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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즐거움, 요가북

오늘은 굉장히 재밌는 제품의 리뷰를 준비했다. 작년에 내가 이 제품을 처음 소개하며 이런 표현을 썼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파격의 연속이다.” 하늘아래...
오늘은 굉장히 재밌는 제품의 리뷰를 준비했다. 작년에 내가 이 제품을 처음 소개하며…

2017. 02. 15

오늘은 굉장히 재밌는 제품의 리뷰를 준비했다. 작년에 내가 이 제품을 처음 소개하며 이런 표현을 썼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파격의 연속이다.” 하늘아래 더 이상 새로운 제품은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고도 기발하다. 레노버의 요가북이다.

IFA 2016에서 공개됐을 땐 마치 컨셉 제품 같다고 느꼈다. 익숙한 것들은 과감하게 빼버리고, 낯선 아이디어로 무장했다. 조금은 괴랄하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이 괴랄한 제품을 아주 진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진지하다는 건 완성도에 대한 얘기다. 재기발랄해서 자칫 가벼울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하드웨어 완성도가 묵직하게 받쳐준다. 밸런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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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북은 독특하다. 여태까지 사용해본 제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 노트북을 갈아엎은 제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트북’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제품이기도 하다. 컴퓨터인 동시에 글자를 쓸 수 있는 종이책과 같은 역할을 하니까. 뻔한 표현이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절묘하게 결합해놨다. 디지털의 편리함과 아날로그의 감성에서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한 형태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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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다. 정말 정말 가볍다. 요가북의 무게는 690g. 숫자로만 들으면 감이 오지 않는다고? 그냥, 아주, 겁나 가볍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본래 920g 짜리 초경량 노트북을 쓰는데,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들고 다니면서 특별히 무게를 의식할 만한 일이 없다. 일부러 백팩을 메야 할 이유도 없고, 아무 가방에나 쓱, 넣어서 들고 다닐 수 있다. 이 정도의 휴대성이라면 특정 사용자에게 성능보다 강렬한 매력 포인트로 어필할 수 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나처럼 매일 매일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들고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특히 공부할 때 쓸 만한 기기가 필요한 대학생에게 추천한다(늦장 리뷰지만 개강 전에 부랴부랴 준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이렇게 가벼운 거냐고?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무게는 여기저기서 덜어냈을 테니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물리적인 키보드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이 제품을 보면 당황하게 된다. 노트북처럼 생겨서 열었는데, 반질반질 아무 것도 없는 까만 패드만 자리하고 있으니까. 키보드가 어디있나 해서 앞뒤로 손을 문질러보게 될 것이다. 요가북은 헤일로 키보드라는 가상 키보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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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활성화 하면 새까만 패드 위에 불이 들어오면서 은은한 터치식 백라이트 키보드가 나타난다. 신비롭고 꽤 예쁘다. 처음엔 밋밋한 패드 위로 타자를 입력하는 게 어색하다. 하지만 손 끝에서 키가 눌릴 때의 느낌을 대신할 만한 ‘양념’을 준비해놨더라. 키를 터치할 때마다 손끝에 햅틱 반응이 전해진다. 아주 은은하게. “지금 키보드가 눌렸다”라는 피드백이다. 게다가 패드가 미끄럽지 않고 적당히 매트한 느낌으로 마감돼 있어서 이질감이 적다. 덕분에 조금만 신경쓰면 오타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다만, 일반 키보드처럼 빠르게 타이핑하긴 어렵다. 꼭 타이핑 할 일이 있을 때만 활성화 하는 용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불편한 점도 있지만, 분명한 두 가지 장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물리 키보드를 생략한 덕에 이렇게 얇고 가벼운 기기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하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도 살풍경한 회의 시간에도 소리 없이 우아하게 타이핑할 수 있다. 참고로 진동 강도나 키보드 밝기, 감도는 모두 설정에서 바꿀 수 있다. 화면 상에서 키보드를 꺼내 입력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입력 방법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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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패드의 진면목은 키보드가 꺼져 있을 때 발휘된다. 스타일러스인 리얼 펜을 꺼내들면 이 새까만 패널은 일종의 메모장이자 스케치북이 된다.

