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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 나의 애플펜슬

6월엔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4년간 다닌 직장을 갑자기 나오게 됐고, 이젠 내 사이트를 준비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쫄보인 내가 이렇게 일을...
6월엔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4년간 다닌 직장을 갑자기 나오게 됐고, 이젠 내…

2016. 06. 28

6월엔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4년간 다닌 직장을 갑자기 나오게 됐고, 이젠 내 사이트를 준비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쫄보인 내가 이렇게 일을 벌이다니. 도메인 등록을 마치고 디 에디트에 처음 접속했을 땐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실수로 ‘리셋 올(Reset All)’ 버튼을 클릭해서 개발자가 일주일 동안 작업한 걸 전부 초기화해버렸을 땐 실제로 눈물이 줄줄 흘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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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잘못된 짝사랑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했지만 자려고 누우면 못다 한 일들이 베갯맡에 따라붙었다. 새벽까지 눈이 말똥한 날엔, 잠은 쿨하게 포기하는 게 맞았다. 더 터틀스의 해피 투게더를 나직하게 틀어놓고 그림을 그렸다. 애플펜슬로.

20대 중반까지 내 꿈은 만화가였다. 대학교 3학년 땐 웹툰을 그려야겠다며 꼬박 1년을 휴학했다. 와콤의 저가형 모델인 그라파이어를 구입해 쿨러가 신음하는 조립PC를 끼고 웹툰을 그렸다. 다행히 재능없음을 실감하고 글쟁이의 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좋은 도구에 대한 로망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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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현재 내 ‘최애템’은 애플펜슬이다. 더 이상 PC에서 무거운 프로그램을 돌릴 필요도 없고, 태블릿을 따로 설치해두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9.7인치 아이패드 프로 화면 위에 하얗고 예쁜 펜을 쓱싹쓱싹. 접근성이 달라졌다. 어차피 대단한 작업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심심풀이 삼아 낙서나 하고 싶을 뿐이니까. 이 정도가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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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콤이 좋은가 애플펜슬이 좋은가 하는 논쟁은 소모적이고 재미도 없다. 나이를 먹으며 여러 남자를 만나고 여러 스타일러스도 써봤다. 누가 가장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연애 당시의 나에게 달린 문제다. 마찬가지로 기기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사용자 개인이다. 당신과 나의 사용자 경험은 필연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와콤의 인튜어스 라인도 훌륭했지만, 내겐 좀 더 라이트한 형태의 애플펜슬이 잘 맞았다.

가장 즐겨쓰는 드로잉 앱은 <ProCreate>. 그런데 오늘은 좀 더 가볍게 배울 수 있는 <Adobe Photoshop Sketch>를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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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 다운로드 링크]

어도비가 만든 앱이다. 당연히 어도비 소프트웨어와의 코웍이 훌륭하다. 스케치 앱 자체에서 지원하는 툴은 크게 특별하지 않지만, 레이어 정보 효과를 모두 살린 채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로 바로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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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앱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날로그의 경험을 디지털로 가져오는데 충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채화 브러시가 끝내준다. 물감을 묻혀 색칠하듯 살살 발라주면, 실제 물 먹은 종이에 물감을 발랐을 때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물감이 퍼졌을 때 타이밍 맞춰 왼쪽 하단의 ‘선풍기’ 아이콘을 선택하면 즉각 물감이 마른다. 위의 그림은 수채화 브러시가 한참 번지게 내버려 둔 후에 위에 레이어를 추가하고 연필 브러시로 선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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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펜슬과의 궁합도 좋다. 펜을 기울였을 때의 펜터치도 섬세하게 구현했다. 연필 툴 하나로 그린 튤립 그림이다. 그냥 간단하게 쓱싹거리고 싶을 때 유용한 앱이다. 다른 사용자들이 그린 그림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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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초등학생 때 배웠던 ‘스크래치’ 기법을 응용해보았다. 첫 번째 레이어에 알록달록 컬러를 칠하고, 두 번째 레이어는 아크릴 브러시로 새까맣게 덮어버린다. 그다음에 지우개 선을 아주 가늘게 설정하고 까만 아크릴을 긁어내듯 그림을 그리면 된다. 첫 번째 레이어의 컬러가 드러나며 재밌는 모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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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으로 돌아간 것처럼 동심 가득한 작업이었다. 애플펜슬이 아이디어를 샘솟게 한다. 내가 이렇게 똘똘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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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스케치부터 펜선, 채색, 배경까지의 작업을 움짤로 담아보았다. 배경은 에디터M이 대만에서 촬영한 빨간 대문 사진인데, <BrushStroke> 앱을 이용해 수채화 효과를 준 뒤 사용했다. 사족이지만 BrushStroke도 정말 잘 만든 앱이다. 꼭 써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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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수채화 브러시로 채색했기 때문에 색이 지저분하게 섞이지 않게 하려고 레이어를 여러 개로 분리했다.

이렇게 머리를 비우고 애플펜슬을 놀리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난다. 동틀 무렵에나 졸음이 밀려와 선잠을 자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기의 반복. 고되지만 행복하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이 어여쁜 사이트에 여러분이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와 주신다면 더 좋겠다.

아이패드 프로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풀어볼 참이다. 이 글은 앱 리뷰를 가장한 나의 수다스러운 일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필과 잠이 오지 않는 6월의 밤에 대한 기록이다.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