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소설이 단짠이 될 때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11. 10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재수사>는 오늘 소개하는 다섯 권의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고,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은 다섯 권 중 가장 신선했던 책이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은 지금 나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고,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할 책이다. 그리고 <리아의 나라>는 가장 오랫동안 읽을 책이다.


[1]
<재수사>

“그들은 왜 아이돌그룹의 가사가 20년째 ‘나는 나’인가를 토론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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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데 재밌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농담도 별로 하지 않는다. ‘요즘 핫한 거’에도 큰 관심이 없다. 대신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그걸 솔직하게 드러낸다. 어디서 들은 얘기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에 가끔 말이 좀 길어져도 지루하지 않다. 나에게 장강명 작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표백>, <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등 그의 소설들은 진지한데 재밌었다.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재수사>는 미스터리 범죄물이다. 22년 전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는 강력계 형사와, 온갖 사상과 철학을 갖다붙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범인의 입장이 번갈아 나온다. 여느 추리소설처럼 차근차근 범인을 좁혀가는 과정은 ‘아는 맛’을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끌어들여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는 범인의 이야기는 ‘몰랐던 맛’이다. 범인의 주장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단짠 조합이 폭식을 부르듯, 두 축의 밸런스가 좋아 ‘한 장만 더… 진짜 딱 한 장만 더…’ 하며 읽게 된다.

<재수사>를 쓸 때 장강명의 목표는 2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현실적인 경찰 소설을 쓰자. 둘째, 2022년 한국 사회의 풍경을 담고 그 기원을 쫓아보자. 성실한 취재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첫 번째 목표 달성에 기여했다면,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진지한데 재밌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공허’와 ‘불안’ 두 단어로 압축하는 그의 생각은 또 한 편의 ‘진지한데 재밌는’ 소설을 낳았다. 말이 좀 길어져 두 권짜리가 되었지만, 역시나 전혀 지루하지 않다.

  • <재수사> 장강명 | 은행나무 | 2022.08.22 | 16,000원

[2]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국가가 파산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동물 친구 모두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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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오는 인간은 딱 세 명이다. 대통령, 트로쉬 고문, 노트바르 재판관. 대통령과 트로쉬 고문은 정치인이다. 사전에서 ‘정치’의 뜻을 찾아보면 ‘상호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라 되어 있다. 이 뜻대로라면 정치인은 우선순위 설정을 잘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희생시키고, 덜 급한 일을 잠시 미뤄두고 더 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식으로.

이러한 논리로 미뤄두고 희생시킨 것들이 쌓여 거꾸로 ‘인간다운 삶’을 위협한다. 대표적인 것이 환경 오염이다. 정치인들은 사냥하고, 나무를 베고, 살충제를 치는 인간을 방관했다. ‘덜 중요하고 덜 시급한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대통령과 트로쉬 고문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해결책을 내놓는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을 법정에 세워 따져 묻는 것이다. “인간이 당신 종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해 보세요. 가장 인간에게 도움이 될 동물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겠습니다.”

납치범이 인질에게 “당신을 살려줘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라고 묻는 격의 어이없는 재판이지만, 이미 익숙한 듯 동물들은 법정에 출두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담담히 얘기한다. 수리부엉이, 갯지렁이, 들북살모사 등이 증언하는 ‘동물의 삶’은 익숙한 듯 새롭다. 그들의 이름을 알고, 심지어 그들 곁에서 함께 살아가면서도 인간들은 몰랐던 이야기들. 그러다 어느 순간 온갖 동물들이 법정에 난입하고, 재판의 양상은 180도 바뀐다. 나도 인간이지만, 이 책의 놀라운 결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장 뤽 포르케(지은이), 야체크 워즈니악(그림), 장한라(옮긴이) | 서해문집 | 2022.09.25 | 14,500원

[3]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그래서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대신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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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는 말은 결국 이거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좋은 일이 생긴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이 사회에도.”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말 걸기’에 진심인 여러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사례를 수집했다. 말 걸기가 어떤 점에서 유익한지, 그럼에도 다들 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지,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는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지 등이 3개의 챕터 안에 알차게 담겨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다 읽었지만 당장 내일부터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어떤 책 읽으세요?”라고 말 걸 엄두는 안 난다. 대신 초면은 아니지만 아직 좀 서먹서먹한, 회사의 동료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 수는 있겠다. ‘심화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기본편’부터 마스터해나가겠다는 심산이다. 이 책이 알려주는 대화의 기술은 꼭 낯선 사람이 아니더라도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까.