슥슥, 글씨를 써본다. 아까 말했듯 패드 표면이 거칠고 매트한 느낌으로 마감돼 있다. 유리 소재의 디스플레이 위로 사용하는 스타일러스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적당히 마찰이 느껴져서, 아날로그 펜을 사용할 때의 ‘사각 사각’한 느낌을 훌륭하게 흉내냈다. 손맛이 좋다는 얘기다. 아날로그 특유의 ‘쓰는 느낌’은 적당히 빌어 왔지만, 종이에 대고 글씨를 쓸 때 만큼 피로도가 높진 않다. 큰 장점이다.

펜의 반응 속도나 필기감도 기대 이상이다. 아니, 기대 이상인 정도가 아니라 최근 써본 스타일러스 중 압도적인 수준이다. 한 개의 패드로 키보드도 되고, 크리에이티브 패드도 되는 재밌고 장난스런 제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의 내공이다.

아, 맞다. 와콤의 기술을 사용했지. 훌륭한 협업이었다. 펜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계속 감탄하게 된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디지털로 구현된 펜에 집착하는 편이다. 와콤의 그라파이어부터 시작해 인튜어스까지 다양하게 사용해 왔으며, 아이패드 프로의 애플펜슬이나 서피스 프로 시리즈의 펜까지 꾸준히 리뷰해왔다. 어느 제품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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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데스크 스케치북 앱에서 ‘연필’ 툴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예전에 파리 튈르리 공원에서 촬영한 사진을 띄워놓고 쓱싹 쓱싹 스케치를 했는데 연필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열중해 버렸다. 리뷰 쓴다고 앉아서 두 시간동안 그림만 그린 건 비밀… 그만큼 손맛이 좋다.

리얼 펜은 2048단계의 압력을 감지하는데, 손에 크게 힘을 주지 않아도 약간의 압력까지 감지해 섬세한 선을 표현해낸다. 단순히 가벼운 필기용 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드로잉에도 충분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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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렇게 좋은가 싶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한번씩 써보라고 권했다. 여기서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다. 펜을 테스트해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이름을 쓴다는 사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 테스트 결과 모두 비슷한 의견을 냈다. 진짜 펜을 쓰는 것처럼 느낌이 자연스럽다고. 하지만 글씨를 패드에 입력하고 결과는 화면에 출력된다는 사실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았다. 패드에 글씨를 쓰며 화면을 쳐다보는 게 어색하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이런 작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기 전까지는 일반 사용자들이 이런 위화감을 느낄 것이라 의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태블릿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때 디스플레이를 가리지 않아서 쾌적하다고 생각했는데 대반전. 역시 사용자의 마음은 넘나 다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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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입출력 장치가 다른 게 어색하다고 느끼는 분들을 위해 기능을 한 가지 더 소개해드리자면, 종이 위에 진짜 펜으로 필기하며 요가북에 저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요가북에 들어있는 북 패드 클립보드를 쓰면 자석으로 종이가 고정되기 때문에 편하다. 크리에이티브 패드 위에 종이를 놓고, 리얼 펜으로 필기하면 종이 위에 글씨가 써지는 동시에 화면 속에서도 필기 내용이 기록된다. 동시에 두 군데에 글씨를 쓰게 되는 셈이다. (당연히 화면에 펜을 직접 대고 사용할 수도 있지만 필압 인식이 안될 뿐만 아니라 리얼 펜의 매력을 다 살릴 수 없기 때문에, 패드에 익숙해지는 걸 추천한다)

난 문예창작학과를 다녔는데, 학교 다닐 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글씨로 옮기는 ‘필사’를 자주 했다. 요가북을 리뷰하며 오랜만에 시집을 펴놓고 필사를 해봤다. 안쓰던 글씨를 한참 쓰려니 손목이 뻐근하다. 종이에 쓴 것과 화면에 기록된 버전을 비교해보니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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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놓고 타이핑하면 훨씬 빠르겠지만, 손으로 옮겨 적으면 속도가 느린 만큼 그 문장이나 내용이 머리에 박힌다.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손으로 다시 새기는 작업이 미련한 만큼 효과가 있단 뜻이다. 이런 작업이 누구에게 가장 도움이 될까 생각해보면, 역시 학생이다. 같은 강의를 듣더라도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보다 손글씨로 필기할 때 이해도가 훨씬 높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손글씨로 필기를 하게 되면 적어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이해해 종이에 옮기는데, 타이핑 할 때는 강연자의 말을 무조건 다 받아적기 때문이다.

