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상실의 시대, <대혼돈의 멀티버스>

안녕, 에디터B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 시사회에 다녀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을 빠져오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안녕, 에디터B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 시사회에 다녀왔다. 엔딩 크레딧이…

2022. 05. 04

안녕, 에디터B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 시사회에 다녀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을 빠져오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실을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다른 차원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일까?’ 멀티버스라는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찬 영화이지만 진지한 질문이 숨어있다.

*엔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아주 많이 들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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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는 주입식 공부시키듯 꾸준히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언급해왔다. 본격적으로 멀티버스를 중심에 놓고 줄거리를 짠 건 <닥터 스트레인지2>가 처음인데, 그동안 마블이 내준 숙제를 꼼꼼히 했다면 그리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멀티버스는 우리말로 ‘다중우주’라고 번역되는데, 쉽게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석준(나)이 살고 있는 유니버스가 있고, 또 다른 김석준이 살고 있는 유니버스가 또 있다. 이런 유니버스가 무한히 많다는 세계관이다. 각각의 유니버스의 김석준은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사소한 선택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페기 카터가 캡틴 아메리카 대신 히어로가 될 수도 있고, 욘두가 피터 퀼 대신 와칸다의 트찰라를 납치할 수도 있다. 지금 예로 든 상황은 모두 디즈니플러스 <What if…?>에 나오는 내용이다.

1400_doc4 [아메리카 차베즈를 쫓아 지구까지 따라온 괴물]
38293892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인물 ‘아메리카 차베즈’]

<닥터 스트레인지2>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차원 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가 지구에 괴물과 함께 떨어진다. 괴물로부터 잠시 소녀를 구해준 닥터 스트레인지는 차베즈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완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완다는 흑마법서 다크홀드에 의해 타락해 초강력한 파워를 얻음과 동시에 흑화된 상태. 완다는 아메리카 차베즈로부터 차원 이동 능력을 강탈해 다른 유니버스로 이동하려고 한다. 완다는 사랑하는 남편과 쌍둥이 아들을 모두 잃고 행복을 느낄 수 없지만, 다른 유니버스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차원 이동을 하며 아메리카 차베즈를 완다로부터 보호하려고 하고, 슈퍼 초강력해진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죽일 듯 뒤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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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가 얼마나 굴곡진 삶을 살았는지, 많은 것을 잃었는지는 디즈니플러스 <완다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도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줄거리는 이렇다.

완다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는 것으로 시작해 어른이 되어서는 쌍둥이 오빠를 잃었고, 나중에는 우주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남편 비전까지 죽여야 했다. 상실의 아픔이 폭발하며 초능력 파워가 강화되고 그 힘으로 ‘웨스트뷰’라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고 비전과 쌍둥이 아들까지 창조한다. 하지만 완다에 의해 창조된 비전과 쌍둥이는 완다가 초능력으로 통제하는 웨스트뷰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고, 완다는 마을 사람의 정신을 괴롭힌 것을 반성하며 결국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사라지게 만들어야 했다. <완다비전>은 <닥터 스트레인지2>를 보기 전에 꼭 봐야 할 작품이다. <완다비전> 외에 <로키>도 봐야 된다고 말하는데, <로키>는 안 봐도 큰 상관 없다. 대신 <What if…?> 에피소드 중 ‘만약 캡틴 카터가 퍼스트 어벤져라면?’, ‘만약 닥터 스트레인지가 손이 아닌 마음을 잃었다면?’ 두 에피소드는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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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닥터 스트레인지2>에 대한 감상평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마블 영화를 보고 정말 오랜만에 놀랐다. MCU의 프랜차이즈 영화가 계속 흥행하던 이유는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캐릭터가 품앗이하듯 찬조 출연을 해주고, 무엇보다 호불호 갈리지 않게 대중적인 코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쾌한 액션, 화려한 CG, 적당한 유머, 우정과 사랑… 그런데 그것도 10년을 보니 지겨워졌다. 마블 영화라면 대충 어떤 재미를 줄지 뻔하다는 느낌이다. 그런데<닥터 스트레인지2>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샘 레이미 감독은 MCU 작품 중 가장 반짝거리는 독창적인 히어로 무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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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개봉되기 전, <닥터 스트레인지2>는 공포 영화에 가깝다는 말이 떠돌았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다만 직접 보니 공포 영화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깜짝 놀래키는 연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방식, 음산한 사운드, 악령, 좀비 같은 소재들이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를 떠올리게끔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좀비’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생긴 건 좀비지만 엄연히 좀비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스트레인지가 완다를 막기 위해 완다가 있는 유니버스의 스트레인지에게 빙의하는데(오직 자신에게만 빙의할 수 있다), 그게 스트레인지의 시체였던 것. 살점이 뜯어지고 턱관절이 보이는 좀비 스트레인지는 악령으로 만든 검은색 날개를 달고 완다와 싸운다. MCU에서 이렇게 무섭고 기괴한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다리를 절뚝이는 완다가 스트레인지를 쫓아가는 장면도 그렇고, 눈이 세 개 달린 스트레인지가 창살에 꽂혀 잔인하게 죽는 장면, 괴물의 커다란 눈알이 뽑히는 장면도(뾰족한 것에 꽂히는 장면이 많다) 지난 마블 시리즈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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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happy?”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스트레인지가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찾아갔을 때(전 여친 결혼식에는 왜 찾아간 건지 모르겠지만) 크리스틴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스트레인지는 히어로의 삶을 선택한 대신 크리스틴과는 함께할 수 없었다. 스트레인지는 항상 크리스틴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Are you happy?”라는 질문은 영화에서 수미쌍관으로 등장하고, ‘행복’이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영화는 감정과 욕망을 다루는 창작물이다. 웬만한 창작자라면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사용할 때 즐거움이나 유쾌함이라는 감정에 초점을 맞췄을 것 같다. 하지만 샘 레이미의<닥터 스트레인지2>는 긍정적인 감정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부정적이고 허무한 감정이 영화 분위기를 지배한다. 스트레인지나 완다는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져도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다른 차원의 스트레인지도 마찬가지다. 다른 선택을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보여주지 않는다. 스트레인지는 어떤 유니버스에서나 독단적으로 행동했고, 그래서 죽었고, 다른 히어로와 어울리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크리스틴과 함께하지 못했다. 어떤 유니버스에 가도 크리스틴과 백년해로를 하는 시나리오는 없다. (이 내용은 <What if…?>에 나온다)

