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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셀러의 필요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

안녕하세요, IT칼럼니스트 최호섭입니다. 욕심, 욕망은 삶의 큰 동기가 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길에 오릅니다. 지금...
안녕하세요, IT칼럼니스트 최호섭입니다. 욕심, 욕망은 삶의 큰 동기가 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2022. 04. 05

안녕하세요, IT칼럼니스트 최호섭입니다. 욕심, 욕망은 삶의 큰 동기가 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길에 오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머릿속에는 치솟는 기름값 ‘걱정’에 전기차를 기웃거리다가 포르셰 타이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남은 평생 넣을 기름값의 10배 정도를 곱해야 저 차 값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 ‘뇌느님’은 연료 비용에 이 어이없는 선택지를 꺼내놓습니다.

다행히도 제 통장 잔고가 허락하지 않아서 타이칸은 상상에 머물게 됐지만 이런 ‘합리적 소비’는 늘 엉뚱한 답을 불러 옵니다. 사실은 합리적 소비가 아니라 소비의 합리화인 셈이죠. 꼭 비싸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는데 갖고 싶은 것들은 항상 튀어 나옵니다.


#1 “와인 보관할 곳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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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얼마 전 에디터H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에디터H는 집에서 일 하다가 문득 ‘미니 와인 셀러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네, 모든 ‘합리적 소비’의 시작은 꼭 필요하다는 절심함이 아니라 이렇게 별다른 이유가 없이 불현듯 등장합니다.

그 순간 저는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있는 에디터H의 마음이 눈 앞에 훤히 보입니다. 와인 셀러를 사는 단계로 넘어가 있는 거죠.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마도 벌써 샀거나 곧 사게 될 겁니다. 그 속내를 좀 넘겨 짚어볼까요? H는 틀리면 틀렸다고 댓글을 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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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까지 와인 셀러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와인을 수집하는 것도 아니지요. 아마 이게 정확히 와인에 왜 필요한지도 잘 모를 거에요. 그런데 문득 책장을 보니 책들 사이에 아름다운 어깨라인을 가진 영롱한 와인병들이 눈에 띕니다. 책이 책꽂이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와인도 제 자리에 누워 있어야죠.