스타일러스로 필기를 하면 장점이 많다. 일단 어쩐지 멋있어 보일 것 같고, 얼리어답터처럼 보일 것이다.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렇다면 그냥 종이와 펜을 챙겨서 필기를 하면 되지 않냐고? 그건 너무 비효율 적이다. 아날로그 세상에선 쉽게 펜의 색깔을 바꿀 수도 없고, 잘못 쓴 글씨를 지우기도 어렵다. 게다가 필기한 내용이 많을 땐 정리하기도 쉽지 않고 말이다.

손으로 필기한 내용을 즉각적으로 디지털 파일로 저장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손 끝에서 작성한 내용은 파일로 저장되어 쉽게 편집하거나 공유하고, 복사할 수 있다. 필요하면 사진도 불러오고, 표도 만들 수 있고. 앞서 말했듯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만 얌체처럼 갖다 쓴 제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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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 대딩 때는 이런 제품이 없었을까. 당시 내 노트북은 너무 무거웠고, 노트를 여러 개 사용하면서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필기하곤 했다. 그리고 형편없는 학점을 받았다. 이런 태블릿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맨날 술만 마셔서 그런 게 아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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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연함도 눈여겨 보자. 360도 회전 가능한 힌지는 견고하고 부드럽다. 그림을 그리거나 필기를 할 땐 180도로 쫙 펼치는 것이 편리하며, 적당한 각도로 맞추면 영상 감상용이 된다. 10.1인치의 화면은 드라마틱한 수준은 아니지만 혼자 영상 보기엔 꽤 괜찮은 크기다. 화면보다는 사운드가 의외로 훌륭한 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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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허세가 폭발해 불어 공부를 시작했다]

요가북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건 펜의 성능일 것이고, 제일 우려하는 건 키보드일 것이다. 펜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키보드는 생각보단 괜찮지만,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린다. 익숙해진 후에도 물리 키보드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순 없을 것이다. 요가북은 필기 기능을 필두로 생산성을 추구하는 기기다. 오로지 키보드 타이핑 작업에 집중 해야 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가볍게 들고 다니며 매일 매일 필기하고, 공부하고, 낙서할 수 있는 기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추천한다. 가격이 저렴한 만큼, 세컨드로 사용하는 기기로 들여도 좋고 말이다. 이 제품이 가진 690g의 휴대성은 다른 걸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숫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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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고민은 아마 운영체제겠지. 윈도우 버전과 안드로이드 버전 모두가 출시된 것도 반가운 요소다. 나는 윈도우 버전을 사용했는데, 본인이 자주 쓰는 프로그램이나 앱이 어느 운영체제에 더 많은지로 판단하면 될 것 같다. 어차피 완벽하게 PC를 대체하긴 어려운 제품이다. 휴대성에 중점을 둔 모바일 기기로서 접근한다면 안드로이드 버전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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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고 있으면 그냥 종이책처럼 보이는 디자인이다. 군더더기 없는 블랙 바디 덕분에 스타일리시한 느낌이다. 물론 기름기 있는 손가락으로 만지면 바로 바로 지문 모양 찍힌다는 게 함정이지만. 심플한 디자인에 포인트가 되는 스티커를 붙이면 예쁘다. 이렇게 해서 들고 다니면 어쩐지 나도 대딩 느낌. 귀여운 모자를 쓰고 캐주얼한 차림으로 외출하고 싶다. 치즈 인더 트랩에 나오는 홍설이 된 기분이랄까. 물론 나에겐 유정 선배도 없고 장학금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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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