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불량식품 같은 책도 있다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2022. 10. 03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얀 마텔의 책 예찬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가답다. “책은 요정이 들어 있는 병입니다. 책을 문지르고 열면, 우리 마음을 빼앗는 요정이 뛰쳐나옵니다. 세상에는 그런 병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병을 문지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 색도 크기도 다른 다섯 병을 가져왔으니 부디 한 번 문질러 보시길.


[1]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

“국민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면 좋겠다고 꿈꾸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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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책 선물을 가장한 잔소리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책 선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받는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책과 받는 사람에게 필요할 것 같은 책이다. 후자의 경우 잔소리로 들리기 쉽다. 직장 상사로부터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를 선물 받는다면, 그 책을 받아든 마음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가 선물한 최초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틱낫한 스님의 <화>다. 고등학교 때 아빠 생신에 맞춰 이 책을 준비했다. 말이 좋아 선물이지, 본심은 잔소리였다. ‘아빠, 이 책 읽고 이제 화 좀 그만 내요.’ 아들의 맹랑한 선물을 받아 들고 아빠는 민망하게 웃었다. 막상 그 표정을 보고 나니 살짝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 후로 책을 선물할 땐 가급적 ‘필요한 책’보다는 ‘좋아할 책’을 고르려고 한다.

이 책은 소설가 얀 마텔이 자국 총리 스티븐 하퍼에게 보내는 잔소리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2주에 한 번씩 무려 101권의 문학책을 보냈다. 정중한 어투의 짤막한 편지와 함께.

101통의 편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지도자는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하지만 난 책 쓰는 사람의 자부심과 책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이 듬뿍 녹아 있는 이 책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인간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앗, 이 글도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로 들릴 수 있겠구나…)

  •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 얀 마텔(지은이), 강주현(옮긴이) | 작가정신 | 1만 8,000원

[2]
<수면 아래>

“대단한 일도 아닌데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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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얀 마텔처럼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주란의 소설 <수면 아래>를 읽으며 떠오른 생뚱맞은 질문은 ‘우리는 왜 브이로그를 보는가’였다.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고 지구를 구하는 블록버스터도 많은데 우리는 왜 출근하고 밥 먹고 커피 내리는, 매일 크게 다를 바 없는 영상을 보는가. 그 답을 찾아야 <수면 아래>를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국 끓이고, 과일 깎고, 방 쓸고, 이불 까는 해인과 우경을 보며 왜 내 마음이 아파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내가 할 수 없다면 시인의 언어를 빌려보자. 이주란의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박연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소설은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 작가의 전작인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도 ‘산뜻한 슬픔’이었다. 내공 있는 배우만이 할 수 있다는 ‘울지 않고 울리기’를, 작가는 어떻게 글로 해낼 수 있을까.

책을 다 읽고, 저자의 인터뷰까지 읽고 나서야 알쏭달쏭함이 조금 해소됐다.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를 살아가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서는 해인과 우경이 과거에 겪은 일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 이후’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국 끓이고, 과일 깎고, 방 쓸고, 이불을 까는 하루하루를.

얀 마텔은 말했다. “역사서는 삶의 특정한 사례만을 다룹니다. 반면에 소설은 삶 자체를 다룹니다.” <수면 아래>는 삶 자체를 다루는 소설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 <수면 아래> 이주란 | 문학동네 | 1만 3,500원

[3]
<살의의 대담>

“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사건의 진상을 하나도 모르는 멍청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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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가 슴슴한 무공해 식품이라면 <살의의 대담>은 자극적인 불량식품이다. 달고 짜고 맵다. 1)달다. 책 전체가 인터뷰(대담)로만 이뤄져 있어서 술술 잘 읽힌다. 2)짜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이 빨간 글씨로 같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랑해주시는 팬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제 날 그만 좀 괴롭혀!] 3)맵다. 총 7개의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인물의 머릿속은 사람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엔 독특한 컨셉이 재밌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알고 싶지 않은 본심까지 동시에 듣다 보니 점점 지쳤다. 게다가 그 본심이 죄다 살인 계획이라 정신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범죄소설에서는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건이 벌어져도 결말에 이르면 모든 진실이 밝혀졌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범인 잡는 형사(or 탐정)가 그리웠다.