음식점에서 와인을 마실 때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 바로 멋드러진 셀러에서 한 병 딱 꺼내서 라벨을 보여주고 테스트하는 순간, 그리고 첫 모금을 들이킬 때죠. 사실 와인은 조금이라도 미리 열어 두어야 더 맛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많은 소비의 이유가 바로 그 과정에서 오는 경험일 겁니다. 그리고 와인의 시작은 바로 셀러인 거죠. 셀러가 있어야 집에서도 완벽한 와인 테이스팅의 경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소비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2 “하지만 그게 진짜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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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저는 찬물을 시원하게 끼얹습니다. 소비를 합리화하는 단계의 예비 소비자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한 마디, ‘그게 진짜 필요해?’입니다.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저같은 ‘와린이’의 입장에서 와인 셀러는 정말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입니다. 아, 와인 셀러를, 또 이걸 쓰시는 분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전문가분들은 화내지 말아주세요. 저도 이미 와인 셀러를 두고 소비의 합리화를 수백번 했지만 갈대같은 제 마음을 꺾지 못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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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셀러에 넣을 만한 와인이 없습니다. 이건 와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품종도 구분하지 못했던 제가 슬금슬금 맛을 찾고, 여행 가서 와이너리도 가 봅니다. 아주 비싼 건 아니어도 꽤 값 나가는 와인도 맛 봤습니다. 네, 아주 충격적인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향은 최상의 맛 보다는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그리고 부담이 없는 데일리 와인을 재미있게 마시는 것이 훨씬 즐거운 경험을 주었습니다. 아마 저도 갑자기 꽂혀서 기백만원씩 하는 와인을 사모으기 시작한다면 큰 셀러를 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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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가장 자주 마시는 와인은 ‘까시아로 델 디아블로’입니다. 가끔 몬테스 알파로 사치를 부려 봅니다. 혼자 일 하면서 마셔도 좋고, (요즘은 못하지만)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하기에도 좋습니다. 다들 한 번쯤은 본 적 있고, 또 마셔봤을 와인이죠. 그리고 모난 데 없는 와인들입니다. 이걸 마트에서 박스로 사 오는 재미가 있는데 한 박스를 사도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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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특별한 날에 마시는 경우라면, 또 그래서 더 좋은 와인 한 병이 중요하다면 적절한 와인을 모으고, 또 그걸 잘 보관해 두는 게 필요하겠죠. 하지만 저는 술을 즐기고, 틈틈이 자주 마십니다. 기분에 따라서, 가격대에 따라서 마시고 싶은 와인이 7,000원부터 30만 원까지 이미 리스트가 있고요. 그것들은 집 앞 마트나 와인 판매점에서 다들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네, 길게 이야기했지만 마실 것도 부족한데 그걸 어디다 보관하겠어요. 식초가 되기 전에 빨리 어떤 핑계들을 만들어서 마셔야죠. 조금 길게 두고 싶다면, 그것도 몇 달 이내지만 김치냉장고의 작은 칸 하나를 빌려서 병을 담아 둡니다. 이왕이면 시원하게 마시는 게 중요한 샴페인이나 쇼비뇽 블랑들이 들어 있죠. ‘페리에 주에’나 ‘꼬든 네그로 까바’, ‘클라우드 베이’ 같은 것들인데 언제든 꺼내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 중요한 건 와인의 역할, 하지만 갖고 싶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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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이야기에 분명 기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와인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결국 와인을 마시는 경험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달라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와인은 그렇게 고상한 취미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고급 문화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막걸리와 소주, 맥주와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술이라고 생각해요. 어렵게 대하면 관계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즐겁게, 재미있게, 그리고 부담 없이 하루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그게 그날의 가장 좋은 와인이죠.

그리고 아주 현실적으로 그 커다란 와인 셀러를 둘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보면 거실에 덩그러니 있는 와인 셀러가 꽤 멋져 보이는데, 그걸 집에 둘 생각을 하면 ‘굳이?’라는 생각이 막 드는 거죠. 특히나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생각하면 와인 셀러가 차지하는 1/4평 남짓한 공간이 과연 그렇게 투자할 만한 건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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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글을 이렇게 길게 끌고 가는 이유는 저도 너무 사고 싶은 게 바로 와인 셀러이기 때문입니다. 제 현실에 가장 쓸모 없는 소비 중 하나가 와인 셀러인데, 아직도 문득문득 마트나 백화점에 전시된 제품을 보면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같은 고민을 반복하지요.

에디터H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저는 ‘와인 셀러에 넣을 와인이 있다면 빨리 마셔라’고 이야기를 던졌고, 지금도 와인 셀러를 살 돈이면 더 좋은 조건에서 미리 보관해주고 있는 마트에서 한 병이라도 더 사서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와인이어도 ‘리델 오’ 잔에 따라서 좋은 가족, 친구와 맛있는 음식에 즐겁게 마시면 가장 맛이 피어납니다. 때로는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제 입맛에 감사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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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마트에 있는 것과 내 방에 있는 것의 심리적 안정감의 차이가 크죠. 언젠가 디에디트 원고료를 모아서 꼭 사게 될 포르셰 타이칸이 지금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생산을 준비하겠지만 그게 우리집 지하 주차장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또 에디터H는 언젠가 와인 셀러를 꼭 한 번 사게 될 겁니다. 만족을 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지요. 그게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의 장바구니잖아요. 소비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명분 만이 필요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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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섭

지하철을 오래 타면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모바일 기기들이 평생 일이 된 IT 글쟁이입니다. 모든 기술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공부하면서 나누는 재미로 키보드를 두드립니다.