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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끝을 위한 술, 데일리 위스키 5종

마시기 편하고 밸런스가 좋은 위스키
마시기 편하고 밸런스가 좋은 위스키

2023. 03. 13

안녕 매일 한 잔의 위스키에서 위안을 얻는 글렌이다. 위스키만큼 즐긴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술이 또 있을까. 맛과 향이 풍부하고, 개봉 후에도 오래도록 두고 마실 수 있고, 위스키마다 개성이 달라 취향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이처럼 매력 넘치는 위스키 중에서도 곁에 두고 마시기 좋은 데일리 위스키를 추천해보려 한다.

매일 마시기 좋은 위스키는 어때야 할까. 당연하게도 맛있어야 한다. 맛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 취향에 맞는 위스키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많은 위스키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받는 것들이 있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것으로 위스키 세계에 입문한다면 실패 확률을 줄이고 취향을 찾는 여정에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 마시기 편하고 밸런스가 좋아야 한다. 마라탕이 아무리 맛있어도 매일 먹기는 힘든 것처럼 (매일 먹어도 좋은 사람이 있다면 사과한다) 특정 풍미가 강조된 자극적인 맛이라면 자주 마시기 부담스럽고 쉽게 질릴 수 있다. 그래서 부드럽고 균형 잡힌 풍미의 위스키들로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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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격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비싸거나 구하기 힘든 한정판 등 너무 귀한 위스키는 매일 마시기는 커녕 고이 모셔 놓고 감상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굴비 위스키’가 되지 않으려면 합리적인 가격대여야 하고 구하기도 어렵지 않아야 한다. 다만 가성비만 따지다 보면 자칫 맛있고 좋은 위스키라는 첫 번째 조건에 어긋날 수 있다. 저가형 중에 맛있는 걸 찾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데 가격대까지 합리적인 위스키들로 골라봤다.

이런 고민 끝에 고른 다섯 가지 위스키를 소개한다. 싱글몰트, 블렌디드 몰트, 블렌디드, 버번, 그리고 피티드 싱글몰트까지 종류별로 하나씩 골랐다. 모두 실제로 애정하는 위스키들이다. 아래 사진은 모두 직접 마시던 병을 촬영한 것이다 보니 남아있는 위스키 양이 제각각인 점 양해 바란다.


[1]
싱글몰트
글렌드로낙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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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이며, 위스키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권했을 때도 실패한 적 없는 위스키다. 글렌드로낙의 매력을 이해하려면 먼저 셰리 와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와인의 도수가 10% 내외인 것에 비해 셰리 와인은 10% 후반까지 도수를 높여 만든 스페인의 주정 강화 와인이다. 숙성 과정을 거치는 와인이나 위스키 등은 보통 오크통(캐스크)에 숙성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무에 액체가 배어들어가 나중에 내용물을 비워내더라도 원액의 풍미가 남게 된다. 그래서 셰리 와인을 담아 두었던 오크통에 위스키를 숙성시키면 위스키에 셰리 와인의 풍미가 입혀져서 색다른 풍미를 갖게 된다. 와인에서 연상되는 포도, 베리류의 과일, 아몬드를 비롯한 견과류, 꽃향기처럼 화사한 향 등이 셰리 캐스크에 숙성한 위스키가 갖는 대표적인 풍미다. 숙성을 오래 한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에서는 꾸덕한 초콜릿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1400_retouched_-11 [이른바 셰리 삼대장, 왼쪽부터 맥캘란 12년, 글렌드로낙 12년, 글렌파클라스 17년 (12년이 없어 대체)]

최근 들어 이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글렌드로낙은 맥캘란, 글렌파클라스와 함께 이른바 셰리 삼대장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다. 그리고 동시에 글렌드로낙은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글렌드로낙이라는 하나의 증류소에서 다른 곡물이 아닌 몰트로만 만든 위스키라는 뜻이다. 이런 싱글몰트 위스키들은 증류소마다 고유한 개성을 보여준다. 글렌드로낙 12년은 글렌드로낙 증류소의 엔트리급 위스키로 화사한 향, 건포도 등 말린 과일, 견과류의 풍미, 적당한 꾸덕함, 스파이시한 피니시까지 풍부하고 좋은 밸런스를 가졌다. 자기 전에 마시면 하루를 향긋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높아진 인기 탓에 셰리 캐스크 숙성 위스키의 가격이 많이 오르고 구하기 힘들어진 것도 많지만, 글렌드로낙은 아직까지는 무사한 편이다. 특히 최근 수입 물량이 풀리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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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10만 원대 초반, 주류 전문점이나 주류 스마트오더 앱에서 구할 수 있다. 위스키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추천하는 위스키다. 흔히 꼽는 입문용 위스키보다는 가격대가 좀 있지만 그만큼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거다. 라벨도 예뻐서 술장에 두기 멋스럽다.


