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이게 다 인터넷 때문에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08. 08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디에디트 원고를 만드는 과정 중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책을 고를 때다. 이번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책 5권을 골랐다. 이제 원고를 마감했으니 또 다음 책 5권을 고를 수 있어 기쁘다. 혹시 같이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그 책이 1년 이내에 출간되었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추천 부탁드린다.


[1]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그 애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해도 날 알아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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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에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다. 의미심장한 대사와 비주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2시간이 금방 지나갔지만, 기대한 만큼 감동이 크진 않았다. 인물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아, 이 영화는 미스터리의 탈을 쓴 로맨스구나.’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역시 미스터리의 탈을 쓴 사랑 이야기다. 감독 박찬욱과 작가 한정현은 왜 사랑을 얘기하면서 거기에 미스터리라는 껍데기를 씌웠을까.

미스터리와 로맨스의 공통점은 ‘다 알면 재미없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데서 오는 긴장감, 이걸 얼마나 잘 조율하느냐가 미스터리와 로맨스의 재미를 좌우한다. 차이점도 있다. 미스터리에서는 의심이 필수다. 그래야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로맨스에서는 믿음이 필수다.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범인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놓친다. <헤어질 결심>은 다시 한 번 봐야겠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의 주인공은 형사가 아니라 연구자다. 셜록처럼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왓슨처럼 기록하는 사람. 그래서 다행이다. 의심하지 않는다. 잠시 의심했다가도 금방 믿어버린다. 덕분에 세상의 숱한 의심 속에서도 단 한 사람 날 믿어준 존재를 기어이 찾아낸다.

단편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을 읽고 한정현 작가를 처음 알았다. 작가가 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연구자고, 왓슨이다. 역사의 빈틈을 발견하고, 상상력을 보태 기록을 완성하는 사람. 그는 부지런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새 소설 <마고>가 출간됐다. 부제를 보면 또 한 번 기대할 수밖에 없다.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14,000원

[2]
<공부의 위로>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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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게으르고 한심했던 시기를 꼽자면, 단연 대학생 때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시며 그 패배감을 즐겼다. 기숙사 방에서는 게임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심함의 정수는, 월드컵 조추첨이 있었던 날 새벽이다. 등교를 준비하는 룸메이트에게 손을 흔들며 조추첨 결과대로 위닝일레븐을 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난다.

공부라고 열심히 했을 리 없다. 특별히 뭔가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수업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C를 받으면 안도했고, B를 받으면 환호했다. 학사경고만 겨우 면했다.

<공부의 위로>는 20년차 직장인이 자신의 학부생 시절을 회고하는 에세이다. 조선일보 출판팀장이 아니라, 철저히 ‘수업 듣는 학생’의 관점에서. 게으르고 한심한 학생이었던 나는 궁금했다. 열심히 수업 듣는 대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첫 20대를 보냈을까. 지루하기만 하던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받은 위로라는 건 대체 뭘까.

책에 나오는 수업들은 하나하나가 좋아 보였다. 갓 입시를 벗어난 그때, 저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수업에 집중했을 것이다. 첫 번째 후회가 밀려왔다. ‘나도 그때 수업 좀 열심히 들을 걸.’ 더 놀라운 건 저자의 기억, 아니 기록이었다. 20년 전 필기노트와 과제물, 교수님의 피드백까지 글 속에 녹여낼 줄은 몰랐다. 두 번째 후회가 밀려왔다. ‘수업 듣기 싫던 그때 그 마음이라도 대강 끄적여둘걸.’ 그랬다면 나도, <공부의 위로>는 아니더라도 <결석의 말로> 같은 책은 쓸 수 있었을 텐데.

  • <공부의 위로> 곽아람 지음 | 민음사 펴냄 | 16,000원

[3]
<가라오케 가자!>

“어제 했던 못된 말들은 이걸로 용서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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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마 야마는 요즘 가장 ‘핫한’ 만화가 중 한 명이다. <빠졌어, 너에게>, <여학교의 별> 등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판매량 차트에 이름을 올린다. 그림체나 소개글만으로는 인기 이유를 모르겠어서 리뷰란을 살펴봤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너무 재밌어요!!” “분위기만으로 짜릿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다른 만화들과 다른 매력이 있네요” 여기도 힌트가 될 만한 댓글은 별로 없었다. 결국 사서 읽어보라는 건가. 마침 신간이 하나 더 출간됐길래 구매했다.