살면서 ‘만약 그때 내가…?’라는 흥미로운 가정을 한 번쯤 해보게 된다. ‘그 회사에서 조금 더 버틸걸’, ‘그때 헤어지자고 말하지 말걸’ 이런 말들. <닥터 스트레인지2>에 나오는 수많은 유니버스를 보면 어느 세상에서나 ‘나라는 존재는 조금씩 달라도 결국 비슷한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설정은 허무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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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 스트레인지가 다른 유니버스의 스트레인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서 좋은 결과를 낳지 않나요? 모두가 똑같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 말도 맞다. 다른 유니버스의 스트레인지는 아메리카 차베즈의 능력을 빼앗아서(죽여서) 자신이 가지는 게 유니버스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좋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스트레인지는 능력을 빼앗는 대신 그녀가 직접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끔 용기를 주니까.

1400_doc6 [눈이 세 개 달린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흑마법서를 건드려 타락한 빌런이다.]

나도 거기까지 보고 ‘아, 모든 유니버스의 스트레인지가 동일하게 나쁜 선택을 하는 건 아니구나, 옳은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환경이 더 중요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마지막 장면에서 엄청난 떡밥이 나온다.

다른 유니버스의 눈 세 개 달린 스트레인지는 음악을 들으면 괴로워했는데, 갑자기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더니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그 스트레인지는 눈 세 개 달린 스트레인지에게 진작 죽었고, 이 스트레인지는 착한 스트레인지가 아니라는 떡밥이다. 이 연출에 대해서는 살짝 헷갈리기도 하는데, 혹시 다른 스트레인지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주인공 스트레인지가 흑마법서를 사용하면서 흑화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되지 않을 거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서 “스칼렛 위치보다 위험한 건 닥터 스트레인지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장면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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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차베즈란 캐릭터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은 위에서 말했든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차원의 문이 열리는데, 어린 시절 처음으로 포털을 열었고, 그때 부모님이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베즈는 본인이 부모님을 죽인 셈이라고 자책한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는 능력은 멋있지만 차라리 평범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다. 이런 삶의 아이러니는 차베즈뿐만 아니라 완다, 스트레인지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세 인물은 모두 상실의 슬픔을 안고 있는 캐릭터라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완다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초능력으로 상실을 극복하려고 했고, 스트레인지와 차베즈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반가운 인물이 나온다. 등장한다는 소문이 떠돌던 자비에 교수가 일루미나티의 멤버로 나오고, 캡틴이 된 페기 카터 ‘캡틴 카터’도 일루미나티 멤버다. 일루미나티는 완다와 전투를 벌이는데, 엄청 강력한 척하더니 완다에 의해 거의 즉살된다. 캡틴 카터는 자신의 방패에 몸이 절단되고, 자비에 교수는 초능력 싸움에서 패배한다. 도대체 완다는 얼마나 강한 존재인걸까. 쿠키는 2개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온 뒤 나오는 두 번째 쿠키는 별 내용이 없다. 첫 번째 쿠키만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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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스트레인지2>를 얘기하면서 상실, 슬픔, 행복, 사랑 같은 말랑말랑한 단어를 이렇게 많이 말하게 될 줄 몰랐다. 직접 보면 그럴 수밖에 없구나 싶을 거다. 영화가 끝나고 ‘여기서 행복할 수 없다면, 저기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니 만약 다른 유니버스로 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구태여 가지 말자. 우주에서 짱 센 스칼렛 위치도 하지 못한 일이다. 이 곳의 상처는 이곳에서 치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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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