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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에, 니모메

겨울이면 귤을 끼고 산다. 전기장판 켠 뜨끈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두 손이 노오랗게 변할 때까지 먹고, 또 먹고. 손톱을...
겨울이면 귤을 끼고 산다. 전기장판 켠 뜨끈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두…

2017. 04. 06

겨울이면 귤을 끼고 산다. 전기장판 켠 뜨끈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두 손이 노오랗게 변할 때까지 먹고, 또 먹고. 손톱을 세워 귤껍질을 찢으면 ‘푸쉬익’ 소리를 내며 상큼한 향이 공기 중에 퍼져나간다. 귤껍질을 까면 나오는 달고, 시고, 탱탱한 과육.

우리 주변엔 박제된 과일이 너무 많다. 직접 맛보고 즐기기보다는 인공적인 향에 더 익숙해진 과일들. 반면 귤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과일이다. 귤껍질을 까기 전 우리는 선물 포장을 뜯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된다 이번 귤은 달까, 실까. 같은 박스에 있어도 알알이 모두 다른 맛을 내니까. 귤은 우리에게 아직은 살아있는 맛이다. 이유는 귤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 맛이 너무 예민해서 가공을 하는 순간, 맛이 죽어버린다. 그래서 귤의 맛을 낸 많은 것들이 살아남지 못했다.

“혼저 옵서예”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역시 제주,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한라봉이 나를 반겼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귤, 그 귤로 만든 술이 나왔다고 해서 저 멀리 제주도를 찾았다. 봄과 제주도라니, 좋은 핑계였지.

“가고 싶은 양조장, 제주샘酒”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나를 무서워하던 멍뭉이. 나 나쁜 언니 아냐…]

제주공항에서 3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이곳 제주 애월읍 애원로 283번지에 위치한 제주샘주(酒). 사실 샘주의 술은 서울에서도 즐겨 마신다. 오메기떡으로 빚은 오메기술, 그리고 오메기술을 증류해서 만든 고소리술도 모두 훌륭하다. 샘주는 모두 지역과 전통을 잘 살리면서도, 지금 마셔도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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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고소리술병으로 만든 아기자기한 화분]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술의 기본은 좋은 물, 지하에서 끌어올린 물로 술을 빚는다]

이곳은 찾아가는 양조장이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들을 수 있고, 술의 원료가 되는 오메기떡을 빚는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다. 아, 그리고 샘주에서 만든 술을 시음해 볼수도 있다. 단순하게 술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술이 머무는 사랑방같은 공간이다.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니모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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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니모메. ‘너의 마음에’란 뜻의 제주도 사투리다. 니.모.메. 천천히 발음해 본다. 귀엽고 따듯한 이름이다. 니모메는 ‘귤술’이다. 아니 사실은 쌀을 발효해 만든 약주다. 여기에 감귤로 맛을 냈다. 알코올 도수는 11도. 귀엽다고 우습게 봤다간 큰코 다친다. 감귤주스 같은 맛이겠거니 섣불리 넘겨 짚는 것도 곤란하다. 훨씬 더 복합적인 맛을 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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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맛의 비밀은 과육이 아니라 껍질에 있다. 버려지고 함부로 다뤄지는 껍질이지만, 과일의 맛과 향은 껍질에 몰려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시트러스계열의 과일은 더욱더. 만약 레몬의 맛(향)을 내고 싶으면, 과육이 아니라 껍질을 넣어야 한다.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말린 귤의 껍질을 진피(陳皮)라 한다]

여기에 착안해 샘주는 귤의 껍질인 진피를 넣었다. 이 과정도 녹록지 않다. 귤의 쓴맛을 잡기 위해 많은 실험을 거쳐야했다. 귤 수확철에 귤껍질을 일일이 손으로 까고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말린다. 이렇게 말린 진피는 쌀과 효모 누룩과 함께 발효한다. 1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열흘간 천천히 저온숙성 과정을 거친다. 물은 지하에서 제주도 지하수를, 쌀도 그 귀하다는 제주도 산을 썼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제주의 자연과 마음을 담아 빚은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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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좋은 술이라 와인잔에 마시면 더 좋다]

첫인상은 화이트 와인처럼 청명하다. 한모금 머금으면 쌀발효주 특유의 달콤한 맛이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다. 이 달콤함은 토라지듯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진피의 알싸한 맛이 머무른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귤주스와는 전혀 다른 맛과 향이다. 오히려 귤차에 가깝달까. 약주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깔끔한맛에 귤향이 살짝 얹어져 맛이 나비처럼 나폴거린다. 맛있구나, 맛있어.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간 이후에도, 혀에는 미미하게 귤의 알싸한 맛이 남아 입술이 자꾸만 잔으로 간다. 말간 얼굴의 시골처녀처럼 소박하면서도 깔끔한 맛이다.

“머물고 싶은 곳, 니모메 빈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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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근처에 이 술과 같은 이름의 카페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름은 <니모메 빈티지 라운지>.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연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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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 카페 문을 활짝 열고 사방을 개방했다. 카페 곳곳에서 보이는 아기자기한 소품에서 주인의 취향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파도 소리와 바람 그리고, 니모메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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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메를 처음 마셨을 때, 차갑게 해서 디저트 와인으로 즐겨도 참 좋을거란 생각을 했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하면 더욱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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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앞에선 오래된 벗처럼 보이는 할머니 세분이 피크닉을 즐기고 계셨다. 돗자리와 보온병, 리본이 달린 라탄 바구니까지 영화 <카모메 식당>이 떠오르는 그림같은 풍경이다. 다음엔 나도 니모메 한 병과 함께 근사한 피크닉을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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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반주로도 좋다. 쓴맛과 단맛의 밸런스 덕분이다. 서울도 서울이지만, 제주도도 전통주 열풍이 남다르다. <제주나누기>에서는 다양한 전통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맛깔난 안주를 즐길 수 있다. 니모메는 단맛과 짠맛이 강한 한식과 매치해도 꽤 근사하게 어울린다. 매콤한 겉절이와 마셔도 어울리고, 진피의 맛은 기름진 음식에도 밀리지 않고 잘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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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아 니모메가 출시되기 전에 제주도에서 직접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좋은 풍광 속에서 맛있는 술을 마셨다.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온 지금, 잠이 오지 않는 날엔 눈을 감고 제주도의 바다와 달콤하고 알싸했던 니모메를 떠올린다. 제주도는 가면 갈수록 자꾸만 가고싶다던데, 그말이 맞다.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제주도를 가게 되지 않을까. 가서 저 술을 다시 맛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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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