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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밤, 구찌 레스토랑에서

나는 금요일을 사랑한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까지의 치열했던 고민과 고통은 금요일밤 6시가 되면 모두 0에 수렴한다. 얼마 전의 금요일도 그랬다....
나는 금요일을 사랑한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까지의 치열했던 고민과 고통은 금요일밤 6시가…

2022. 04. 13

나는 금요일을 사랑한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까지의 치열했던 고민과 고통은 금요일밤 6시가 되면 모두 0에 수렴한다. 얼마 전의 금요일도 그랬다.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있었고, 화상 미팅이 있었고, 그날까지 완성해야 하는 기획안이 있었다. 도저히 한 사람의 몫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업무량이었지만, 놀랍게도 해냈다. 왜냐면 내 캘린더에 ‘Gucci Night’이라는 화려한 스케줄이 등록돼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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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오스테리아 서울]

구찌가 서울 이태원에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픈런’을 마음먹었다. 학교 다닐 적에 수강 신청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해본 일이 없건만, 오후 6시에 열린다는 예약 홈페이지 화면을 띄워두고 카운트 다운까지 했을 정도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초 단위로 예약 가능한 자리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1순위로 원하던 날짜를 예약하지 못해 굼뜬 손짓으로 당황하고 있었는데, 순발력 좋은 일행이 금요일 디너 예약에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3월 16일에 열렸던 1차 예약 좌석은 4분 만에 마감되었다더라. 우리가 예약한 날짜는 거짓말 같은 4월 1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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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구찌 가든]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이 이토록 큰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선보이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구찌와 세계적인 셰프 마시모 보투라가 협업해 만든 이 레스토랑은 2018년 피렌체의 구찌 가든 1호점을 시작으로 2020년 로스앤젤레스 베버리 힐스 2호점, 2021년에 도쿄 긴자에 3호점을 차례로 열었다. 전 세계적으로 몇 없는 구찌 오스테리아가 해외여행도 어려운 이 시국에, 서울 이태원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의 마음이 설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덧붙이자면 구찌를 비롯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F&B 분야로 경험을 확장해가고 있는 게 흥미로웠고 말이다. 이제는 명품 로고를 가슴팍에 써 붙이는 것 말고도, 이 브랜드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소비하는 방식이 더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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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은 플래그십 스토어인 ‘구찌 가옥’ 6층에 위치하고 있다. 모처럼 차려입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는데 기대하던 것보다 작은 규모에 조금 당황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7시 반 정도였기 때문에, 테이블마다 저녁 식사가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했고, 테이블 간격도 좁았다. 마치 레스토랑 안의 모두가 일행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느 집에서 열리는 홈 파티에 초대받은 기분이랄까? 실제로 메인 다이닝룸의 좌석 수가 28석에 불과했기 때문에 명성에 비해 아담한 공간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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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는 기존 구찌 오스테리아 피렌체와 동일하게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구찌의 미학적 요소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선명한 초록의 색감 덕분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피코크 그린 컬러의 벨벳 의자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전 세계 구찌 오스테리아에서 동일하게 사용한다는 식기까지 눈길이 가는 디테일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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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은 구입할 수 있는지 살짝 문의했더니, 구찌 오스테리아에서만 사용하는 디자인이고 따로 판매는 하지 않는다고. 하다못해 메뉴판까지 구찌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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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는 ‘거울의 방’이라고 불리는 프라이빗한 공간이 있다. 최대 8명까지 앉을 수 있는 공간인데 내가 방문했던 날에는 비어있었다. 

메뉴는 단품으로 선택해서 주문할 수도 있지만, 셰프가 준비한 ‘스토리’를 그대로 즐기고 싶어서 테이스팅 메뉴를 주문하기로 했다. 5코스와 7코스 중 선택할 수 있는데 각각 12만 원, 17만 원이다. 5코스와 7코스의 갭이 상당히 큰 편이다. 특히 5코스에서는 구찌 오스테리아의 시그니처인 에밀라 버거나 토르텔리니를 맛볼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7코스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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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가 작은 찻잔에 담겨 나와서 뭔가 싶었는데, 따뜻하게 준비된 맑은 수프다. 짭짤하고 살짝 꼬릿한 치즈의 감칠맛이 느껴진다. 꼬릿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실제로 일행 중 한 명은 다 먹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혀를 자극하는 맛이 아주 즐거웠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입안에 응축된 맛이 단숨에 가득 찬다. 호로록 삼키니 작고 물컹한 게 하나 씹힌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의 자투리를 이용해서 만든 토르텔리니다. 보통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재료의 가장 맛있는 부분만 사용하고, 자투리 부분은 버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마시모 보투라 셰프의 신조가 버려지는 식재료를 최소화하는 거라고. 