하지만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불량식품의 위력은 대단했다. 지쳐가는 와중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들 서로 죽이겠다고 난리인데 마무리가 가능하긴 할까? 저자의 필력만큼은 불량이 아니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기어코 모든 떡밥을 회수해낸다.

남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다. 모두의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 서로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일 것 같다.

  • <살의의 대담> 후지사키 쇼(지은이), 김은모(옮긴이) | 엘릭시르 | 1만 5,500원

[4]
<미쳐버린 배>

“우리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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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쿡은 의사 출신 탐험가다. 젊은 시절 처음 떠난 남극 원정에서 거의 죽다 살아 돌아온 그는 새로이 북극 원정대를 꾸려 성공적으로 탐험을 마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쿡의 말을 믿지 않고, 결국 사기 혐의로 감옥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던 1926년의 어느 날 특별한 면회객이 찾아온다. 30여 년 전 함께 남극의 얼음 속에 갇혀버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 서로 가장 의지했던 사람, 당시 25세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탐험가가 된 로알 아문센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영화 같은 재회로 시작되는 <미쳐버린 배>는 3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남극 탐험의 꿈을 품어온 벨기에인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는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끌어모아 드디어 배 한 척을 장만한다. 항해사, 의사, 정비사, 지질학자, 요리사 등 함께 떠날 선원들도 모여들었다. 각각 의사와 항해사 자격으로 원정대에 합류한 쿡과 아문센도 설렘을 안고 벨지카호에 오른다. 여기까진 순조로웠는데…

남극이 가까워올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벨지카호를 흔든다. 통조림을 먹기 싫다는 반찬 투정이나 선원들의 국적에 따라 파벌이 나뉘는 건 귀여운 수준이고, 역시 가장 무서운 건 남극의 자연이다. 얼음 사이에 배가 갇혀버린 상태에서 몇 주째 해가 뜨지 않자 선원들의 동요는 커진다. 사령관 제를라슈마저 괴혈병 증세에 시달리며 멘탈이 깨져버린 상황에서, 벨지카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 <미쳐버린 배> 줄리언 생크턴(지은이), 최지수(옮긴이) | 글항아리 | 2만 2,000원

[5]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노동 계급 아저씨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어서 대충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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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가 결정된 지 6년이 지났다. 당시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세계가 놀랐다. 원인으로 지목된 건 영국 국민들의 ‘이민자 혐오’ 정서다. 특히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주장해온 노동 계급은 브렉시트의 주범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저자 말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시대에도 뒤떨어진 꼰대 아저씨’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아저씨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저자 브래디 미카코는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에 정착했다. 그의 남편 또한 영국의 노동자로, 브렉시트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부터 남편의 친구들과 같이 맥주를 마시며 친하게 지내왔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려내는 아저씨들은 뉴스가 규정한 ‘탈퇴파 우익 노동자’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동거인과 사사건건 다투던 레이는 겁먹은 아이들을 보다 못해 관계 회복에 나선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어른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실제로 보여줘야 하지 않나 싶어서.” 역시 탈퇴파 중 하나인 스티브는 괴롭힘당하는 중국인 이민자들을 위해 순찰대를 결성해 이민자들의 집 앞을 지킨다. 이민자들이 싫지만, 그들이 불합리한 테러를 당하는 건 더 싫으니까.

그럼 이들은 왜 브렉시트에 찬성했을까. 국민투표를 앞두고 “브렉시트를 하면 거액의 EU 분담금을 아껴 NHS(영국 의료복지 시스템) 유지에 쓸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이 말만 믿고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이들에게 NHS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악랄한 유언비어를 퍼뜨린 정치인 ‘도미닉 커밍스’의 이야기는 드라마 <브렉시트: 치열한 전쟁>에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브래디 미카코(지은이), 노수경(옮긴이) | 사계절 | 1만 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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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