 나중엔 항상 그의 승리다. 왜냐고? 비장의 카드가 있거든. 그는 궁지에 몰리면 이런 얘길 한다. “17살 때 찍은 사진이 어디 있더라?” 젠장.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그에게는 10년이 넘는 데이터가 있다. 데이터는 힘이고, 권력이다. 마치 구글처럼.

요즘엔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인공지능(AI)에 관심이 많다. 어설프게 여기저기 고개를 디밀어본다. 오늘 아침엔 토막 영어로 구글 어시스턴트와 30분의 깊은 대화를 나눴다. 재미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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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엔 구글의 인공지능 도구로 그림을 그렸다. 구글이 공개한 따끈따끈한 놀잇감 ‘오토드로우(AutoDraw)’다. 웹 기반의 서비스라 누구나 바로 접속해 사용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마우스로 그리든, 손가락으로 그리든, 애플펜슬로 그리든 그냥 대충 원하는 사물을 그리면 된다. 그런데 왜 인공지능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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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드로우’ 툴을 활성화한 상태에서 돛단배를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이 상상하는 돛단배의 실루엣은 뻔하다. 하단에 누운 반달 형태의 배를 그리고, 상단에 삼각형 돛을 달아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허접하지만 명백한 드로잉이다. 구글의 인공지능은 이 단순한 선의 연결이 ‘습관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알아챈다. 그리고 상단에 아이콘 형태로 드로잉을 추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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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런 허접한 돛단배를 단번에 알아보고 알맞은 것들을 추천해준다. 주로 앞에 뜨는 드로잉의 정확도가 높다. 내 의도와 가장 비슷한 형태의 드로잉을 선택하면 마법처럼 그림이 바뀐다. 짠!

오토드로우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몇 명의 일러스트레이터와 협업해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림을 그리기 위한 툴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툴에 가깝다. 사용자가 이 캔버스에 그려내는 선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진짜 그림을 소환하기 위한 ‘단축키’에 가깝다. 이런 드로잉은 생각보다 꽤 유용하다.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닌데, 업무상 간단한 일러스트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전문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매번 유료 일러스트를 구매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오토드로우’로 스마트폰 쇼핑을 나타내는 일러스트를 완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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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스마트폰을 그린다. 스마트폰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특징만 대충 묘사하면 된다. 직사각형 모양의 디스플레이, 홈버튼. 이 정도만 그려도 방대한 데이터의 구글 인공지능은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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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럴싸한 스마트폰 드로잉을 따 왔다. 이번엔 손가락을 그려보자. 피카소 뺨치는 나의 드로잉 솜씨가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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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터치를 갈망하는 손가락 일러스트를 선사했다. 이번엔 스마트폰 화면 안에 넣을 ‘쇼핑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손가락 위에 있는 다리미 같은 물건은 내가 ‘신발’을 그린 것이다. 못알아보겠다고? 여러분이 못알아봐도 상관 없다. 구글신이 알아봐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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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다음엔 가방. 그 다음엔 립스틱도 적당한 사이즈로 배치해준다. 그리고 채색까지 하면 짜잔! 누가 봐도 스마트폰 쇼핑 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탄생했다. 이 중에 실제로 내가 그린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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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영상도 찍어봤다. 나와 오토드로우가 합작해 만든 와펜 점퍼다. 입고 다니긴 힘들어 보이지만.

사실 오토드로우는 당장 어디든 써먹을 수 있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툴은 아니다. 불러온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는 기능이 현저히 부족하다. 지금 현재로서는 구글의 재미있는 인공지능 놀이터에 가까워보인다. 그들이 수집한 데이터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호기롭게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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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하다고? ‘퀵드로우‘라는 인공지능 테스트를 통해 연습하고, 학습하고 있더라. 20초 백일장과 같은 이 테스트는 정말로 흥미롭다. 구글이 ‘문어’라는 주제를 주면 나는 20초 안에 몇 개의 선으로 문어를 표현해야 한다. 20초 안에 인공지능이 알아맞출 수 있을 만큼 명료한 드로잉을 완성해야 성공. 크로커다일은 바닥에 붙은 껌처럼 그렸는데도 알아맞히더라. 형태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순서와 습관까지 학습한다는 얘기다. 그래, 과연, 데이터는 힘이고 권력이다.

드로잉은 내 취미 중 하나다. 나는 하얀 화면 위에 선을 그리는 스릴과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건 아니겠지. 자, 이제 여러분도 한 번 ‘모두를 위한 드로잉’에 도전해 보시길.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하다.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