[2]
블렌디드 몰트
몽키 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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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가 잔에 담기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시간, 정성이 든다. 몽키 숄더는 그 과정에 대한 존경과 경이로움을 담은 위스키다.

전통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 중엔 플로어 몰팅이라고 하는, 바닥에 넓게 보리를 깔아두고 나무삽으로 뒤집어 주는 과정이 있다. 육체적으로 너무 고되어 이를 전문으로 하는 장인인 몰트맨들의 어깨가 원숭이처럼 둥글게 굽어지곤 했다는데, 몽키숄더는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위스키를 만드는 장인들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최고의 몰트맨 몽키 숄더 글렌! 만화 <원피스>로 치면, 흰 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 빨간 머리 샹크스 정도의 칭호인 셈이다.

2 [전통 방식인 플로어 몰팅을 고집한다. 출처= 킬호만 위스키 증류소 홈페이지]

몽키 숄더는 블렌디드 몰트위스키다. 싹을 틔운 보리를 뜻하는 몰트 이외의 다른 곡물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여러 증류소에서 몰트를 이용해 만든 원액을 섞어서 만든다. 몽키 숄더는 발베니, 글렌피딕 등 유명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다수 소유한 글로벌 주류 회사 윌리엄그랜트앤선즈에서 만드는 위스키로, 이 회사가 소유한 여러 증류소에서 만든 원액을 블렌딩 해 만든다. 블렌딩을 하는 이유는 풍미를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다. 증류소마다 원재료, 환경, 가공방식 등이 모두 다르므로 저마다의 개성을 갖기 마련인데, 블렌딩을 통해 툭툭 튈 수 있는 개성을 줄이고 둥글고 부드러운 풍미를 만들어 낸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호불호가 명확히 나뉠 수 있다면, 블렌딩은 불호를 줄이는 과정인 셈이다.

몽키 숄더는 숙성년수를 밝히지 않는 이른바 NAS(None Aging Statement) 위스키다. 그래서 12년이니 18년이니 하는 숫자는 보이지 않는다. 좋은 건 자랑하기 마련이니 오래 숙성을 하고 일부러 표기를 안 할 리는 없다. 숙성 기간이 짧으면 알콜 향이 튀고, 한쪽으로 쏠린 풍미가 나고, 피니시가 거의 없다시피 한 맛없는 위스키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숙성년수가 적혀 있지 않으면 일단 걱정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1400_retouched_-7 [병을 비우고 나면 그냥 버리지 말고 원숭이 장식은 따로 떼서 모아두자. 수집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몽키 숄더에서 이런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바닐라와 꿀이 연상되는 달콤함,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쥬시함, 삼키고 나서도 오래 느껴지는 향긋함까지. 몽키숄더는 잘 만든 위스키다. 고숙성 위스키 특유의 우디함만 뺀다면 여러 풍미가 풍부하고 조화롭다.

게다가 가성비도 훌륭하다. 오늘 소개하는 위스키 중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다른 재료와 섞어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다. 몽키 숄더로 만든 하이볼, 참 맛있다. 여러모로 데일리로 마시기 좋은 위스키다.

가격은 5-6만 원대.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만큼 대부분의 주류 전문점에서 취급한다. 싱글몰트나 블렌디드 위스키만 주로 마셔봤다면 이 위스키를 추천한다. 블렌디드 몰트인 몽키 숄더에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몽키 숄더 이름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좀 더 맛있고 가치 있는 한 잔이 될 거다.


[3]
블렌디드
부쉬밀 블랙 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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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에서 만든다. 오늘날에는 스카치 위스키가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최초의 위스키는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일랜드에 있는 부쉬밀 증류소는 무려 1608년에 세워진 증류소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됐다. ‘진짜진짜원조집’에서 만드는 위스키인 셈이다.

1400_retouched_-1 [출처 : 부쉬밀 위스키 증류소 홈페이지]

아이리시 위스키는 전통적으로 3회 증류해 만든다. 증류 횟수가 많아질수록 원재료인 몰트의 풍미는 줄어들고 순수한 알코올에 더 가까워진다. 증류를 마친 무색의 액체를 스피릿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2번 증류하는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아이리시 위스키는 3번 증류한 스피릿을 사용함으로써 부드러운 풍미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피릿을 오크통에 숙성하고 나면 비로소 위스키가 된다. 대부분의 스카치, 아이리시 위스키는 이전에 다른 술을 한 번 이상 담았던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숙성 과정에서 오크 나무 특유의 풍미뿐만 아니라 이전에 담았던 술의 풍미까지 더해 복합적인 풍미를 만들기 위함이다. 부쉬밀 블랙 부쉬도 글렌드로낙 12년처럼 셰리 캐스크에 숙성한 원액이 포함된 위스키다.