곁들임으로 나오는 빵과 그리니시도 맛이 훌륭하다. 올리브 오일은 풀향이 솔솔 풍기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직원분이 발사믹은 절대 내어주지 말라는 셰프의 특명이 있었다고 언질 준다. 이렇게 맛있는 빵에는 발사믹처럼 강한 맛은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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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7코스의 첫 요리다. SEOUL GARDEN이라는 이름의 샐러드인데,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굉장히 인스타그래머블한 메뉴라고 생각했다. 무슨 뜻이냐면 맛이 없어 보였다는 얘기다. 근데 놀랍게도 정말 맛있다. 모든 채소는 직접 계약한 농장에서 따온 것들이라고. 미니 로메인이 얼마나 아삭하고 신선하던지. 사이사이 들어간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로 만든 칩과 발사믹 소스가 짭짤하고 새콤하게 입맛을 돋운다. 10년을 숙성했다는 발사믹은 기분 좋은 산미가 느껴지고 말이다. 나비 모양의 장식은 배와 감자로 만든 칩이었는데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았지만, 바삭한 식감을 더해줘서 입안에서 씹는 재미가 있었다.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다채롭고 밸런스가 훌륭한 샐러드였다. 사실 ‘구찌 레스토랑’이라는 타이틀이 재밌어서 방문한 거였는데, 이 샐러드를 먹고 오늘 저녁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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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요리는 FARINATA. 한국의 ‘수수부꾸미’를 모티브로 한 작은 사이즈의 병아리콩 팬케이크 위에 드라이 방울토마토, 치즈, 올리브, 케이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올렸다. 솔직히 정말 화려하고 맛없어 보인다. 알록달록한 비주얼로 승부 보는 요리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새콤하고 달콤하고 쫀득하다. 게다가 낯설지 않다. 이게 무슨 맛이라고는 정확히 표현하긴 어렵지만, 한 입 맛보자마자 “헐, 이거 맛있어!”하는 반응이 즉각 터져 나온다. 모두가 어쩐지 친숙한 맛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 것으로 보아, 이탈리안 쉐프가 ‘한국의 입맛’을 파악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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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메인 요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TORTELLINI. 스타터로 나온 수프 안에도 들어 있었던 그거 맞다. 토르텔리니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빚어내는 만두형 파스타다. 이탈리아에는 수많은 종류의 파스타가 있지만 마시모 보투라 셰프의 고향인 모데나에서는 이 토르텔리니를 즐겨 먹는다고. 실제로 그의 시그니처 메뉴인 동시에 ‘할머니의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추억의 요리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정말 맛있었다. 소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만으로 맛을 냈는데 충분히 짭짤하다. 24개월을 숙성시켰다는 크림소스는 꾸덕하고, 프리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 특유의 꼬릿한 감칠맛이 입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다. 이 자극적일 만큼 진한 풍미가 토르텔리니 안에 가득 차 있는 송아지고기와 돼지고기를 만나서 부드러워진다. 손톱만 한 크기에 “이게 뭐야…”하고 먹기 시작했다가, 입안에서 느껴지는 파워풀한 맛에 깜짝 놀란 요리. 첫 번째 와인이었던 프로세코 한 병을 채 비우기 전이었는데, 토르텔리니를 한 입 먹자마자 레드 와인 생각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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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준비성이 철저한 내가 미리 두 번째 와인을 주문해두고 마시기 전에 오픈해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디캔팅이 된 상태로 스탠바이 중이었기 때문에 타이밍 좋게 토르텔리니와 레드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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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첫 번째 와인은 보르가 프로세코. 프레시하고 가볍다. 두 번째 와인은 콜도르치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2016. 베리 향이 기분 좋게 스친다. 타닌이 적고 바디감도 가볍다.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데다 이날 음식과 잘 어울렸다. 가격은 각각 13만 원, 14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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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요리는 ‘구찌 오스테리아’를 검색해봤다면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이 보였을 메뉴다. 