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변하지 않겠다는 말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08. 31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이번 원고를 마감하면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아픈 동안에는 머리가 아파서 사둔 책을 펼치지도 못했다. 그림의 떡이 따로 없었다. 독서가 가능한 몸과 마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기침이 멎고 열이 떨어지면서 미뤄둔 책 5권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5권 모두 재밌어서 빠르게 읽고 기한을 맞출 수 있었다.


[1]
<빅토리 노트>

“‘똥, 똥’ 하며 손가락질을 하는구나. 정말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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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육아’는 남 얘기였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인지, 아기 낳은 친구들이 늘어서인지 남 얘기 같지가 않다. 며칠 전엔, ‘유치원에 간 사나이’란 노래를 부르다 울컥했다. “예전엔 몰랐지 유치원 마중 나갈 때 두 손 벌려서 아빠 부르면 내 가슴이 뭉클하는 걸~” 예전엔 그냥 멜로디가 신나서 좋아했는데, 지금은 날 ‘아빠’라 부르는 아이를 그려보며 혼자 괜히 뭉클해지는 거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최대한 많이 관찰하고 자세히 기록하고 싶다. 막상 육아를 시작하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지금의 이 바람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 현실적인 문제로 아침마다 눈물의 인사를 해야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지금 마음은 그렇다. 나에게나 아이에게나 다신 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난 그냥 당장의 기회를 잡고, 다른 걸 잃을란다. 지금 마음은 그렇다.

내 설익은 다짐을 확신으로 바꿔준 책을 소개한다. <빅토리 노트>는 딸이 태어나던 1976년부터 이옥선 저자가 써온 육아일기다. 저자의 딸은 작가 겸 팟캐스트 진행자로 활동 중인 김하나 씨인데, 다독가인 그는 <빅토리 노트>를 자신의 인생 책으로 꼽는다. 읽다 보면 이런 보물을 세상에 남긴 옥선 씨와 하나 씨가 부러워진다.

<빅토리 노트>는 ‘하나야’가 다섯 살이 되는 날 끝난다. “만 5년이 지나면 아이들도 인격이라는 것이 생길 테고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을 테니” 지금부터는 아이의 몫으로 두는 것이다. 읽는 내내 찡했지만 마지막 일기를 보면서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순간순간이 엄마의 기쁨이었고, 고생이었고, 가슴 두근거림과 놀람 그리고 보람이었다.” 나도 엄마아빠의 기쁨, 고생, 가슴 두근거림과 놀람 그리고 보람을 잘 적어뒀다가 선물해야지.

  • <빅토리 노트> 이옥선, 김하나 | 콜라주 | 19,000원

[2]
<샤일록의 아이들>

“어째서 나는 그런 역할만 맡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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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방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비슷한 구성이다. 주인공이 따로 없고, 10개의 이야기 속에 도쿄제일은행 직원 10명의 사연이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번갈아 가며 주연이 되었다, 조연이 되었다 한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무대가 제주 푸릉마을이라면, <샤일록의 아이들>의 무대는 도쿄제일은행 나가하라 지점이다.

10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인 미스터리리는 ‘100만 엔과 니시키 대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다. 일과 후 정산하는 과정에서 100만 엔이 사라지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영업과 대리 니시키 또한 실종된다. 다양한 고민을 가진 10명의 직원의 이야기 속에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은행을 배경으로 한 인기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자이기도 한 이케이도 준은 여러 개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조합해낸다.

돈을 다루는 곳이라 그런가. 도쿄제일은행의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끈끈했던 푸릉마을과 완전 딴판이다. 칭찬, 승진, 해외발령 등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숫자로 입증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모든 등장인물의 하루하루가 버거워 보인다.

가장 안타까웠던 두 사람은 업무과 대리 다키노와 엔도다. 둘은 실적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기 안의 무언가가 망가져 버렸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거나, 아예 정신을 놓아버릴 지경에 이른다. 자기를 지키며 일하는 것은 중요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양심이든, 한 번 망가지면 회복하기 쉽지 않다.

  • <샤일록의 아이들> 이케이도 준 씀,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 | 15,800원

[3]
<도시는 다정한 미술관>

“우리는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지나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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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아티스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문화와 자라면서 배워온 모든 것이 자기 발목을 잡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내가 알고 경험한 것’을 의도적으로 잊거나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책 273쪽에 나오는 학습해소(unlearning)라는 개념이다. 아티스트만의 얘기는 아니다. 학습해소를 게을리하면 ‘내가 아는 것’에 갇히기 쉽다.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내가 잘 모르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니 생소한 분야를 흥미롭게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하자.