대화를 잘하기 위해 달변가가 될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이해하기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좋은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좋은 질문이란 자기가 아는 걸 뽐내거나 논리의 빈틈을 꼬집는 질문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말하는 바를 더 잘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이다. 잘 듣기는 기본이다. 잘 들을수록 더 잘 생각하고 더 잘 말할 수 있다.

이해하기, 잘 묻기, 잘 듣기 모두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낯선 사람들과 만나온 시어도어 젤딘은 헬싱키의 한 강연에서 청중들에게 묻는다. “자신이 완전히 이해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으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조 코헤인(지은이), 김영선(옮긴이) | 어크로스 | 2022.09.19 | 17,800원

[4]
<리아의 나라>

“공감은 분노보다 어렵고 연민보다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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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국적, 같은 문화를 공유한 사람에게 다가가 말 한마디 거는 것도 힘든데… 완전히 다른 뿌리를 가진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리아의 나라>는 그 지난한 과정을 끈기 있게 기록한 책이다.

리아는 아프다.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이다 기절해버린다. 의학 용어로는 ‘뇌전증’이지만, 리아의 부모는 아파트 문을 쾅 닫는 바람에 리아의 혼이 놀라 달아났다고 여긴다. 리아 가족은 라오스에서 태어나 태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몽족이다. 병원의 미국인 의사들은 리아의 부모가 약을 제때 먹이지 않아 상태가 나빠졌다고 의심한다. 리아 가족과 의사 사이에서 가장 괴로운 건 태어난 지 세 달만에 응급실에 실려온 리아다.

솔직히 처음엔 읽기가 좀 힘들었다. 몽족의 전통문화를 고집하는 리아 가족도, 계속 비슷비슷한 약을 처방하면서 몽족 탓만 하는 의사들도 모두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문화 충돌이건 의사의 직업윤리건 다 모르겠고, 끊임없이 발작하고 토했을 리아의 작은 몸만 자꾸 떠올랐다. 수년간 곁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며 기록한 저자 앤 패디먼도 마음이 아프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 그는 나와 달리 양쪽을 모두 이해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책을 덮을 때쯤엔 알게 된다. 리아의 부모도, 미국인 의사들도 모든 것을 쏟고 있었음을.

물론 모든 것을 쏟는다고 그게 다 상대방에게 전해지진 않는다. 저자의 컴퓨터 위에는 이런 만화가 붙어 있다고 한다. “개구리는 소를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우와! 저거 참 크고 못난 개구리일세!’ 소는 개구리를 내려다보며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이야! 거참 조그맣기도 한 소일세!’ 우리는 모두 개구리이거나 소다.”

  • <리아의 나라> 앤 패디먼(지은이), 이한중(옮긴이) | 반비 | 2022.09.02 | 20,000원

[5]
<도박중독자의 가족>

“인간은 약한 존재지만 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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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중독자’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드라마 속 클리셰가 있다. 시뻘게진 눈으로 패를 노려보던 주인공은 역시나 돈을 다 잃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이 애써 모아둔 돈에 손을 댄다. “이거 잠시만 빌려주면, 금방 두 배로 불려서 가져다 줄게. 날 한 번만 믿어봐. 이번엔 진짜야!” 돈을 두 배로 불려오는 일 같은 건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만화의 제목을 보고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만화 속 ‘도박중독자’는 카드, 화투, 슬롯머신 등은 근처에도 가지 않고 심지어 술담배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어려서부터 재테크에 관심이 많아 주식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그의 높은 수익률을 보고 가족들도 목돈을 맡길 정도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방 두 배로 불려서 갚을게. 이번엔 진짜야!”

이 만화의 제목이 도박중독자의 ‘가족’인 데는 이유가 있다. 도박중독의 피해는 본인에서 끝나지 않고 가족들로 번진다. 특히 한국에선 ‘가족이라면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도와 헤쳐 나가야지’ 같은 생각이 강해 정도가 더 심하다. 하지만 도박 빚을 갚아주기 시작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또다시 돈을 빌려 도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박 빚을 갚아주는 건, 마약중독자의 손에 마약을 쥐여주는 것과 같다.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아직 가족이나 지인의 도박중독을 겪지 않은 사람들도 미리 경계심을 갖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재밌으면 장땡’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추천하곤 했는데, 이 책만큼은 ‘재미’만큼이나 ‘효용’이 크다. 수신지 작가의 추천사처럼, “이 보석 같은 작품이 세상의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다.”

  • <도박중독자의 가족> 이하진 | 열린책들 | 2022.09.05 | 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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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