다만 부쉬밀 블랙 부쉬는 블렌디드 위스키라는 점에서 싱글몰트인 글렌드로낙 12년과는 차이가 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몰트 외에도 밀, 호밀, 옥수수 등 다양한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 해 만든다. 이 곡물들은 보통 몰트보다 저렴하기도 하고, 여러 번 증류하는 연속식 증류를 통해 원재료의 풍미는 덜 하지만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블렌디드 위스키인 발렌타인,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이 많은 생산량과 부드러운 풍미를 앞세워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위스키 애호가들은 블렌디드 위스키는 풍미가 옅다고 생각해 선호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훌륭한 풍미를 가진 블렌디드 위스키들이 있다. 부쉬밀 블랙 부쉬도 추천할 만한 블렌디드 위스키다.

bush [출처 : 주류 스마트오더 앱 데일리샷]

달콤한 복숭아, 고소한 아몬드나 땅콩 등이 연상되고, 화사한 셰리 뉘앙스도 살짝 느껴진다. 글렌드로낙 12년에서처럼 강한 셰리 풍미는 아니지만, 맛을 분명 더 복합적이고 다채롭게 한다. 블렌디드 위스키 답게 균형잡힌 풍미를 추구하면서도 개성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은 부쉬밀 블랙 부쉬의 매력을 더해준다. 부드러운 풍미와 부담 없는 가격, 데일리로 즐기기에 훌륭한 조합이다.

가격은 4~5만 원대. 주류 전문점이나 대형마트, 주류 스마트오더 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병 아랫부분을 그대로 잘라낸 듯한 멋스러운 디자인의 전용잔이 포함된 패키지도 있다. 위스키 입문자도 부담 없이 시도해보기 좋고 블렌디드에 대해 평소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선입견을 깨 줄 수도 있을 만한 위스키다.


[4]
버번
이글레어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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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는 시간을 들여 음미하는 술이다.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치며 무르익은 맛은 병을 개봉하고 나서도 조금씩 변해간다. 매일 조금씩 서두르지 않고 변해가는 맛을 느끼는 것이 위스키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글레어 10년은 버번위스키다. 버번위스키는 간단히 말해 미국에서 옥수수를 주재료로 만든 위스키다. 꿀, 바닐라, 카라멜이 연상되는 단맛, 스파이시함, 아세톤이 연상되는 다소 거친 향이 버번위스키의 대표적인 풍미다. 카우보이나 마피아가 연상되는 하드보일드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위스키라는 같은 카테고리 내에 있지만 스카치위스키와는 만드는 방식과 풍미가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위스키 입문자에게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와 버번위스키를 함께 권하는 편이다. 방대한 위스키 세계에서 취향을 찾아가기 위한 나침반 바늘을 처음으로 돌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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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레어 10년은 버번 위스키 중에서도 부드럽고 향긋한 편이다. 가끔 거칠어지고 싶은 날에는 강렬한 버번이 끌릴 때도 있지만, 데일리로 마시기에는 역시 밸런스가 잘 잡힌 편이 좋다. 이글레어 10년은 버번 특유의 달콤한 바닐라, 꿀 풍미에 약간의 시트러스 함, 풀내음, 꽃향기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아세톤 같은 거친 향은 절제된 편이다. 주로 40도 초반인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버번 위스키는 미국 단위로 101 프루프, 50.5도의 보다 높은 도수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글레어는 그보다 낮은 45도다. 그만큼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버번이다.

이 설명을 보고 이글레어 10년을 막 따서 마셔보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딱딱하고 조화롭지 않은 여러 풍미가 툭툭 튀어나온다. 병에 담겨 밀봉되어 있던 위스키는 개봉한 후에 공기와 닿으면서 맛이 조금씩 변해간다. 코를 찌르는 부담스러운 휘발성 향미는 줄어들고, 맛은 부드러워진다. 이 변화를 ‘맛이 풀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위스키 애호가들은 막 개봉한 위스키보다는 개봉한 지 어느 정도 지나서 맛이 풀린 위스키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병을 비울수록 내부 공기의 양이 많아져 맛이 변해가는 속도도 빨라지는데, 보통 절반 정도 남아있는 위스키를 가장 선호한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절반이 남은 상태에서 병을 다 비워질 때까지 더 부드러워지는 풍미도 즐기는 편이다. 시간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변화가 싫지 않다.

momo [출처 : 이글레어가 소속된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이글레어 10년은 나에겐 이 변화가 가장 극적이고, 가장 즐겁게 느껴지는 위스키다. 뚜껑을 막 땄을 때의 풍미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 이후에 병을 비워갈수록 점점 맛있어져서 매번 깜짝 놀란다. 이 글을 쓰면서 얼마 남아있지 않던 병을 다 비웠다. 마지막 잔은 부드럽다 못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가장 애정하는 버번위스키 1위가 좀 더 굳건해졌다.