내겐 이 책을 쓴 박상현 저자가 그런 사람이다. 페이스북에서 박상현 저자의 글을 처음 읽은 후로, 그가 운영하는 유료 미디어도 구독하고 있다. 나에게 생소한 미국의 문화/테크/정치 소식을 쉽고 재밌게 전해주는 ‘오터레터’는, 현재 내 기준 ‘가장 돈 낼 가치가 있는 텍스트 미디어’다. (‘예쁘고 그럴듯하게’에 매겨지는 가격에 비하면 ‘쉽고 재밌게’는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

도시와 미술에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쓴 책이라서 샀다. 나의 ‘학습해소’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이번 책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과 미술작품을 훌륭히 엮어낸다. 고흐의 붓질과 스마트폰 앱 디자인을 엮고, 기념 단체 사진의 유래를 렘브란트의 초상화에서 찾는다. 금방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책 표지에 적힌 ‘페이스북의 빌 브라이슨’이란 수식어는 과장이 아니다.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은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연결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느냐’다. 박상현 저자는 이 분야에서 특히 탁월하다. 나도 탁월해지고 싶어서 그의 글을 읽는다. 그가 ‘자신만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글을 써내듯, 나도 ‘나만의 호기심’을 키우고 싶다.

  • <도시는 다정한 미술관> 박상현 | 세종서적 | 18,000원

[4]
<스필버그의 말>

“늘 영화를 진지하게 대했지만,
그와 동시에 늘 어느 정도 우스개로 대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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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문할 때부터 마음먹었다.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보고야 말겠다고. <죠스>, <미지와의 조우> 등 초기작을 볼 때만 해도 신났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영화엔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문제는 영화가 아니라 나였다. 봐도 봐도 끝이 없었다. 열 편 정도 본 것 같은데 아직도 <뮌헨>, <마이 리틀 자이언트> 등 여러 편이 남았다. 원고 마감 기한이 다가왔고, 결국 난 찜찜하게 몇 편을 남겨둔 채로 책을 읽어야 했다.

굳이 순서대로 영화를 정주행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1974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인터뷰를 모은 <스필버그의 말>을 보면, 47년 동안 그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는 빗나갔다. 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E.T.>를 찍던 1981년이나 <더 포스트>를 찍은 2018년이나 그의 1차 목표는 관객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 없음’은 그가 원한 바다. “내가 언젠가 영화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맙소사, 얼마나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절제된 작품인가’라고 말한다면, 그런 칭찬들을 돌이켜보며 ‘이런, 모욕적이군. 내 안의 아이는 어디로 갔지?’라고 말할지 몰라요.”

스필버그는 아이 같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본인에게 주어지는 책임을 잊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창의성을 펼치기 위해 철저히 계획한다. “내가 가장 즉흥적인 때는 대부분 가장 철저하게 계획됐을 때, 스토리보드가 콘티로 작성됐을 때예요. 즉흥적일 수 있는 자신감을 주거든요.” 그는 제작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매우 잘 안다. “감독 일은 장군이 되는 것과 전혀 달라요. 장군 역할은, 멀리 떨어진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당신에게 짖어대는, 돈줄을 쥔 사람의 몫이에요.”

  • <스필버그의 말> 스티븐 스필버그 지음, 브렌트 낫봄, 레스터 D. 프리드먼 엮음, 이수원 옮김 | 마음산책 | 25,000원

[5]
<골목의 조>

“어떤 날은 유독 많이 슬프고, 헤어나오기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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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할 정도로 짧은 생에 다양한 세계관과 강력한 내러티브로 무장한 작품들을 남긴 박지리 작가를 기리면서…” 박지리문학상은 2016년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뜻을 잇고자 시작된 상이다. 그의 소설을 읽기 전에 1회 수상작 <단명소녀 투쟁기>를 먼저 읽었다. 명이 짧은(短) 소녀와 명줄을 스스로 끊고(斷) 싶어 하는 소녀의 이야기다. 어디서 본 적 없는 설정이었다. 강력한 내러티브로 무장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뒤늦게 박지리 작가의 소설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골목의 조>는 2회 수상작이다. <단명소녀 투쟁기>처럼 설정이 세진 않다. 오히려 주변에서 훨씬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반지하 집에서 산다. 잠이 오지 않아 찾아간 맥주집에서는 ‘조’를 만난다. 직장 상사의 결혼식장에서는 ‘지민’을 만나 함께 와인을 마신다.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달갑지 않은 전화 한 통이 걸려 오고, ‘나’는 또 한 번 소중한 것을 잃는다.

모든 삶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이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크고 작은 상실 속에서도 남은 것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서로 아껴주는 마음’이 있으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더라도 다른 뭔가에 기댈 수 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다.

  • <골목의 조> 송섬 | 사계절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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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