오카 사토미는 합창부 중학생이다. 합창대회가 코앞인데 변성기가 와서 신경쓰인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나리타 쿄지는 조폭이다.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사토미를 찾아왔다. 그에겐 잘 불러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힌트: 헬로키티) 사토미는 내키지 않지만, 집요하게 질척거리는 조폭을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한여름의 노래연습을 시작한다.

만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작가를 찬양하는 리뷰들을 이해하게 된다. 독특한 설정과 나른한 분위기는 그동안 봐왔던 만화들과 분명 다르다. 짜릿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공기가 독자에게 전해진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재미가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만든다. 다음 출간작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나무위키를 보니 2020년부터 일본에서 <가라오케 가자!>의 속편 <패밀리 레스토랑 가자!>를 연재 중이라는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가라오케 가자!> 와야마 야마 지음, 현승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8,500원

[4]
<라이온의 간식>

“사자는 적이 덮칠 거란 걱정이 없답니다.
안심하고 먹고 자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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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은 시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한 달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우미노 시즈쿠의 선택은 바다가 보이는 ‘라이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라이온의 집’은 말기 암 환자들이 평화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다. 여기서 ‘환자’들은 ‘게스트’로 불린다. 라이온의 집에는 엄격한 규칙 대신 맛있는 죽, 전망 좋고 편안한 방, 잠 많고 귀여운 강아지가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라이온의 집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게스트들의 신청을 받아 ‘사연 있는 간식’을 제공한다. 시즈쿠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매주 다양한 간식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몸 상태가 나빠져 힘든 와중에도, 간식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일주일을 잘 버텨낸 자신을 격려한다.

라이온의 집에 들어가기로 한 건 시즈쿠 본인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입주 전 백화점에서의 에피소드는 그동안 시즈쿠가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이런 데 돈 쓰지 말고 기부하는 게 훨씬 낫지 않나?’ 그때 피팅룸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아니지!” 이 말을 듣고 시즈쿠는 가장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산다. 나를 의심하고 내 행복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해야겠다. “그건 아니지!”

한창 날이 더워졌을 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 입맛도 없고 축축 처지던 와중에 복숭아를 한 입 깨물었다. 상큼한 향기가 먼저 코 속으로 들어오고, 새콤한 첫맛에 눈을 찌푸렸다가 달콤한 과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불과 몇 초만에 가라앉아 있던 감각들이 활짝 깨어났다! 지치고 힘들 때도 ‘나 여기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복숭아를 삶의 마지막 순간에 꼭 다시 한 번 먹어야지.

  • <라이온의 간식>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 14,800원

[5]
<인터넷 때문에>

“대부분의 청소년은 SNS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서로에게 중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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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종영한 <톡이나 할까?>는 여러모로 새로운 예능이었다. 토크쇼인데 말이 없다. 진행자도 게스트도 손에 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메신저로만 대화한다’는 룰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얼굴보다 채팅창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럼 기존 토크쇼에서는 몰랐던 차이가 느껴진다. 같은 말이라도 누군 길게 누군 짧게, 누군 이모지로 누군 gif로, 누군 느낌표(!)로 누군 줄임말(…)로 말한다…!

방송에서는 새로운 그림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잘 아는 소통법이다. 이메일로, 메신저로, 커뮤니티 댓글로, SNS로 소통하게 된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으니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서만큼은 유명 스타들도 한결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인터넷이 있기 전까지는 글(문어)과 말(구어)의 구분이 분명했다. 글은 아무래도 격식을 차릴 때 쓰는 도구였다. 문법에 맞춰 쓰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 비해 말은 좀 더 편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문법에 좀 안 맞아도 뜻만 통하면 괜찮았다. 그런데 글과 말이 섞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때문에.

말과 글 속의 미묘한 뉘앙스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 또한 재밌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요즘 내가 눈여겨보는 건 업무용 메신저 슬랙이다. 슬랙에서 누가 웃긴 말을 했을 때 누군 [웃는얼굴] 이모지를 달고, 누군 ‘ㅋㅋㅋㅋ’ 댓글을 단다. 누군 이모지가 달리는 걸 더 반가워하고, 누군 댓글이 달려야 비로소 안도한다. 슬랙 커뮤니케이션에는 매뉴얼이 없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인터넷 때문에.

  • <인터넷 때문에> 그레천 매컬러 지음 | 강동혁 옮김 | 어크로스 펴냄 |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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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