바로 EMILIA BURGER. 왜냐면 구찌 오스테리아 로고가 새겨진 핑크색 박스가 너무나 포토제닉하니까. 버거 박스를 열기 전에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어 셔터를 신나게 누른다. 실제로 보면 크기가 작아 더 깜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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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에 포함된 버거인 만큼 헤비한 사이즈는 아니다. 셰프가 인공적인 맛을 모두 배제하고 ‘진짜 식재료의 맛’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버거라고. 미니 번 사이에 한우 패티와 직접 만든 살사 베르데 소스, 발사믹이 발라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케첩이 진짜 토마토맛은 아니지 않냐는 설명을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좋은 재료에 집중한 심플한 맛이다. 오히려 패티나 소스보다는 빵이 맛있어서 놀랐다. 여태까지 메뉴의 포션이 너무 적어서 도무지 배가 차질 않았는데, 버거를 먹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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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요리는 HANWOO 56.7. 메뉴 이름에 들어가는 56.7은 마시모 보투라 셰프가 생각하는 스테이크의 가장 완벽한 굽기 온도라고. 뜨끈뜨끈한 스테이크 요리를 상상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56.7도면 미적지근한 상태니까. 하지만 정말 부드럽다. 스테이크 형태를 한 푸딩처럼 부드럽게 씹힌다. 대체 왜 이렇게 조금 주는지 궁금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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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저트 두 코스가 남았다. SPRITZ 는 판나코타 위에 상큼한 자몽 소르베를 올리고, 샐러드에서와 같은 기교로 배로 만든 칩이 올라간다. 모양이 환상적이고, 맛도 환상적이다. 크림소스, 버거, 한우 스테이크로 기름칠이 되어 있던 입안에 단숨에 상큼해진다. 여기에 아삭하게 씹히는 종이접기 모양의 칩이 더해져 입안이 즐겁게 바스락거린다. 개인적으로 시트러스나 소르베를 사용한 가벼운 맛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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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MARLEY는 마지막 디저트. 찰스는 셰프의 아들의 이름을 따왔다고. 초코와 헤이즐넛을 좋아하는 찰스의 취향을 칭찬한다. 부드럽고 가벼운 폼과 진하고 무거운 초콜릿 무스의 조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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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 끝난 뒤에는 쁘띠프루 디저트도 차려진다.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티라미수와 더블 에스프레소를 추가 주문했다. 초반에도 언급했지만 무조건 7 코스를 주문하시길. 일행 중 한 명이 식사량이 워낙 적어 걱정했는데, 모든 그릇을 싹싹 비울 만큼 양이 많지 않다. (괄호 안에 숨어서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2차로 너구리를 끓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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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식사였다. ‘구찌 레스토랑’이라는 네임밸류에 끌려 온 거였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공간이 너무 좁아서 불만스러웠는데, 식사를 마칠 때쯤엔 마시모 보투라 셰프의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정다운 장소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어느 요리 하나가 강한 임팩트가 있거나, 살면서 맛보기 힘든 진미였다기보다는 7코스로 진행되는 스토리 전체가 조화롭고 흥미로웠다. 셰프의 스타일을 충분히 파악해가는 재미도 있고 말이다. 단품으로 주문한다면 약간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레스토랑은 서비스도 맛의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레스토랑에서 생각보다 여유로운 서비스를 경험한 것도 만족스러웠다. 식재료 하나하나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넉살 좋은 직원분이 설명해줄 때마다, 음식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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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서늘할 때라 테라스를 오픈하기 전이었는데, 한 번 둘러보고 가겠냐는 말을 듣고 야외로 나가보았다. 세상에 너무나 근사한 공간이었다. 해가 따뜻하고 바람이 선선한 시절에 이 테라스에서 식사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수강신청급의 예약을 다시 뚫을 수 있다면, 한 번 더 방문하고 싶다. 행복했던 에디터H의 금요일 밤의 기록은 여기까지. 언젠가는 피렌체에 있다는 구찌 오스테리아도 가볼 수 있기를.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