가격은 10만 원 초반, 주류 전문점과 주류 스마트 오더 앱에서 구할 수 있다. 데일리로 마시기 좋은 버번위스키를 찾는다면 1순위로 추천한다.

골프에서 2타를 줄이는 걸 뜻하는 ‘이글’과 이름이 겹쳐, 공식 홈페이지에서 골프채 커버를 판매하는 등 골프 관련된 마케팅을 하기도 한다. 주변에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글레어가 훌륭한 선물이 될 것 같다.


[5]
싱글몰트(피티드)
라가불린 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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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즐긴다면 언젠가는 라가불린 16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위스키를 맛본다면 돌아올 수 없는 위스키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라가불린 16년은 피트 위스키다. 이탄(泥炭)이라고도 불리는 피트는 습지 식물이 오랜 기간 퇴적되어 만들어진다. 석탄에 비해 탄화는 덜 되었지만 잘 말려서 불을 붙이면 연료로도 쓸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면 피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아 위스키 제조 과정에 널리 쓰여왔다. 특히 몰트를 건조할 때 연료로 피트를 사용하면 특유의 스모키한 풍미가 맥아에 배어든다. 그리고 이 향은 오랜 기간 위스키를 숙성하는 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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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처리를 한 위스키 향을 처음 맡아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일단 소독약, 요오드 등 병원 냄새가 떠오른다. 불 피울 때 나는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갯벌에서 느껴지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 같기도 하다. 모두 피트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대표적인 향이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셔보면 쿰쿰하고 스모키한 향이 입과 코를 가득 메우는 게 느껴진다.

사실 피트 향을 처음부터 즐기기는 조금 어렵다. 그래서 보통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인상은 별로 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그 향이 떠오르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 그렇게 피트향에 이끌려 다시 한번 마셔봐도 역시나 별로다. 하지만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갑자기 또 피트 향이 생각난다. 이렇게 피트 위스키의 오묘한 매력에 스며들어간다. 흡사 고수가 좋아지게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물론 처음부터 피트 향에 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저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밖에.

피트 향이 두드러지는 위스키 중에서도 라가불린 16년은 뛰어난 밸런스가 특징이다. 과일 향, 꽃향기 같은 풍부하고 향긋한 향, 바닐라 같은 단맛, 스모키하면서도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 내음이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다양한 풍미가 서로 절제되고 균형을 이룬다.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입 안에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위스키의 끝판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데일리 위스키를 넘어 ‘만약 앞으로 평생 한 위스키만 먹어야 한다’해도 나는 주저 없이 라가불린 16년을 고르겠다.

연희동에 위치한 책바의 메뉴판에는 은희경 작가의 소설 ‘중국식 룰렛’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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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책바]

아내가 ‘특별한 슬픈 날’에 마셨다는 이 위스키에는 분명 특별한 매력이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탐닉하다 보면 라가불린 16년을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 여러분도 하루바삐 이 위스키를 만나서 위스키의 매력에 깊게 빠질 수 있기를 바란다.

가격대는 20만 원 초반, 숙성 년수가 긴 만큼 가격대도 조금 있는 편이다. 라가불린 16년이 처음이라면 병으로 사서 혼자 마시기보다는 바에서 꼭 전문 바텐더의 가이드를 받아 마셔봤으면 좋겠다. 한 잔 기준으로는 보통 2만 원대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바라면 어디든, 술장 한 켠에서 여러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책바

  • 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 24 1층 101호
  • 화-목 19:00-24:00 금-토 19:00-00:30 (일-월 휴무)
  • @chaegbar

지금까지 다섯 종류의 데일리로 즐기기 좋은 위스키를 추천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느끼는 거다. 직접 맛보고 느끼고 매일 같이 먹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취향에 잘 맞는 단짝 위스키를 꼭 찾았으면 좋겠다.

About Author
글렌

위스키와 칵테일에 대해 글을 쓰는 홈텐더. 술이 달아서,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